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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오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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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7월호>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농업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대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면 가을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늦봄에서 초여름 즈음에 수확하는 곡식도 있다. 일례로 “보리”가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 뒤에 오는 일요일에 수확의 첫열매들을 가져오는 절기, 즉 초실절을 제정하셨는데, 이때에 바쳐야 했던 곡식이 바로 “보리”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수확을 거두면, 너희는 너희 수확의 첫열매들의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올지니라. 그러면 그가 주 앞에서 그 단을 너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흔들지니 안식일 후 다음 날에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지니라』(레 23:10,11). 또 시간이 조금 흘러 5월이나 6월이 오면 지난해의 가을에 뿌렸던 밀을 수확할 수 있다. 이 밀의 첫열매들을 바치는 명절이 바로 “밀 추수”의 초실절인 칠칠절(오순절)이다(출 34:22, 레 23:17).히브리어로 오순절을 “샤부옷”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 보자면 “주들”(weeks) 혹은 “일곱들”이라는 뜻이다. 초실절로부터 일곱이 일곱 번 지나면, 그러니까 마흔아홉 날들이 지나면 그 다음 날인 50번째 날이 오순절이 된다. 사실“오순절”(Pentecost)이라는 단어는 모세의 율법에는 나오지 않다가, 신약성경에서야 등장한다. 누가와 바울은 각각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오십 번째 날”이라는 뜻의 헬라어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ή)라는 단어로 오순절(칠칠절)을 표현했다(행 2:1; 20:16, 고전 16:8). 우리말 명칭 “오순”도 다섯 오(五)에 열흘순(旬)을 써서 50번째 날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현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오순절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 언제였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오순절이 있는 셋째 달(시완 월)이었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다(출 19:1). 유대인들은 유월절부터 오순절까지에 이르는 약 50일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조상들이 유월절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통과하고 율법을 받기까지의 여정을 기억하면서 일종의 애도 기간을 갖는다. 육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면서, 율법을 받은 날을 기억하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일반적으로 결혼식과 같은 큰 축하 행사를 갖지 않으며, 머리도 자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기도 한다. 다만 제33일절이라고 하는 33번째 날만큼은 예외이다. 제33일절은 축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음악 등을 즐길 수 있다.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는 세 살 된 남자 아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이발하는 날이기도하다.
중세 암흑시대의 끝 무렵에 살았던 프라하의 마하랄(Maharal)이라는 랍비는 초실절에 보릿단을 드렸던 것과 오순절에 밀을 드렸던 것을 대조하면서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리는 주로 동물들이 먹는 곡식이므로 출애굽 당시이스라엘 백성들의 낮은 영적 수준을 의미하고, 밀은 율법을 받을 때쯤 되어 높아진 영적 수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위 “랍비적 해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또 얼마나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상과 추론의 산물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마하랄의 말마따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높은 영적 수준”을 가졌던지, 모세가 율법을 받는 동안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세상인 이집트의 방식을 따른 “록 콘서트”를 열어 버리고 말았다(출 32:1-6).
어쨌거나 오순절은 이 애도 기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이날 전통을 지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위해 회당에 모여서 밤을 새워 율법을 공부한다. 이를 티쿤 레일 샤부옷(Tikkun Leil Shavuot)이라고 하는데, 그 뜻을 해석해 보면 “오순절 밤의 교정(고침)” 정도가 된다. 이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론을 듣고 토론하기도하고, 또 연극이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부분을 찾아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오순절에는 유대인의 식탁 또한 특별해지는데, 여느 다른 명절들과는 달리 오순절에는 치즈 케이크나 블린츠(치즈나 잼 등을넣어 구워 낸 팬케이크) 같은 유제품을 이용한 요리가 주 메뉴가 된다. 랍비들은 “왜 하필 유제품이냐”는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말씀)의 젖을 통해 아이 이스라엘을 양육하셨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코셔(유대인들의 율법과 전통에 의해 마련된 음식)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범법의 소지가 없는 유제품을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특별히 룻기를 읽는다. 룻기의 주된 시간적 배경 또한 유월절부터 오순절에 걸친 기간이다. 여기서 잠깐 룻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되짚어 보자. 모압 여인으로서 이방인 출신이었던 룻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때 베들레헴으로 왔고(룻1:22), 밀 추수 기간, 즉 오순절 즈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호의를 얻었다(룻 2:23).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아스가 그녀에 대한 값을 치르고 룻을 “구속”해 주었고,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룻 4:8-13). 유대인들은 룻기를 읽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모두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거나 만족스럽지가 않다. 예컨대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듯이, 유대인들의 조상들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는 식이다(이것이 개중에 좀 나은 설명이다). 오순절과 룻기 사이를 연결하는 데 있어 그들의 설명은 어딘가 억지스럽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퍼즐 조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룻이 어떤 존재를 예표하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바로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이 살다가, 주 예수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교회 시대의 이방인 성도들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면서 시작되었다(행2:1-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바로 이“밀 추수의 초실절”인 오순절(행 2:1)에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살게 된(롬 6:4)사람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오순절은 누룩을 넣은 빵 두 덩어리를 음식제사로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누룩을 넣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누룩은 죄나 거짓 교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마 16:12, 고전 5:6-8). 따라서 오순절에 누룩을 넣은 빵은 완전무결한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여 주신 존재를 상징한다. 바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인 것이다. 두 덩어리의 빵이 드려지는 이유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와 연합하기 때문이다(엡2:11-19).
오순절이 지나면 나팔절이 오기까지 4개월 동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이 없었다. 다만 각자 흩어져서 바쁘게 농사를 지을 뿐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교회 시대에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오순절은 어느 모로 보나 교회를 예표하는 명절이다.
그런 까닭에 오순절 만큼은 다른 일곱 명절들과 다르게 그 초점을 교회에 맞춰야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특히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오순절은 가장 “덜 기념하는”명절이라고 한다. “의식”에 늘 목을 매는 유대인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른 명절들과는 달리 특징적인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순절을 지키는 당사자들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그 명절과 룻기의 연관성을, 그리고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구약의 명절들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먼(갈 4:10, 골 2:16,17) 그리스도인들이 그 명절에 관한 진리를 쉽게 깨닫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추시는 진리의 조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림자만 볼 뿐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골 2:17, 히 10:1). 누구라도 빛을 거부하면 짙은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잠 4:18,19, 요 3:19-2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