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출애굽기 주석 분류

나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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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4년 02월호>

■ 출애굽기 29:31-37
처음에 만든 옷들이 다 닳아 없어진 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해 만든 “새로운 옷들”에 대해서는 그 배열에 관한 언급이 없다(29절). 이 새롭게 만들어진 옷들은 B.C. 1400-B.C. 600년 기간에 필요했을 것인데도 말이다(삼상 2:18,19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대제사장에게 주신 옷들을 잘 보존하셔서 그 다음 제사장들에게 계속 물려주셨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옷 한 벌을 가지고(신발 한 켤레를 가지고) 40년간 바위 위를 걷고, 자갈 밭을 걷고 돌들 위를 걸어도 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신 29:5).

『그를 대신하여 제사장이 되는 아들이』(30절). 이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눅 10:16). 바울은 “할례의 일꾼”에 대한 공식적인 계승자로서 이방인들을 위해 중보하였다(롬 15:16).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행전 13:39, 요한복음 20:23에서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바알 숭배자들이나 뒤집어쓰는 후드나 “그리스도의 대리자” 같은 말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성결하게 되는 시간은(35절) 제단이 온전히 성결하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다(37절). 속죄(ATONEMENT)는 여기에서나 실재에서나(히 10:8- 12) 영원에서 영원까지 뻗쳐 있다. “일곱 체계”를 살펴보면 창세기 1:1에서 시작되는 일곱 천 년들은 요한계시록 20:1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계 13:8) 분은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까지 해당되는 전체 구간의 속죄를 가능케 하는 속죄를 드렸다.
“속죄”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33절에 처음 나온다. 히브리어 “카파르”(kaphar)는 “어떤 덮는 것을 만들다”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출애굽기를 살펴본 결과 이 말은 창세기 3:21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자신의 “자녀들을” 덮어주셔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추방당하지 않도록 한 그곳 말이다. 그렇다고 33절에서 “속죄”라는 말 대신에 “덮는 것”이라고 쓸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죄들이 덮여졌을 때 그는 하나님과 함께 누군가에게 고정되어질 수 있다(he can be “AT ONE”).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호흡을 불어넣으신 책을 가지고 있다면 “ATONEment”라는 말보다 더 나은 말을 찾을 수 없다. 덮어주는 것이 없다면 “화해”(reconcilation)는 없다. “Atonement”(속죄)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covering”(덮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만일 출애굽기 29:33에서 “covering”(덮는 것)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면 전체적으로 틀린 말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덮는 것을 만들었다”(Aaron and his sons made the covering)로 읽혀지게 된다!
출애굽기 29:32-38의 내용은 레위기 8장에서 자세하게 성취된다.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성결을 위한 칠 일 동안 성막 안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레 8:33). 팔 일째 되는 날 그들이 나오게 되면(레 9장) “주의 영광”이(6절) 전체 회중에게(24절) 나타난다. 이 때에 속죄제, 번제, 음식제, 화목제가 한 번에 모두 드려진다(레 9:3,4). 남겨진 나머지 부분은 불로 태운다(출 29:34). 이것은 분명하게 요한계시록 20:11의 여덟 번째 날을 보여 준다. 하늘들과 땅이 불에 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에 의해 녹아버리는 날 말이다. 성경 어디를 살펴보아도 상징을 나타내는 부분에서 시간적인 제한을 다룬다면 일곱 체계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일곱 마리의 소가 드려진 후에 제단은 어떤 제물을 받기에도 합당한 곳으로 성결하게 된다. 마태복음 23:19을 보라. 요압이 제단을 만졌을 때(왕상 2:28-32) 그는 “거룩하게” 되었다. 이 “거룩하다”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따로 세우다”로 바꿀 수 있다. 요압은 수송아지가 “뿔들”에 묶여 죽듯이 죽었다(27:2).

■ 출애굽기 29:38-46
본문의 마지막 네 구절을 보면 요한계시록 20,21장이 생각날 것이다. 우리는 천년왕국의 안식에(겔 40-48장) 있게 될 마지막 날에 대한(여덟 번째 날)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 영원에서도 “아론의 아들들”(44절)이 여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사 66:16-24).
제단이 깨끗하게 되고 나서야 어린 양이 나타난다(38절).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성결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게 되는 죽음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길에서 죽는, 즉 하나님의 죽음이어야만 한다. 불은 하늘에서 떨어진다(레 9:24).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계 13:13에서 비슷하게 모방하는 것을 보라).
날이 시작될 때 어린 양이 드려지고 날이 끝날 때 어린 양이 드려진다(39절). “계속 드릴 번제”인 것이다(42절). 이것이 열왕기상 18:29, 느헤미야 9:4에서 말하는 저녁 희생제이다. 다윗은 이때 기도했다(시 14:2). 다윗의 기도 생활은(시 55:17) 다니엘의 기도 생활과 같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단 6:10)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대하 31:3)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우리는 어린 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야 하고 어린 양과 함께 하루를 마쳐야 한다(요 21:3). 다만 우리와 구약 성도의 다른 점은, 구약 성도들은 매일마다 “제물”을 드렸지만(히 10:11) 우리는 “한 번에 영원히” 드렸다는 것이다(히 10:12)!

『또 술붓는 제사에 따라』(41절). 술붓는 제사라는 말이 율법 아래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카톨릭 교회는 이 부분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자신들이 일요일날 드리는 “제사”(offering)에서 “술붓는”(drink) 대상으로 실제적인 피를 적용시켜 마시고 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홍수 이전인 창세기 9장에서, 율법 시대인 레위기 17장에서, 은혜 시대인 사도행전 15장에서(세 경륜 모두에서) 피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술붓는 제사라는 말은 창세기 35:14에 정의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술붓는 제사가 기름으로 부어진 돌 기둥과 연관이 있다. 무엇이 부어졌다는 것은(삼하 23:16) 땅에 쏟아진 생명의 피와 연관이 있다(사 53:12, 시 22:14). 이를 말해 주는 마태복음 26:28이 로마카톨릭에게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 부분을 예표로만 받아들이고 요한복음 6:53을 병행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또 술붓는 제사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더할 것이며』(40절). 일 “힌”은 일 갤런 반 정도(약 5.6리터) 된다. 그러니까 “사분의 일” 힌은 1.4리터 정도 된다. 제사장들이 화목제물 같은 것을 나누어 가진 것으로 보아(24-28절) 이 “포도주”의 힌도 같은 방법으로 취급했을 것이다. “율법의 저주”(갈 3:13) 아래 들어가겠노라고 순종했는지라 태고적부터 로마 집단은 자신들의 “제사장”이 “술붓는 제사”에서 사용된 발효된 술을 마시는 것을 허용해 왔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로마카톨릭의 제사장 직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한 번의 영원한 희생제사가(히 10:8-12) 죄인을 구원하고 죄인의 죄를 구속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가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의로운 로마의 카톨릭 교도들은 43절을 멕시코, 이탈리아, 스페인, 남미의 이방인 민중들에게 적용시킴으로 스스로 구약에서 말하는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고야 만다. 43절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에서 어느 곳에서도 어느 누구도 만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이다. 거룩한 희생제물이 거룩한 제단에 드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33-43절). 카톨릭 교도들은 “거룩한 희생제물”을 발효된 술로 바꾸어 버렸다. “거룩한 제단”은 성직자와 성가대 사이에 있는 성단소(chancel)의 가운데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거짓 “제사장”은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한다고 말한다. 로마카톨릭의 본질은 유대교를 표절한 것이다. 진짜 죄에 대한 희생제물은 간과해 버리고 가짜 희생제물이 진짜라고 말한다.
42-46절에서 말하는 영적 적용은 분명하다. 물론 카톨릭에서 만들어내어, 가르치고, 계속 행해지는 성사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그분 안에서(히 3:1) 계속 유지되고 있고 영원하다(42절).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죽고 심지여 24시간 내에 갑자기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의 효력은 계속되고 영원하다(42절). 그분은 문이시고[『주 앞 회중의 성막 문에서』(42절)] 희생제물이시기 때문이다(히 10:8-12).
3.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엡 1:4) 죄인을 만나시고 독생자를 통해서(마 3:17) 말씀하실 것이다(42절).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통해(히 1:1,2; 2:3,4) 말씀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실 경우에는 유대인만을 선택하셨다(롬 3:2).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볼 때 로마 제단에 있는 로마 제사장이 죄인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고(42절) 하나님과 말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원이 꺼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4. 43절의 『성막이 내 영광으로 거룩하게 되리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고전 6:20) 성령의 전(고전 3:16)과 연결된다.
5. 이 “성막”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고후 5:1-4, 고전 6:19). “회중의 성막”도 마찬가지이다(44절). 우리가 지금 섬기고 있는(히 13:10) 제단(44절)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제단”은 예루살렘이나 로마에는 없다. 그것은 진영 밖에 있다(히 13:13). 그리고 그것은 실제의 희생제물들이 아니라(벧전 2:3-8) 영적인 제물들이라고 말한다(히 13:10). 이런 이유로 바티칸 사본에는 히브리서 9:14 이후가 모두 없는 것이다.
6.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피와 접촉해야만 한다(44절). 성막과 제단 위에 피가 뿌려졌듯이 말이다(29:21).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피로 바꾸는 이상한 성사를 위해 포도주가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마태복음 26:28을 요한복음 6:55에 얹어 놓는 정신 나간 로마 사람들이나 사도행전 2:38을 로마서 6:1-3에 밀쳐버리는 “시원찮은 논리”를 펴는 알렉산더 캠벨이나 비슷한 사람들이다. 피는 포도주가 아니다. 포도주는 피가 아니다.Bible Believers / 51

7. 『그들은... 알리라』(46절). 정통 기독교 신앙과 희미한 카톨릭 종교와의 극명한 차이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카톨릭의 신앙 고백은 “구원받기를 바란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원받았다고 추측한다.”이다. 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야고보, 바울, 유다는 “구원받았음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요일 3장). 요한복음 6:54-56의 본문이 로마에서 말하는 소위 “성사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어떤 로마카톨릭 교도들도 영원한 생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고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요한복음 6:54-56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이며』(46절). 옷들에 대하여, 제사들에 대하여, 제사장 직분의 수행 방법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시고 나서 성령께서 그 다음에 말씀하시는 대상이 “향 제단”이다. 바로 30장에 나오는데 이 위치는 정확한 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사 59:1-3, 요 9:31)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통해(히 3:1), 또 피의 속죄를 통해(골 1:14) 죄인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면 참된 “기도 생활”은 없다(행 9:11). 이교도들은 기도를 말하고 “헛된 반복”을(마 6:7) 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계 8:3) 향이 올라갈 때 어느 때나 진행된다.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롬 8장).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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