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주석 분류
내가 명령한 대로 말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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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8월호>
출애굽기 5:1-9이제 속도가 붙는다. 아론과 모세는 곧장 파라오에게 달려갔다.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는 타니스(소안)에 있는 궁전에서 일어났다. 모세는 40년 전에 떠났던 궁전 뜰에 들어서자마자 용기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주님의 지팡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출애굽기 4:23의 원래 본문을 “개정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고어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에... [New Scofield Reference Bible은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하기를 거부했는데 모세의 영향을 받은 것같다.]
처음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말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고통을 더 안겨주었다(출 5:4-19). 모든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놓쳐버렸다. 크리소스톰에서 윌리엄즈까지 모세의 첫 번째 메시지와 발라암의 첫 번째 메시지(민 22:12,13)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Scofield Reference Bible(Old, New 모두)은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조차하지 못한다. 발라암은 “가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의 허락하신 뜻” 안에 있지 않았다. 발라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메시지의 삼분의 이를 일부러 삭제했고 다음 번에는 모두 전달하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모세의 문제를 우리는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이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때(삼상 3:11-14)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마가복음 3:16이나 잠언 11:30을 설교할 수 있다. 그러나 백악관으로 걸어들어가 수석 비서관을 향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이 정직하게 행하지 않으면 곧장 지옥으로 미끌어져 소세지처럼 구워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구령하는 사람들을 20세기의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광신자라고 부른다.) 이런 자들은 성경 본문을 뜯어고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개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많은 성경적 메시지들이 어떤 누구를 “구령할”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8:40-44을 설교하셨을 때 누군가가 회심하기를 바라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23:4-23을 설교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나니 ‘내 백성을 가게 하여 그들로 광야에서 내게 명절을 지키게 하라.’ 하시나이다.” 하니』(1절).
명령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에 두었는가? 출애굽기 4:22의 “첫태생”은 어디에 두었고 『내가 네 아들, 네 첫태생을 죽이리라.』(출 4:23)는 어디에 두었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희석시켜 데오도르 엡이 설교하듯이 달콤하고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모세는 말한다. “내 백성을 가게 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파라오가 웃는다. “허, 이봐! 뭐라고?”
모세가 말한다. “당신은 내 백성을 보내줘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파라오가 받아친다. “그렇지 않으면 뭐?!”
모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말한다. “에, 그러니까, 음... 만일 보내지 않으면, 당신은 끔찍한 것을 보게 될 것이오!”
파라오가 웃으면서 말한다. “내 다리를 부러뜨려 땅딸보를 만들어 봐라!”
모세는 아론에게 향하여 쉰 목소리로 속삭인다. “말해야 할까?”
아론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첫태생에 관해 파라오에게 말하라고 하신 말씀을 알고 있잖아. 말해!”
모세가 답변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어! 아침부터 초상치를 일 있어? 그렇잖아도 요전날 아들 하나가 죽을 뻔했는데.”
아론이 투덜거린다. “넌 지난 스물네 시간 동안 계속 그 얘기만 중얼거렸어. 이제 상황을 똑바로 봐야 해. 너는 네 백성으로부터 도망쳤어. 너는 네 자신이 아직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돼. 자, 가서 말해!”
모세가 말한다. “에, 음...휴! 조금 있다가 파라오 기분이 풀어진 다음에 말하는 게 낫겠어. 단 한번에 끝장낼 필요는 없다고 봐. 지금은 그냥 떠나는 게 좋겠어. 파라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나서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서 겨우 말한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가게 하지 않으면, 무, 무, 무거운, 그래 아주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할거요.”
파라오는 빈정대며 싱글싱글 웃는다. “그으래?” 그리고 나서 발악을 한다. “이봐, 잘 들어. 나는 내 문제가 있고 ‘주 하나님’은 자신의 문제가 있는 거야. 지금은 그것을 얘기할 때가 아니야. 종교 얘기를 하려거든 따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자구.” “나는 주를 알지 못해!”(출 5:2)
파라오는 개구리 모습의 신 오시리스도 알았고 신성한 황소 신 아피스도 알았다. 매 모습의 신 라도 알았고 “하늘의 여왕” 신 이시스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루즈벨트 여사나 테드 케네디, 안젤라 데이비스, 피델 카스트로 만큼도 몰랐다. “나는 주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현재 미국 지식인들의 신중한 고백이다.
『간구하오니 광야로 삼 일 여정으로 가게 하시어 주 우리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리게 하소서. 그래야 주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지 않으시리이다』(3절).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 민족을 쓸어버리실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이 있으시다. 이 때 이 민족은 이집트의 많은 신들을 섬겼음이 분명하다(수 24:14, 출 20:6-9, 레 17:7). 더군다나 옛부터 내려오던 희생제사(창 3:21; 4:4; 8:20; 22:10-14)는 계속 보류되었고 전체 세대는 반드시 드려져야 하는 희생제사에 대한(출 12:1-3) 아무런 지식 없이 자라왔다. 더욱 분명한 사실은 모세조차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출 2-5장)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도 어떤 희생제사도 자원하여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 같았으면 1분도 안 걸리고 피 흘리는 양을 준비시켰을 것이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자마자 기드온과 마노아는 즉시로 제물의 필요성을 알았다(판 6,13장).
출애굽기 8:26은 창세기 43:32과 46:34을 설명한다. 엘리콧, 헨리, 랑게, 클라크, 강단 주석이 범한 잘못을 이 구절들이 바로 잡는다. 성령님의 생각과 반대됨에도 역사적인 자료라는 근거 하에 이들은 투정하기를 이집트인들은 신성한 소를 잡는 유대인들을 꺼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조심스럽게 근본주의, 자유주의, 카톨릭, 보수주의 학자들과는 관계없이 진리를 보존하셨다.
1. 목자들은 이집트인들에게 가증함이 된다(창 46:34).
2.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가증함이 된다(창 43:32).
3. 히브리인들은 목자들이고 양을 희생제사로 드린다(창 4:2).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것은 양의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에게는 양으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들의 신들을 모독하는 가증스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그들의 노역에서 그들을 쉬게 하는도다.” 하고』(4,5절).
노예생활로 고생하고 있을 때 나타난 모세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쉬게 해 주기 위해 오신 위대한 노예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신”(고후 4:1-4)은 복음 전하는 자를 종교라는 아편으로 대중을 중독시켜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의 수단으로 본다. 레닌과 맑스는 모두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과 로마 카톨릭의 “성사들”을 혼동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진심에서 우러난 제안을 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라.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와... 내가 너희를... 구속하리라... 나는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너희에게... 주리니』(출 6:6-8).
그러나 파라오가 듣기에는 임금을 더 올려달라고 파업하는 노동운동 같았다. “게을러 터진 공산주의자들 같으니라구. 일은 굼벵이처럼 느릿느릿하면서 뭐? 돈을 더 올려달라구? 시간당 20센트씩이나 받고 있고 그것도 고작 일주일에 70시간밖에 일을 안 하면서? 게다가 휴가에 사회보험까지 요구해?”
『“너희는 더 이상 벽돌 만드는 짚을 이전처럼 백성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벽돌의 총수를 그들에게 정해 주고 거기에서 감하지 말지니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헛된 말들을 생각하지 않게 하라.” 하니라』(7-9절).
이 구절에 관련된 내용을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카일(Kyle)이 피돔을 발굴했을 때 건물들의 밑의 층들은 짚을 잘게 썰어 벽돌을 만든 층들이었고 그 건물들의 중간 층은 뿌리째 뽑힌 짚으로 만든 벽돌이었다. 그리고 그 위의 층은 진흙만으로 만든 벽돌 층이었다.
출애굽기 5:10-14
『파라오가 이같이 말씀하셨으니...』(10절).
이 표현을 1절과 비교해 보라. 파라오는 아론과 모세가 말했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나니...”라는 표현을 모방하여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앉았다(아인슈타인, 쇼펜하우어, 니체, 키에르케고르, 니일, 틸리히, 브루너, 니버, 커스터, 베니거, 프로이드, 맑스, 헤겔, 팔레이, 라이엘, 로크만 재단 등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가서 짚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짚을 주우라』(11절).
짚은 삼각주 지역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 끌어모아 써버려 『짚 대신 그루터기』를 주어야만 했다(12절). 즉 죽은 풀뿌리를 뽑아야만 했다. 여기에서 “대체”가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마귀가 왕국을 건설하는 방법은 원래의 것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짚 대신 그루터기를,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한다(창 11:2- 4). [말씀보존학회 간,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보라.]
『파라오의 공사 감독자들이 백성들 위에 세운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을 때리며 요구하기를...』(14절).
파라오는 부첸발트나 트레블링카처럼 노예수용소를 조직했다. 이런 조직을 통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족이 들어가 있는 용광로를 가동시켜야만 했다. 1,2차 세계대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아들, 딸, 형제, 누이, 아내의 시체에서 금을 뽑아내야만 했고 자신들과 같이 잤던 동료의 시체를 묻어야만 했다. 친구를 때리고 채찍질해야만 했고 어떤 경우에는 친척들의 죽은 몸을 해부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완장을 두르고 동족들을 밟든가 아니면 자신이 밟혀 산 채로 묻히든지 삽으로 맞아죽든지 선택해야 했던 것이다. 완장을 두른다 해도 주어진 작업량을 마치지 못했든지, 누군가가 수용소를 도망쳤다든지, 빈둥거리는 것이 보인다든지, 기타 다른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얻어맞고 채찍질당한다. 살기 위해서는 그나마 임무를 다해야만 한다. 계속 피흘리고 채찍을 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들이라고 동료들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매일 계속되는 고문과 죽음의 공포 아래서는 떨어지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도 파라오의 명령을 수행한다. 파라오의 명령에 불평을 해 보았지만(16절) 곧 무시되고 매질은 더욱 심해져 죽이기까지 한다(21절).
출애굽기 5:15-19
『왕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나...』(16절).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은 불평 사항을 매우 정중하게 파라오에게 아뢰었다. 자신들을 파라오의 종들이라고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너희가 게으르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17,18절).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17절) 이 세상이나 이 세상 통치자들이 볼 때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2:2-6). 파라오는 산헤립, 느부캇넷살, 카이사, 님롯, 징키스칸, 교황 바오로처럼 이 세상(엡 2:1-4)의 통치자였다. 파라오는 요한복음 14:30에서 말하는 통치자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이 요한복음 14:30의 통치자는 곧 이 세상에 등장하여 UN을 통치할 것이다(계 13:3-8).
출애굽기 5:20-23
『그들이 파라오를 떠나 나올 때 길에 서 있는 모세와 아론을 만나』(20절).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킹제임스성경>의 본문을 비평하는 모든 내용들을 무시하여야만 한다. 그런 다음 출애굽기의 실제 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서도 성경본문이 말하는 실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데 이는 성경본문이 말하는 것을 현재의 실제 상황으로 보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과거에 살던가 아니면 미래에 산다. 현재는 없다.) 본문이 말하는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해석은 집어치워야 한다.
“너무나 힘든 노역으로 기진맥진해진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자를 또다시 만났을 때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실망하였고 기분도 착 가라앉았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모세와 아론은 다음날 저녁 파라오의 왕궁으로 터벅터벅 무겁게 걸어가고 있었다. 지난 밤은 왕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쉬지 않고 계속 격론을 벌였다. 왕궁으로 가는 길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오고 있다.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을 보자 성난 목소리로 외친다. “야, 너 이 xx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야?! 시내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이봐 문제만 일으키는 작자들! 꺼져버려!” 모세는 아론을 쳐다보고 위기감을 느낀다. 계속 걸어가는 이 무리를 따라가며 모세가 말한다. “지, 지금 뭐라고들 하는거야? 나는 너희들 지도자잖아! 너희들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모세! 모세만세! 라고 불러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야?” “닥쳐, 썩 꺼지기나 해!” “그렇지만...” “이봐! 당장 여기서 사라져. 죽도록 얻어터지기 전에”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또 표적까지 주셨잖아.” “아하, 표적? 알아, 알아. 교묘하게 부렸던 마술? 안다구!”
무리 가운데 끔찍하게 생긴 사내가 진흙 묻은 입술로 모세에게 말한다. “잘들어. 너희 두 놈이 나타나고서는 작업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고 봉급은 반으로 깎였어. 내가 너희들이라면 이 말이 끝나자마자 이 도시에서 사라지겠어. 우리는 여기에서 하루 이틀 살 게 아냐. 너희 두 놈이 내일까지 여기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덤 두 개가 생기는 줄 알아!”
또 다른 저주, 야유, 위협이 계속되었다. 이 가엾은 선지자(출 4:16)요 하나님의 대변자(출 4:16)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고 뛰다시피하여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세가 말한다. “형, 사람들은 변덕이 아주 심하지?” “글쎄” 아론이 말한다. “그 사람들을 비난해서는 안돼. 일주일에 90시간 일하잖아. 장난이 아냐”
또 다른 수용소 수감자들이 몰려오고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헤이, 물을 피로 바꾼 친구들! 이름값도 못하냐?” “하나님께서 파라오를 심판하신다고? 에라. 이 사이비야! 하나님은 너를 심판하시겠다.”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 하신거야. 너를 사역자로 부르지도 않았단 말이야. 원래 있던 미디안 땅으로 당장 돌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관원들”이 이 21절의 말을 마치자 모세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관원이 모세 앞에서 땅에 침을 뱉고 모세를 떠나며 말한다. “너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하는 게 낫겠다. 성경 본문이 말하는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해석방법을 다시 배워라. 성경이 문자적일 리가 없잖아!”
이상과 같이 성경 본문의 내용의 의미는 수세기에 걸쳐 왜곡되어왔다. 이 일들은 주석가들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계속 “새로운,” “더 새로운” 번역본들을 동원하여 이 짓들을 자행하였다. “새로운 구어체의 번역본들”을 통해서는 맛소라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도 못하고 또 그나마 옮긴 분량조차도 온전한 현대어로 옮기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현대 번역본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20세기에 사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코이네”[일상적인 생활 및 거리의] 언어는 “Living Bible,” “Good News Bible”과는 동떨어져 있다. 마치 1세기의 코이네 헬라어가 알렉산드리아 사본,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과 동떨어져 있듯이 말이다.
모세는 기도실로 들어가 말한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그처럼 악한 일을 탄원하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절)
모세가 부르짖었던 이 세 마디 말은 아도니람 저드슨(1688-1850년)의 마음에, 존페튼(1824-1907년)의 마음에, 메리 슬레셔(1845-1915년)의 마음에, 마틴 루터(1483-1546년)의 마음에 한 번씩은 와 닿았을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본문의 내용과 유사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어찌하여 제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어찌하여 제 재산을 빼앗아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이 지하 감옥에서 썩어야 합니까?” “어찌하여 오늘 밤에는 아무도 구원받는 사람이 없습니까?” “어찌하여 제 인생에 이런 역경이 있어야 합니까?” “어찌하여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리브카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어떻게 내가 한 날에 너희 둘을 빼앗길 수 있겠느냐?』(창 27:45)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왕이 내린 칙령이 어찌 그리 급하니이까?』(단 2:15)
욥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가?』(욥 3:23)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마 27:23)
우리는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하루종일 되뇌이게 된다. 어떤 작곡가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어찌하여 낙담해야 하는가, 왜 그림자는 다가오는가?” “어찌하여 내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알 수 없네. 나의 모든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네.” 이 “어찌하여”라는 물음 가운데 가장 처참하게 하나님께 물었던 물음은 심판의 어두운 시간에 황량한 산 위에서의 부르짖음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는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이래로 그가 이 백성에게 악을 행하였으며,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전혀 구해 주지 않으셨음이니이다』(22,23절).
모세는 자신의 유업을 포기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표현을 유의하여 살펴보라. “이 백성...주의 백성,” “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내용의 반만 수행하려 하고 있다.
모세는 기도한다.
“주님? 주님이십니까? 주님, 저는 힘이 다 빠지고 참으로 울적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한테 한 것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제게 말씀하신 것을 저는 다 말했습니다.”
“너는 말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했습니다. 주님, 이 곳으로 저는 다시 왔고 그들에게 주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모세야, 다시 물어보마. 잘 생각해 보고 말해봐라. 정말로 내가 하라는 대로 파라오에게 말하였느냐?”
“아, 저, 그건, 그러니까 모두 전하긴 했는데 그 첫태생을 죽이겠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할 상황이...”
“그러니까 그 내용을 바꿔서 말했다 이거지?”
“...” (침묵)
“자, 모세야, 보거라, 너와 내가 같이 걸어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겠지, 그렇지?”
(조금 더 긴 침묵). 이윽고 “예, 주님.”
“됐다. 이제 너와 더 걸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아주 간단한 문제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말하면 그대로 말해야 한다!”
“......” (긴 침묵).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예, 주님.”
“즉, 내가 말한 것에 더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책망하지 않고 너도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잠 30:6). 또 내가 말한 것을 빼지 말아라. 생명의 책에서 네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계 22:19). 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해서 나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나는 방패가 된다(잠 30:5). 내 말들은 흙 도가니에서 일곱 번 정화된 은같이 순수하고 그 말씀들은 영원히 보존된다(시 12:6-7). 그리고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마 24:35). 알겠느냐, 모세야?”
“예, 주님”
“그러면 됐다. 모세야 지금부터는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만 하거라. 네 할머니 이브처럼 여기저기서 더하거나 빼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사람들이 네가 로크만 재단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나에 대해 인용할 때 나를 인용하기 바란다. 즉, 나의 생각이나, 교리나, 가르침이나, ‘근본사항들’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들을 인용하란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예, 주님.”
“됐다, 그 사실이 확인되어 기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