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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엡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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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0월호>
[한글킹제임스성경]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인가를 잘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며 또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가득 차기를 구하노라
[개역 한글판 성경]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본문은 에베소서 1:17-19에 이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를 위해 두 번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위에 제시된 두 본문을 살펴보면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킨 <개역한글판성경>을 따르면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해당된다. 그러나 <개역한글판성경>처럼 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은 하나도 없으며 더 나아가 위클리프로부터 A.V.1611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어 번역본도 마찬가지이다.
이제껏 나온 모든 주석서들은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음의 것들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a. 기독교 교회
b. 성전
c. 구속사역
d. 십자가의 신비
e. 하나님의 지혜
f.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혹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이루신 것
g. 하나님의 사랑
이 모든 주석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문과는 상관없이 본문을 풍유화(allegorizing) 하거나 영적으로 해석하는(spiritualizing) 학자 집단들의 작품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영해 혹은 비유적 해석의 “대가”인 위트니스 리의 회복역(Recovery Version) 주석성경을 예로 들어 보자(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주석성서들은 본문을 변개시켜 놓아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로 읽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주석을 달지 않았다).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해 가는 데 있어 먼저 그 분의 너비와 길이를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수평적 체험이다. 그 다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전진하게 되고 그 분의 풍성함의 높이와 길이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수직적 체험이다.」
20세기 동안 3만여 명의 기독교 학자들은 본문을 읽어나갈 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 원칙을 배제한 채 로마서 8장 39절 말씀을 전혀 묵과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며(요6:13)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이 분별된다(고전2:14)는 성경 말씀을 무시한 채 성경을 해석하려다가 사도 바울의 기도문을 변개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바울의 기도는 성경을 변개시킨 자들에게는 응답되지 않았다(18절에서 바울은 잘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도록 기도했으나 이들은 깨닫기는 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버렸다). 학자들은 동일한 저자가 동일한 단어와 동일한 문체로 기록한 두 구절(엡3:18, 롬8:39)을 비교해 보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영적이고 풍유적인 해석을 하고 만 것이다.
18절에서 말하는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그것은 문맥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문맥없이 본문을 해석하면 핑계가 된다는 말은 실로 정확한 말이다. “Text without context is pretext”). 3장 15절에도 나와 있고 3장 10절에도 나와 있고 1장 20,21절 그리고 2장 6절 및 1장 3,10절에도 나와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우주)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말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3장 18절의 높이와 깊이는 로마서 8장 39절의 높음과 깊음을 말한다(한 가지 웃지 못할 넌센스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에 주석을 단 톰슨Ⅰ,Ⅱ 주석성경을 우리 나라의 개역한글판에다 주석만 옮겨단 기독지혜사 발행의 톰슨Ⅱ 주석성경의 관주이다. 본문은 변개된 본문을 실어놓고 관주는 <킹제임스성경>대로 로마서 8:39을 달아 놓았다. 그렇게 되면 로마서 8:39의 높음과 깊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음과 깊음이 되어 버린다).
바울은 이 지구에서 살았던 평생 동안 온 우주적인 차원의 관점을 지니고 살았다. 바울의 기도는 적어도 우주의 차원을 “깨달은” 자들에게는 응답된 셈이다. 우리는 이 우주의 차원 안에서 방향과 거리를 알고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경대로믿는사람들> 창세기 1-2장 주석에 실려 있다. 93년 11월호부터 94년 9월호, 특히 창1:6,7 주석 참조).
우리는 이 땅에서 타국인과 나그네로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S 형태의 성운의 뒷쪽 끝부분에 있는 한 혹성인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태양계는 S 성운이 갖고 있는 수백 개의 은하계 중 하나이며, 이 S 성운은 수천 개 혹은 수백만 개가 되는 성운 중 하나일 뿐이다. 지구는 방향으로 보자면 이 성운의 북쪽에 있는 보좌의 오른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그의 생애 가운데 자신이 끌려올라 갔던(고후12:1-4) 그 곳을 가리킬 수 있었다. 그는 그 곳(천상)의 크기와 모양과 위치와 기상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서 그 곳에 가기를 더 원했다(빌1:21, 고후5:8).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바울은 1880년 이래 성경을 번역해 낸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충고를 들어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면 위에 있는 것을 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땅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또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기 때문이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골3:1-4).
그는 자기가 우주 어느 곳에 있으며 자기의 머리 되신 분이 우주의 어느 곳에 계신지 이 거대한 심연(창1:3에서 “깊음”이라고 불림)을 덮고 있는 몸과 그 몸의 지체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하나됨(엡5:30) 사이의 대략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 깊음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의 정확한 치수는 출애굽기 22-40장 사이에 시사되어 있다. 94년 6월 AP 통신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송했다.
“천문학자들은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발견해 냈다. 이 발견으로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전 우주에 걸쳐 퍼져있다는 믿음이 점점 신빙성을 더해가게 된다. 물은 마르카리안 1호에서 방사망원경으로 확인된 바 2억 광년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발견은 미국 천문학회의 회의에서 어제 발표되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의 기록에서 이미 우주 위와 아래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욥기를 통해 이 물 속에 리비야단이 있으며 그 표면은 얼어붙어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계4:6; 15:2에서는 이 표면이 유리바다로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이 깊음에 대해 첨단과학자들보다 훨씬 앞서 있다(창세기 주석 1:2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에베소서 3:18의 바울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란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