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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의 순교사 분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화형장의 존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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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4월호>

교회의 권력을 강탈해 온 로마 성직자들의 횡포가 보헤미아에서는 특히 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A.D.977년에 교황에게 시정을 요구하며 두 명의 사역자와 네 명의 형제들을 로마로 보냈다. 얼마후 그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불평의 원인이 시정되었다. 특히 그들은 두 가지를 허락받았는데, 그들 자신의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사 때 평신도에게도 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란들은 다시 재개되었다. 후임 교황들은 자신의 권력을 보헤미아인들에게 행사하고자 했고, 보헤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A.D.1375년 복음에 열성적인 이들이 보헤미아의 찰스왕에게 교회 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에 스며든 폐해들을 조사해서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왕은 교황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침을 얻고자 했으나, 교황은 이 사건에 너무나 분개해서 도리어 “이 저돌적이고 악한 이단들을 엄히 처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그 군주는 이 사건에 연관된 모든 사람을 처벌했으며, 교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부가적 조치를 취했다.
박해의 희생자들은 존 후스(John Huss)와 프래그의 제롬(Jerome)이 화형될 때까지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이 두 명의 탁월한 개혁가는 교황과 그의 사절들의 부추김으로 정죄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존 후스 (John Huss)

존 후스는 보헤미아의 후센니츠라는 마을에서 1380년 경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환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에게 최상의 교육을 해 주었다. 사립학교에서 고전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후 그는 프래그의 대학에서 지적 능력을 쌓았다.
1398년에 후스는 신학사(B.D.) 과정을 시작했으며, 후에 프래그에 있는 베들레햄 교회의 목사로, 대학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그 일을 그는 성실하게 수행했으며 마침내 설교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위클리프의 교리와 일치했기 때문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를 주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스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들을 맹렬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개혁주의자인 위클리프가 개혁에 불을 붙여서 교황권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무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보헤미아까지 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용하였다.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존 후스와 그의 열성적인 친구이며 동료 순교자인 프래그의 제롬이다.
개혁주의자들이 날마다 증가하는 것을 보고 프래그의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들이 확산되지 못하게 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더욱 자극하여 그들이 오히려 이 교리를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다.
위클리프의 교리를 강력하게 수호했던 후스는 대주교의 칙령을 거부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마침내 교황의 교서를 얻어내었다. 그 교서로 대주교는 그 지역에서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주교는 또한 위클리프의 복사물들을 유포하지도 않았던 네 명의 박사들에게 소송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특권에도 불구하고 회중에게 설교를 금했다. 후스 박사는 대학의 몇몇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이런 절차에 항거했고 대주교의 판결에 항소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콜로나 추기경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존 후스를 로마법정에 직접 출두시켜서 그가 거짓과 이단을 설교했다고 고소하고, 후스로 하여금 그러한 고소에 대해 변호하게 했다. 그러나 후스는 직접 출두하지 않기를 원했으며, 또한보헤미아에서 그를 크게 사랑했던 윈세스로스 왕과, 여왕, 귀족, 대학 당국은 교황이 그런 출두 명령을 철회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또한 보헤미아가 이단이라는 고소를 받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경배 장소에서 자유로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허용되기를 원했다.
세 명의 사무 변호인이 후스 박사대신 콜로나 추기경 앞에 나왔다. 그들은 그가 출두하지 않은 것을 변호하고자 했으며, 후스 박사 대신 답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추기경은 후스가 오만불손하다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시켰다. 사무 변호인들은 교황에게 항소했고 네 명의 추기경이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이 전 판결을 더욱 확증했을 뿐이며 후스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까지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당한 판결에 후스는 위원회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심한 판결을 받고, 프래그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고향인 후센니츠로 가서 그의 새로운 교리를 강단에서, 그리고 글로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글들은 상당히 많다. 프로테스탄트의 책들을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될 수 없다는 논문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위클리프의 책을 변호하는 글을 썼으며 부패한 교황과 추기경들과 성직자들의 악행을 담대하게 말했다. 그는 또한 강력한 논쟁이 수록된 다른 많은 책들을 썼다. 이것은 그의 교리들이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스에서 전체 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외적으로 교황권에 맞선 세 사람 사이에서 미결정된 논란을 결정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개혁의 진행을 짓밟고자 하는 것이었다.
존 후스는 이 위원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황제는 그에게 안전 통행권을 보냈다. 후스가 여행중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찬사와 존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리와 작은 길들에서조차도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이는 호기심이기보다는 존경의 표시였다.
그는 큰 환호성과 함께 각 도시에 안내되었으며, 일종의 승리감 속에서 독일을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추방자였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최악의 친구들이 보헤미아에 있음을 안다.”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숙했다. 그가 도착한 지 얼마 후 스테판 팔레츠라는 사람이 왔다. 그는 후스에게 고의적인 박해를 가하기 위해 프래그의 성직자가 고용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 그는 로마법정에서 보낸 미카엘 드 카시스와 합류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의 고소자로 자처하고 후스를 대적하여 일련의 조항들을 만들어 교황과 위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제출했다.
후스가 그 시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는 곧 체포되어 궁정 관리에게 넘겨졌다. 이러한 일반 법과 정의의 위반에 대해 후스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 군주의 안전 통행권을 요청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했고 군주의 안전 통행권도 거부되었다.
후스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위원회가 종교 재판관들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저주했으며 심지어 그의 유골을 파헤쳐 태워 재로 만들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명령들은 쾌히 허가되었다. 그동안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귀족들은 후스를 위하여 강력하게 중재에 나서서 그를 정죄하지 못하게 했으나, 그를 재판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들은 그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그가 위원회 앞에 섰을때 그에게 고소된 조항들이 낭독되었는데, 40개 이상이나 되는 그 조항들은 주로 그의 저술들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존 후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교황에게 호소했으나 그는 죽었고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이 문제의 명분을 그의 후임자인 존 13세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나의 지지자들이 2년 정도 교황 앞에서 나의 명분을 변명할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았기에 나는 대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 호소하였다.”
존 후스가 이 말을 마치자 그들은 그에게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를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시 그들은 그가 그리스도께 호소한 것이 합법적인지 물었고, 이에 존 후스는 답변하기를 “진실로 내가 여기 여러분 모두에게 확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하는 호소보다 더 정의롭고 효과적인 호소는 없다.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재판관이 누구인가? 누가 이 문제를 더 정의롭고 더 공평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속임수도 없으며, 그는 속임을 받지도 않으신다. 누가 그분보다 비참하고 압제받는 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가?”
존 후스가 경건하고 부녕한 푲어으로 이 말을 했을 때, 전체 위원회는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이런 훌륭한 말들은 반역의 말로 여겨졌고 그의 대적자들을 격분시켰다. 따라서 위원회에서 지정한 주교들이 그의 성직자복을 벗기고 그를 모욕하며 종이 주교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거기에는 마귀들이 그려져 있었고 “이단들의 주동자”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다. 그렇다면 비록 굴욕적이긴 하나 그를 위하여 내가 이 가벼운 관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진정으로 나는 기꺼이 이것을 쓰겠다.”라고 했다. 그의 머리에 이것이 씌워졌을 때 주교는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너의 혼을 마귀에게 넘겨 주노라.”고 했다. 그러자 존 후스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서 “그러나,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께서 대속하신 나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말했다.
화형대의 사슬에 묶였을 때, 그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이보다 더 심한 사슬에 묶이셨는데 내가 왜 이 녹슨 사슬을 부끄러워 하리요?”라고 했다.
장작이 그의 목까지 쌓였을 때 바바리아 공작은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후스는 대답하기를 “나는 결코 악을 지향하는 교리를 설교한 적은 없다. 내가 내 입으로 가르쳤던 것을 이제는 나의 피로 인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사형집행인에게 말했다. “당신은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하고 있다(보헤미아어로 후스(Huss)는 거위를 나타낸다). 그러나 1세기 후에는 구울 수도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고 했다. 그가 미래를 예견한 것이라면 그는 마틴 루터를 의미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약 100년 후에 빛을 발했으며, 백조를 문장으로 가지고 있었다.
불이 나무에 붙었고 우리의 순교자 후스는 크고 쾌활한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그 소리가 나무들이 타는 소리를 뚫고 들리다가 마침내는 심한 불꽃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재를 모두 모아서 라인 강에 뿌렸고, 지상에 그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은 물로도, 불로도, 어떤 종류의 고문으로도 없앨 수 없으리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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