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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비성경적인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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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10월호>
대한 예수교 침례회(박옥수파)와 기쁜소식 선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평가I. 누룩이 들어간 혼합된 구원론
“장로교회를 다니면서 매일 짓는 죄를 고백했지만 죄사함 받은 확신이 없다가 어느 날 예배당 강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 내 모든 죄를 씻었다.’는 생각과 믿음이 내 안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에 없는 평안이 임하기 시작했다. 죄를 회개하고 죄 때문에 뭘 해야 할 것이 없어졌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마음에서 내 모든 죄를 벗겨주신 것이다.”
박옥수 목사의 간증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하여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자신의 구원 교리를 펼친다. 하지만 박목사의 구원 교리는 비성경적인 주장들과 혼합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가 씻음 받아야 하는데, 마음에 죄가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내주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죄사함 받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에서처럼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마음이 온유해야 하고, 자신에게 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의에 굶주림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팔복은 죄사함을 받는 사람의 마음 자세라고 주장함으로써, 순수한 복음에 누룩(거짓 교리)을 넣었다. 박목사가 자신을 소위 ‘죄사함 목사’라고 자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모든 성경을 죄사함과 연관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시지 않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반드시 질책하신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이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를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제물이 되시어 인간의 죄 값을 치러주심으로써 그때서야 비로소 자비로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에 드디어 그 의가 인정되었다. 죄가 처벌되었고 빚이 청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순결한 아들의 희생을 근거로 회개하는 죄인을 향해 기꺼이 화해하시고 용서해 주신다. 혼을 구원하는 데는 죄값을 치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면 된다. 이때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자비를 맛볼 수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순간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을 때 즉시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요 1:12).
그러나 박옥수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늘 더럽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면 깨끗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형편을 바라보면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었기에 그 속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하는 ‘의’의 믿음 위에 섰다는 것이다. 매일 죄를 짓고도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형편은 허상이고 내 죄가 깨끗하게 씻어져서 내가 깨끗한 것이 믿음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죄가 남아 있다면 그 죄는 주의 십자가 보혈이 모든 죄를 씻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목사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이란 마음이 죄로 인한 가책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참된 구원이 임하면 죄와 싸우던 전쟁은 끝나 버린다는 것이며, 육신의 정욕이나 음란한 생각들과 싸우던 전쟁은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참으로 죄에서 해방을 받게 되며 하나님께서 참된 쉼을 주시기 때문에 날듯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박목사가 깨달은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인드 콘트롤을 하는 어떤 노총각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는 실업자며 장가도 못간 사람이었는데 늘 자신은 돈 많고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늘 마음 속에 심으면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옥수 목사의 주장은 매일 죄를 짓고 추하고 더러운 상태의 인간에게 ‘나는 깨끗해, 나는 거룩해, 나는 온전케 됐네’ 하고 마음의 생각을 바꾸고 방향을 바꾸고 믿음을 가지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인데, 이것이 자신이 깨끗하다고 하는 ‘의’의 믿음 위에 선 것이고, 이것이 믿음의 실상이며, 매일 죄를 짓고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형편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마셨다는 물의 일화가 있다. 그는 모든 분별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사람의 마음은 모든 분별을 넘어서 자유로운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이 부처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박옥수 목사의 가르침에도 다분히 그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의 잣대와 판단 기준은 신념이나 어떤 깨달음이나 자기 마음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요, 곧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성경은 한편에서 믿는 자에게 “거룩해졌다”고 선언하신 반면(히 10:10), 다른 한편에서는 “거룩해지라”고 권고하신다(살전 4:3,7).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이 부분을 균형있게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하는 순간 그는 분명히 거룩해졌고(히 10:10) 천상에 앉혀졌고(엡 2:6)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를 받아 죄들의 몸과 분리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신분이 그렇게 된 것이지 우리의 상태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된 성도들은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품행을 나타내야 한다. 그것은 유업이나 보상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신분이 거룩해진 성도들에게 성품적으로도 거룩해지라고 명령하신다. 이때의 거룩은 두렵고 떨리는 순종이 요구되며 말씀과 기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딤전 4:5, 빌 2:12,13).
우리의 신분은 의인인 반면, 우리의 실존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죄인이다. 그것은 몸의 구속을 얻기까지 계속될 갈등이다. 그러기에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를 얻었음과 동시에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죄를 자백하고 죄와 대적해야 하는 것이다(요 1:9, 롬 6장).『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전 3:17). 그러나 그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즉 구원받고 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육신의 더러운 행실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 안에 들어와 사시는 하나님의 영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그 귀중한 구원을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구원받았고(죄의 형벌로부터, 엡 2:8), 현재 구원받으며(죄의 능력으로부터, 롬 6:11-19), 미래에 구원받을 것이라고(죄의 임재로부터, 롬 8:23) 말하는 것이다.
II. 박옥수 목사가 주장하는 안수복음이란?
박옥수 목사는 레위기 4:29에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해야 죄가 넘어가서 하나님께 열납되어 속죄가 되는 것처럼(레 16:21 참조), 죄를 예수님께 넘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침례인 요한이 전인류를 대표해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넘겨 버리도록 하셨는데 침례인 요한이 안수할 때 그때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 버리는 광경을 요단 강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마 3:13-17 참조). 이때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이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해석은 성경이 계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안수받은 적이 없고 다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뿐이다. 침례라는 말과 안수라는 말은 단어 자체의 의미도 다르다. 예수님이 침례받으셨을 때 우리의 죄들이 전가되었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주님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죄가 되시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방인들도 죄사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전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죄가 되셔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나의 모든 불의와 죄를 예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이다(롬 4:5,6). 의란 첫째로 율법을 이루시는 것이며(예수님은 그것을 성취하셨다), 둘째로 믿음에 의한 것으로(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의롭게 여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옥수 목사의 주장은, 침례인 요한의 안수 때[단지 침례를 주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표현한다.] 죄가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바로 다음날 요한복음 1:29에서 침례인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침례받으신 후 즉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고 말씀하신다. 침례인 요한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다음이었다.
침례인 요한이 침례 베풀 때 죄가 넘어가서 내 죄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죄를 지어도 내가 의롭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고 양심을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하고 말씀의 물로 씻어 주님과의 올바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박목사의 간증과 구원 교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도 자백할 죄가 없게 된다. 침례인 요한이 안수할 때 그 죄도 넘어가서 이미 거룩하고 깨끗하고 온전케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죄를 인정하고 마음으로 자백하여 용서를 구하면
영원한 구속에 대하여 모른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정죄하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죄를 지은 후에 자백했다. 이에 대해 박옥수 목사는, 다윗이 자백한 것은 근본적인 악인 자신을 고백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51:14에서 구체적인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자백하고 있다.『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 51:4)는 말씀이 범죄한 다윗을 의롭다 하시고 순전하다 하신 것인가?(롬 3:4) 복음을 오용한다면 그리스도 안의 건전한 교리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자신의 구원 교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가 아끼는 물건을 깨뜨려 놓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아버지의 일들을 엉망으로 망쳐놓고 그럴 수밖에 없고 잘못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아버지의 심경이 어떠할지 생각해 보라! 주님과 교제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으면 자신을 정결케 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라. 비참해지고 싶은가? 그러면 더럽혀진 채로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내버려두라. 육신이 죄를 지어도 죄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이나 가르침이 아니다.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내 속,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신다(롬 6:11).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죄가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한다(롬 8:13). 그래서 죄를 짓지 않게 성령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계속 구원만을 말한다. 구원이란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는다. 구원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 그 후에는 성장하고 전진해 나가야 한다. 바른 성경을 근거로 한 바른 교리와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되고 성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구속에다 맞추고 자신의 경험에다 비추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그러지는 것이다. 바른 교리가 정립되지 못하면 성도들의 신앙이 이상하게 달라진다. 죄를 지었으면 자백하라. 자신의 깨달음이나 경험을 강조하지 말고, 성경적 가르침을 받고 수용하여 양떼들을 올바로 이끌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