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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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장막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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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6월호>

지난해 10월 7일 새벽,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에서 밤새 열렸던 한 음악 축제장에 중무장한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축제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실종되었고, 이들이 납치당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곳곳에서 총성과 포성이 울렸고, 적게 잡아도 1,3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 하마스의 소행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발발한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마스가 이 날을 공습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7일간의 장막절 기간이 끝나는 날로서, 이스라엘 각지에서 밤을 세운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속죄일”(욤 키푸르)이 엄숙한 명절인 반면, 그로부터 5일째 되는 날(일곱째 달 15일) 저녁부터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7일간 지속되는 “장막절”(숙콧)은 즐거운 축제의 명절이다. 이 기간에는 심심치 않게 거리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나 악단 등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이 흥이 올라 있는 이유는 장막절의 주된 정서가 “감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불러내셨을 때 초막에서 거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레 23:42,43), 그 여정에서의 보호하심과 약속의 땅으로의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이 명절의 목적이다. 감사의 제목은 또 있는데, 이는 이때가 여러 과일과 농산물을 거두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신 16:13). 이런 맥락에서 장막절은 수확절이라고도 불린다(출 23:16). 따라서 원칙적으로 이 기간에는 결코 슬퍼해서는 안 되고(느 8:9-18), “반드시 즐거워해야” 한다(신 16:13-15).

“숙콧” 기간에 사람들은 “아르바 미님”(네 종류의 식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각각 “에트로그”(이스라엘 유자), “룰라브”(종려나무 잎), “하다심”(도금양나무 가지 최소 세 개), “아라봇”(버드나무 가지 두 개)이라고 불리며, 각각의 식물들은 각계각층의 유대인들을 상징한다(“에트로그”를 빼고는 모두 다 장막절을 언급하는 레위기 23:40, 느헤미야 8:15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식물들이다). “미쯔바”(유대교에서 지키는 613개의 계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함께 들고 흔들어야 한다. 즉 “에트로그”는 왼손에, 나머지는 오른손에 든 채 두 손을 모으고 동서남북(또는 동서남북과 상하) 방향으로 흔든다. 여러 방향으로 여러 식물을 한데 모아 흔드는 것은 “통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도 이 명절에는 형편이 좋은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까지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신 16:14) 의식에 담긴 정신 자체는 성경적이라 할 여지가 있다. “미쯔바”를 통해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막 7:7).

엄밀히 말하자면 장막절 기간은 7일이지만(신 16:13),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제8일 하루를 더해 주셨다(민 29:35).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에 또 하루를 더하는데, 제8일과 제9일을 각각 “슈미니 아쩨렛”(집회의 여덟째 날), “심핫 토라”(율법의 기쁨)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제8일을 “엄숙한 집회”의 기간으로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를 한 해 중 가장 즐거운 기간으로 삼는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작년의 이 시기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습했다. 이때에 회당 등지에서는 유대인들이 “하카포트”라고 불리는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토라”(율법) 두루마리를 들고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면서 돌기도 하고 방방 뛰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를 운반하는 “발”인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한다(롬 3:1,2). “심핫 토라”가 끝나는 아침,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다시 “하카포트”를 한 뒤 회당에서 율법의 마지막 부분인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서 창세기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율법 회독을 완료한 것을 기념하고 토라의 연속성이 계승됨을 뜻하는 의식이다.

“숙콧”에 관해서 다양한 일들이 있지만, 그 명절의 가장 큰 특징은 “숙카”라고 불리는 초막이 곳곳에 설치된다는 데 있다. 이때에는 율법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유대인 공동체 곳곳에 있는 공터, 회당이나 집 앞, 아파트 옥상 등에 “숙카”라 불리는 초막이 설치된다. CBS New York과의 인터뷰에 응한 요세프 윌헬름(Yosef Wilhelm)이라는 랍비의 설명에 따르면, 초막은 최소 2.5면이 막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초막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아주시는데, 누군가를 팔로 안을 때면 어깨부터 팔꿈치(1면), 팔꿈치부터 손목(1면) 그리고 손바닥(0.5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숙카”의 천장은 나뭇잎과 가지를 얹어 만들되 밤하늘의 별이 보이도록 뚫려 있어야 한다. 심지어 비가 들이칠 수도 있지만 초막이 임시적 거처였음과 인간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임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숙카”로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장막절의 주된 풍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숙카”에서 아예 잠을 청하기도 한다.

“숙카”와 관련된 다소 의아한 의식도 있는데, 바로 매일 밤 그 유대인들 주변의 친구들 외에도 “조상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요셉, 다윗, 이상의 7인을 그 안으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슈피진”(“손님”이라는 뜻의 아람어)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라는 랍비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은 손님들을 초대하기 위해 거대한 건물을 갖춰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라고는 헛간(초막)을 짓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우슈피진’이 있게 될 것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이 몸소 여러분을 방문해서 여러분이 준비한 꿀 케이크를 맛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유대 신비종교인 “카발라”의 경전인 “조하르”에서 기원한 것인데, “조하르”에 따르면 장막절에 이 “손님”들은 천상의 거처로부터 유대인들과 “숙카”에 영적으로 거한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죽은 이들을 초막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가능할 리도 없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cf. 삼상 28:15). 베드로가 변형 산에서 주님과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유사한 말을 한 바가 있다 해도, 그것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막 9:6). 사실 그들을 위한 장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인간인 모세, 엘리야와 “동급”으로 모시겠다는 어리석은 말이었다. “우슈피진”에 담긴 정신 또한 대동소이하다. 주님의 임재를 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조상들의 임재까지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토라”의 전파자로 자신하면서도, 엄숙해야 할 집회에서 “토라” 두루마리를 들고 춤이나 추고, 또 실제로는 “토라”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상한 의식들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들이 “눈 뜬 장님”(막 4:12)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치신 “장막”을 거절한 까닭에 벌어진 일이다. 말씀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요 1:14), 여기서 “거하신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스케노오”(σκηνόω)는 본래 “장막을 치고 거하다”는 뜻이다. 또 성경에서는 육신을 “장막 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후 5:1).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아직 야외에서 양을 칠 수 있을 만한 계절인 가을(겨울이 아니라)에 태어나셨는데(눅 2:8), 바로 이 계절에 장막절이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구약에서 성막에 임재하시던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시려고 치신 “장막”이 바로 주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장막”을 거부했다.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열성적으로 사역하시면서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으나, 정작 그 백성은 그분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말았다. 그 대가는 디아스포라, 즉 또 다른 “장막 생활”이었다. 그로부터 약 1,9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정착”하는 듯 보이지만, 메시아를 거부한 일에 대한 근본적 회개가 없기에 대환란 기간에는 반드시 다시 쫓겨나 “장막 생활”로 되돌아갈 것이다(cf. 히 3,4장). 그 때에는 주 예수님이라는 “장막” 안으로 돌이켜 피난처를 찾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아 창고에 들이실 것이고(환란 성도들의 휴거), 재림하셔서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 안식을 주심으로써 그 길고 길었던 이스라엘의 “장막 생활”을 끝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품어 주시는 장막에 진정으로 들어오려 한다면 “참된 장막”으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제아무리 정성을 들여 만든 “숙카”에서 “이웃 사랑”과 “종교 행위”를 실천한다 해도, 주 예수께로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장막에 거하면서 40년을 떠돌았으면서도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낙오자들”처럼 될 뿐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창조주시요 구속주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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