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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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틴데일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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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7월호>

순교자 윌리엄 틴데일은 교황과 같은 오만한 성직자들의 뿌리와 기반을 흔드는데 쓰인 하나님의 도구였으며 주께서 선정하신 특별한 지체였다. 어둠의 통치자는 틴데일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교활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를 배반하고 그의 생명의 피를 불의하게 흘렸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인 윌리엄 틴데일은 왈레스 지방 근처에서 태어나서 어릴때부터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거기서 그는 어학과 다른 교양 과목들을 배웠으며, 특히 성경을 배우게 되었다. 성경에 몰두했던 그는 몇몇 학생들과 마그달렌 대학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제시해 주었다. 그의 행동은 그의 말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은 그가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며 흠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인정했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더 깊이 쌓아갔다. 자기 아이들의 교장인 월치의 집에서 교제하는 가운데 많은 집사들과, 여러
박사들, 그리고 유명한 성직자들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고,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성경에 대해 많은 논란이 되는 점들과 의문점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틴데일은 자신의 판단을 그들에게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했다. 그들의 의견이 자신과 다를 때면 그는 언제나 성경에서 자신의 의견을 보여주곤 했으며,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는 사실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오류를 논박했고 자신의 말을 확증시켰다. 그리하여 틴데일과 여러 차례에 걸친 논쟁을 경험한 그들은 마침내 틴데일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기에 이르렀다.
사제들은 선술집이나 다른 곳에서 함께 모여 그가 이단이라고 비난하고, 비밀리에 틴데일을 교회법 고문과 다른 주교의 관리들에게 고소하였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의 교회법 고문이 임명되었고 사제들에게 출두 경고가 내려졌으며 틴데일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
그가 교회법 고문관 앞에 서자 그는 틴데일을 심하게 위협하였고 고소자도 없는 많은 일로 그를 비난했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그들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나서 그의 스승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떤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주교의 고문관이었던 사람으로 틴데일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틴데일은 그에게 가서 성경의 여러가지 문제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다. 그 의사는 그에게 말하기를, “교황이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성경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말조심하게.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울 걸세.”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교제를 하게 되었는데, 대화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낫지.”라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틴데일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가득차서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을 무시하는 바이며, 차라리 쟁기를 끄는 소년이 그보다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오.”
틴데일에 대한 불평은 점점 더해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보고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일로 그를 고소했다.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는 그 지역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런던으로 떠나게 되었고 거기서 설교하게 되었다.
런던의 험프리 뭄무스의 집에 거하면서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했다. 거의 1년 정도를 런던에 머물면서 그는 설교자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교만했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고위 성직자들은 호화스런 삶을 누리고 있었다. 런던뿐만 아니라 영국 어디서도 신약을 번역할 만한 곳이 없음을 알고 그는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로 떠났다. 거기서 틴데일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열성과 관심에 불타서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고국의 형제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진리를 이해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던중 성경이 일반 언어로 번역되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눈 앞에 그들의 모국어로 제시되어서 그들이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평민들을 진리 위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궤변과 그들 자신의 전통으로 진리를 덮어버리거나 본문을 속여서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눈에서 가리워진 것이 교회내의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바리새적인 성직자들이 행한 가증스런 행위들과 우상숭배가 식별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궤변으로 바른 판단을 흐리게 하고, 본문의 내용과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들의 행위를 경멸하는 자들을 옭아매었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이 마음 속으로는 모든 것이 거짓임을 느끼면서도 그들의 미묘한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는 없게끔 만든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틴데일은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정으로 가득찼다. 먼저 신약에 손을 대어서 A.D.1525년경에 출판되게 되었다. 런던의 주교인 그스버트 톤스톨과 토마스 모오경은 너무나 분개해서 이 “거짓되고 실수투성이의” 번역을 파기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팩킹톤은 그같은 주교의 말을 듣고, 남아있는 모든 성경을 얻어다 주겠다고 말했다. 주교는 비용이 얼마나 들든지 그것을 다 입수해서 불태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일을 부탁했다. 오거스틴 팩킹톤은 이 모든 일을 윌리엄 틴데일과 상의했다. 그리하여 팩킹톤과 틴데일 사이에 이루어진 협약을 모르는 런던 주교는 남은 모든 성경을 입수했고 팩킹톤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결과적으로 틴데일은 돈을 얻게 되었다.
이 일 후에 틴데일은 신약을 다시 수정하고 새롭게 인쇄해서 초판의 세 배나 되는 양의 성경을 영국으로 보냈다. 주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팩캥톤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렇게 많은 신약이 해외로 나가다니. 자네가 성경 모두를 내게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이에 팩킹톤은 “분명 나는 구입할 수 있는 모든 성경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했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압인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압인기까지 다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주교는 웃었고 그래서 그 문제는 거기서 일단락 되었다.
얼마 후에 조오지 콘스탄틴이 그때 당시 영국의 교회법 고문이었던 토마스 모어경에게 이단 혐의로 체포되었다. 모오경은 그에게 물었다. “콘스탄틴! 내가 묻는 한 가지에 솔직히 답변해 주기 바라네. 그러면 자네가 고소된 다른 모든 것에는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하네. 바다 너머에 틴데일 일당이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누군가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이들이 있는 게 분명한데, 자네는 그들 중 하나이니 돈의 출처를 알고 있을 걸세. 그들을 돕는 자들이 누구인가?” 콘스탄틴은 대답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소.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요. 그가 신약을 불태우기 위해 그 값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소. 과거에도, 또 현재도 그가 우리의 유일한 후원자이며 위로자요.”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주교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주교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라고 모어는 말했다.
그 일 후에 틴데일은 구약번역에 착수했으며 모세오경을 끝마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복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서문을 작성했다. 이 책이 영국으로 보내졌다. 그것이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영국 전국민에게 얼마나 큰 빛이 되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틴데일은 루터와 다른 학식있는 사람들과 독일에서 회합한 후 다시 네덜란드로 떠났다.
틴데일의 신학서적들, 특히 신약 번역은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불경건한 사람들은(대중들이 자신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했으며,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 자신들의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적지 않은 소요를 일으켰다.
틴데일은 신명기를 번역하고서 햄버그에서 인쇄할 것을 계획하고 배를 타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홀란드 해변에서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그는 모든 책들과, 저술들과 복사본들과 돈과 시간을 다 잃고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는 다른 배로 햄버그에 갔다. 거기서 약속대로 커버데일이 그를 기다렸으며 모세오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 일은 부활절에서 12월까지 계속되었으며 A.D.1529년 마가렛 밴 엠머슨 부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성직자들은 그 책이 보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 성경은 수천에 달하는 이단적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어느정도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그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통치자들을 그들의 목적에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성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게 반역하도록 만들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람들로부터 성경을 빼앗고자 하는 영국 성직자들의 패역한 책략은 너무나 엄청났다.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되는 것도 견디지를 못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세상을 어둠속에 가두어 두고, 헛된 미신과 가짜 교리로 자신들의 욕망과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만족시키며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추악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기어코 얻어냈으며 서둘러 선언문을 작성하고 공표해서 틴데일의 번역 성경을 금지시켰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서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런던의 등기부에서 주교들과 토마스 모어경은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열심히 찾아서 조사했다. 틴데일이 어디서 누구와 모였으며, 그 집이 어디 있으며, 그의 키는 얼마며, 외출할 때는 어떤 옷을 입는지 등을 조사했다. 조사한 자료들을 가지고 그들은 틴데일을 파멸시키기 위한 그물을 한올 한올 엮어갔던 것이다.
윌리엄 틴데일은 앤트워프 시에 머물면서 토마스 폰츠의 집에 약 1년을 유숙했다. 그곳으로 헨리 필립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어떤 숨은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틴데일은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수단을 통해 헨리 필립은 그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곧 틴데일은 그를 크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와 한두번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틴데일은 그와 더 깊은 우정을 갖게 되었고 그를 폰츠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그에게 자신의 책들과 다른 중요한 연구물들을 보여 주었다. 틴데일은 이 반역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폰츠는 이 친구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틴데일에게 필립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틴데일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며 상당히 학식이 있고 매우 유순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폰츠는 틴데일이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의 친구들 중의 하나의 소개로 가까워졌으리라 생각하고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폰츠는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바로이스 시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 달이나 6주 정도 일을 보게 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헨리 필립은 폰츠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인에게 틴데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후 그는 다시 가서 브루셀에서, 그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근처와 거리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틴데일에게 가서 함께 저녁을 들자고 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은 필립과 함께 나갔다. 폰츠의 집을 나가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은 자기 앞에 필립을 가게 했으나 필립은 겸손을 가장해서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틴데일은 그렇게 큰 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앞에 갔으며 키가 큰 필립이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문 양편에 장교들을 배치시켜 놓았던 것이다. 뒤에 선 필립은 틴데일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장교들에게 데려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장교들은 그를 감옥에 가둔 후에 폰츠에게 틴데일의 단순함에 동정을 표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를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그 다음은 행정고문관이 폰츠의 집에 와서 책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가져갔다.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18마일 떨어진
빌보데 성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 틴데일은 변호사를 대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이 답변하겠다며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설교했으며, 성안에서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많은 논의 끝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제의 칙령으로 오그스버그 모임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A.D. 1536년 빌보레 시에서 화형당했다. 화형대에서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소서!”
그의 교리와 삶의 성실성은 그가 감금되어있는 동안(1년 반의 기간) 그가 간수와 간수의 딸과 그의 다른 가족들을 회심시켰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적들은 그의 번역이 이단적 교리들로 가득찼다며 심하게 트집을 잡아댔다. 틴데일은 존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 날에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내 양심에 비추어 하나님 말씀의 단 한 자도 변개시키지 않았으며, 지상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부를 내게 다 준다 해도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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