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원히 보존하신 말씀 분류

“과학”에 면죄부를 준 한글판 성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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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1월호>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지고 섭리로 보존된 성경들은 “과학”이란 단어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곧 흠 없고 잘생겼으며 모든 지혜에 능숙하고 지식에 뛰어나며 과학[science]을 이해하며 그들 안에 왕궁에서 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러한 소년들로서, 그들에게 칼데아인들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기 위함이더라』(단 1:4).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science]의 반론을 피하라』(딤전 6:20). 그러나 “사탄”에 의해 변개된 한글판 성서들은, 이상 두 개의 구절에만 기록된 『과학』이란 단어를, “다니엘 1:4”에서는 「학문」(개역개정판, 개역한글판), 「통찰력」(표준새번역), 「총명」(쉬운성경)으로 대체했고, “디모데전서 6:20”에서는 모두 「지식」으로 바꿔 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과학”은 악한 현 세상에서 현대인들이 추앙하고 떠받드는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 판단 기준, 곧 “최종권위”(Final Authority)가 될 만큼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는 말하기를, “인간은 시간의 표면을 가로질러 여행하고 있다. 거기가 어디인지 우리는 모른다. ‘과학’은 우리의 ‘구세주’다.”라고 말했다. 어리석은 그는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과학자”로 자처하면서도, “거기가 어디인지 모른다.”라고 했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거기가 어디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또한 “그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루터 버뱅크”는 몰랐다! 구원받지 않은 자신이 어디에 가게 될는지 전혀 몰랐다! 지금 그는 “거기가 어디인지 그토록 궁금해 했던” 바로 “그곳”에 가 있는데, 그가 구세주로 믿었던 과학이 그를 “지옥”으로 인도한 것이다. 이제 그는 “영원”이라는 시간의 표면을 가로질러 여행할 것인데,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불과 유황이 타는 불못”으로 던져져 영원히 울부짖어야 하는 고통의 나날을 영원무궁토록 보내게 될 것이다.

사실 “과학”은 “철학”과 더불어 이교도들이 섬기는 “두 개의 신”이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으로 여기고 있는 “진화론”은 그 기원과 출처가 “철학”으로서, 맹목적인 믿음이 만들어 낸 “광신자들의 종교”이자, “미신”이다. “마르스 언덕”에 서서, 그리스의 아테네인들을 향해 설교한 “바울”은 철학자들을 위시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내가 보니 너희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이니라.』(행 17:22)라고 경고했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과 철학은 사람들을 농락하는 두 개의 커다란 ‘어릿광대들’이며,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이 두 ‘코미디언,’ 곧 속임수에 능한 이 두 ‘사기꾼’을 공경한다. 과학과 철학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요정 이야기’ 같은 것이다. 과학은 ‘신성한 황소’가 되어 버렸다. 과학은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것’으로, 일종의 신화요 공상이다!”

과학은 절대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과학은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할 수 없는데,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시 119:89). 아무리 어떤 것이 과학적이라 해도 성경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과학도, 절대적인 진리도 될 수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학의 도움 없이도 우리의 혼을 구원하신다. 과학의 도움 없이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과학이나 과학자들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다. 과학적인 발견이나 과학의 업적과 상관없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신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휴거가 일어날 때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에게 영원히 죽지도, 썩지도 않는 “초자연적인 몸”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인류 역사 6천 년이 걸려도 해결하지 못한 일이고, 또 그 이상의 시간이 앞으로 더 주어진다 해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다. 과학은 인류가 직면하는 주요 문제들, 곧 태풍, 기근, 홍수, 가난, 전쟁, 죄, 죽음, 종교적 갈등, 경제적 재앙 등 단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래서 멸망해 가는 현 세상에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고,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과학으로 성경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성경으로 과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과학,” 곧 “science”란 단어는 “헬라어”로 “그노시스”(γνῶσις)이며, “아는 자” 또는 “지식”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노시스”에서 “영지주의”란 말이 나왔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만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지식적이고 지혜로운 특별한 그룹”인 양 행세했다. 오늘날 “과학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과학자” 하면, 일반인들은 모르는 “대단한 과학적 진실”을 알고 있는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성경적 진리”에는 완전히 무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학자의 말이라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시험해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믿어 버린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화석이나 뼛조각 몇 개를 발견한 뒤, “음, 이 화석은 1억 9천만 년 전 ‘중생대’의 것이고, 이 뼈들은 3천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의 뼈들이야.”라고 거짓말해도 쉽게 속아 버린다. 반면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창 1:1)라는 말씀에 관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 그것을 네가 본 적 있냐?”라고 따지며, “이 성경 말씀은 전혀 증명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이야기”라고 비난하면서도, “우주는 어느 날 우연히 ‘빅뱅,’ 곧 ‘대폭발’에 의해 생겨났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우주의 나이는 46억 년이야.”라는 주장은 “과학자들의 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믿어 버린다. 몇 년 전부터는 우주의 나이가 137억 7천만 년이고, 오차는 “± 4천만 년”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제는 이 수치를 믿으라고 강요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 그것을 네가 본 적 있냐?”

물론 우리는 과학의 효용과 실용적인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의 본질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본질은 그 효용과 가치를 떠나 그 자체가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도덕적인 선행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해도 세상 자체가 『악한 현 세상』(갈 1:4)이라는 성경적 진단을 피할 수 없듯이, 과학 안에 사실과 진실이 부분적으로 들어 있다 해도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딤전 6:20)이라는 “하나님의 진단”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어떤 과학적 발견이 인류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때는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거나 상충되지 않았을 때다. 반면에 어떤 과학적 발견이나 발전이 성경의 권위를 대적하고 성경과 반대되는 것들이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류에게 고난과 혼란, 좌절, 고통 등만 초래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과학을 맹신하는 자들은 그런 성경적인 비평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그래서 과학자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변개된 성서들”을 통해 “과학”을 없애 버리고 “지식”으로 대체해 버렸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개역개정판).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개역한글판). 이들 “한글판 성서들”은 “지식”은 문제가 되지만, “과학”은 괜찮은 것이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가증하고 위선적인 번역본인 “흠정역”은 “과학”이란 단어는 그대로 놔두면서도 “과학”이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한 혹평과 비난을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교묘한 방법을 찾아냈으니,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라고 변개시킴으로 과학에 “면죄부”를 제공한 것이다.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라는 올바른 본문과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라는 변개된 본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글킹제임스성경>은 “과학 그 자체”를 가리켜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지만, 변개된 “흠정역”은 “본래 과학 자체는 괜찮은데, 과학이 아니면서도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들만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본질을 흐리고 있다. “진화론”처럼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만 문제가 될 뿐, “과학” 자체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오역해 버린 것이다. 영어 <킹제임스성경> 본문을 보더라도(『O Timothy, keep that which is committed to thy trust, avoiding profane and vain babblings, and oppositions of science falsely so called:』), 그렇게 번역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수” 목사는 명색이 대학교수이니까 과학계로부터 받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아주 교묘하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이든, “진실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이든, “과학 자체”가 기본적으로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의 기본적인 속성과 목표가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실용적으로 가치가 있는 과학이라 해도, 그것은 어떤 개인, 어떤 단체, 어떤 국가,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온 우주의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과 실행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종교, 철학, 과학, 음악, 미술 등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되는 한 권의 “책”을 쓰셨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이 “책”의 판단과 의견을 거스르는 어떤 주장이나 이론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 성경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아 판단하는 사람은 어떤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하신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전 1:20) 그 누구라도 나와 볼 테면 나와 보라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를 자랑했던 모든 자들의 종착지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 이것을 공언하는 어떤 사람이 믿음에 관해서는 정도를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6:20,21). 한글로 올바르게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고, 하나님과 성경을 드높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맡겨진 진리를 온전히 지킬 수 있고, 성경적인 믿음에 있어서 정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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