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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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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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4월호>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5,6).
이사야 53장은 피의 속죄에 관한 구약의 위대한 장들 중의 하나이다. 죄에 대한 피의 속죄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균형 잡힌 분이시다. 심판과 진노와 복수와 질투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과 은혜와 친절의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둘 다 있는 모습은, 마치 건전지가 양극이 모두 있어야 전류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사야의 이 내용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와 같기 때문이다(롬 5:8, 요 3:16, 요일 4:9,10). 이사야 53장과 같은 본문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필자는 주님께서 왜 오셨고 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정직한 죄인이라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실 만한 그런 요소가 전혀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도대체 죄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구석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이유가 있는가? 성경은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다고 말씀한다(사 64:6). 그렇다면 왜 주 하나님께서 냄새나는 죄인들과 함께하길 원하시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자랑하고 싶다. 그런데 성경은 죄인들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렘 17:9)라고 말씀한다. 또한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롬 8:7)가 되고 『아무 육체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고전 1:29)고 말씀한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들이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 대해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랑하실 만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죄인들의 어디가 좋아서 뭘 주셔야 한단 말인가? 반대로 죄인들이 하나님께 그분께서 꼭 필요로 하시는 뭔가를 마련해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십일조를 할 수 있게 우리의 계좌에 돈을 넣어 주신 분은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다(신 8:17,18). 주님께 우리의 생명을 바친다 해도(롬 12:1) 그 생명을 애초에 누가 주셨는지 생각해 보라!
우선 이사야 53:3에서 필자를 놀라게 한 진리는 우리가 주님을 멸시했는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음행을 통하여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했다(요 8:41).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모독하며 주님께서 음행을 통해 났다고 멸시한 것이다. 심지어 "저 마귀 들린 자의 말을 들어서 뭐해? 저자는 제대로 미친 미치광이라고!"라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기까지 했다(요 10:20).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즉 아무도 주님을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존재로 대했다. 개나 고양이보다도 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소위 할리우드 "스타들"이 가끔씩 TV에 나와서 불쌍한 바다표범이나 닭, 개, 부엉이, 고양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서... 거부되었으며』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요 1:10,11)고 말씀한다. 어떤 정치 집단도 주님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빌라도는 육신을 입으신, 진리 그 자체이신 분(요 14:6)을 직접 뵙고도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요 18:38). 그러나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 버렸다. 종교 집단도 주님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관원들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를 믿은 적이 있느냐?』고 했다(요 7:48).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요 12:42,43). 심지어 주님의 가족도 거절했다(요 7:5).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했고, 유다 이스카리옷은 배반했으며,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 주님께서는 친구로 여겼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다(요 11:35). 또한 예루살렘이 주님을 거절할 것을 아시고 우셨다(눅 19:41).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시기 위해 갈보리로 가시기 전,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 되셨다."(막 14:34). 인생에서 슬픔과 질고를 겪어야 할 때가 와도 우리는 앞서 가신 주님께서 그것들을 이기도록 도우실 것을 믿는다. 히브리서 4:15과 2:18을 찾아보라.
이사야 53: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으셨고, 하나님께서 벌주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의 고난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경우든(욥 42:7), 우리 주님의 경우든 모두 사실이 아니다(눅 9:31,35).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제들을 이해하시는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질고에 익숙"해지셔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으나, 주님 또한 아담 이후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고통을 받으셔야 했다. 왜 주님은 그렇게 고통을 받으셔야 했는가? 이사야 53:5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단순히 순교자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또한 로마 제국이나 유대인 정부를 대항한 반역자로 죽으신 것도 아니며, 그분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도 아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와 우리의 죄들"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데려다가 옷을 벗겼고 주님의 손을 등 뒤로 묶었으며 자주색 겉옷을 입혔다. 그들은 주님의 눈을 가리고 손으로 때리며 모독했다. "유대인들의 왕이여, 예언하라! 누가 당신을 쳤는가?" 그들은 눈가리개와 겉옷을 다시 벗겼고 주님을 데리고 가서 기둥에다 머리 위로 주님의 손을 묶었다. 그리고 병사들 중의 한 명이 쇳조각이 달린 무시무시한 채찍을 들고 주님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벧전 2:24). 오순절교회들과 성결교단 사람들은 피의 속죄가 몸의 치유를 포함한다는 거짓 신학에 세뇌된 나머지 베드로가 이사야 53:5을 영적으로 적용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교회 시대에 "치유"는 우리의 죄들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벧전 2:24).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4,6). 주님께서는 그 "질고"가 과연 어떤 것인 줄 아셨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통과하시고 피를 흘려주셨다. 과거 오스트리아에서는 남자가 에델바이스를 꺾어 아가씨에게 주면서 사랑을 증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험준한 산에 오르다가 죽은 청년들도 많았다고 하니, 진짜 사랑이 있어야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그분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려놓으셨다(롬 5:6,8,10). 이 놀라운 사랑을 붙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의 의미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세상의 "러브스토리들"은 사실 일종의 거래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순수하게 주시기만 하시는 일방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주님은 그 대가로 아무것도 받으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위해 상하셨는가? 왜 우리를 위해서 주먹으로 얼굴을 맞으셨는가? 수염이 뽑히는 수치와 고통을 참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왜 가시관을 쓰셨으며 그 귀중한 피를 흘리셨는가? 과연 우리를 위해 그런 일을 감내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는 우리가 해변의 모래알처럼 하찮은 자들이다. 다윗은 광활한 우주의 규모에 비해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고 시로 기록했다(시 8:3,4). 은하계들과 성단들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해변에 깔린 자갈처럼 미미한 죄인 한 명을 본향으로 데려가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왜 그런 고초를 다 받으셨단 말인가? 우리보다는 어떤 행성이나 성운 또는 거성에 더 관심과 시간을 쓰셔야 하지 않겠는가?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꼭 구원받아야만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로마서 9:17에서 파라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그렇다면 왜 구덩이와 진흙 수렁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했단 말인가?(시 40:2) 하나님께서는 전혀 우리를 상대하실 필요가 없었다.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다.
1936년에 영국 왕 에드워드 8세가 월리스 심슨이라는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왕좌를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은 세기의 로맨스라며 떠들어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사랑은 칭송하지 않는가?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전 우주를 호령하는 보좌에서 내려오신 것이다! 혹자가 나에게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위해서도 죽으셨나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자를 위해 죽으실 수가 있죠?" 이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실 수가 있었죠? 어떻게 저 같은 죄인을 위해서도 죽으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조롱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욕이나 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 아는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이는 사랑이 허다한 죄들을 덮기 때문이니라』(벧전 4: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씻은 것이다.
2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시어 죄인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그들의 죄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셨다. 그런데도 죄인들은 말도 안 되는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고 있다. 당신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그 사랑을 누리기 원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근거로 그분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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