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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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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8월호>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즈(Wales)를 총칭하는 영(英) 본국]의 에드워드 2세(Edward II)가 통치하던 1324년경에 태어났다. 그를 교회 일꾼으로 키울 작정이던 부모는 여왕 필리피(Philippi)의 고해신부 로버트 이글즈필드(Robert Eaglesfield)가 옥스포드(Oxford)에 설립한 왕립 대학(Queen’s college)에 그를 입학시켰다. 그러나 학문적 유익이 기대에 못 미치자 당시 유럽 최고의 학구 조직으로 정평이 나 있던 머턴 대학(Merton College)으로 옮겼다.위클리프가 처음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건 학교에 돈을 달라며 구걸하는 수사들을 대적해 대학을 변호한 일 때문이었다. 수사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볼 수 있는 구걸자이셨고 그분의 제자들도 구걸자들이었으므로 구걸하는 것을 복음이 규정하고 있다는 교리를 설교단과 기회 닿는 모든 곳에서 역설했다. 그들과 대학의 반목은 끊이지 않았다. 이 게으른 자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위클리프는 그 거지떼를 대적하는 논문을 출간하여 그들이 종교는 물론, 인류 사회에 치욕을 안겨 주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 일로 그는 대학의 첫째가는 대변자들 중 하나로 여겨졌고, 곧 발리올 대학(Baliol College)의 학료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후에 신학 교수 자리에 선출된 위클리프는 로마 교회의 오류들과 수도원 앞잡이들의 야비함을 확신하고서 그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대중 강연을 통해 그들의 부도덕함을 거세게 비난했고, 미신의 흑암으로 덮여 있는 각색 악습을 펼쳐 보였다. 대중이 뒤집어쓰고 있던 편견부터 벗겨 내었고, 로마 법정의 횡령 행위들을 까발렸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그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어 그의 직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후에 이전 지위를 회복하자 강의를 통해 교황의 횡령, 그의 무오성, 그의 오만, 그의 탐욕, 그의 폭정에 대해 거센 공격을 가했다. 위클리프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주교들의 허식, 사치, 장식 달린 예복들로 화제를 돌려 그것들을 초기 감독들의 소박함과 비교했다. 그들의 미신과 속임수는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논리적 정확성으로 역설하던 주제들이었다.
랭커스터 공작의 후원으로 위클리프는 성직록을 넉넉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의 교구에 정착하자마자 그의 적들과 주교들은 그를 가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이 박해 때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퍼시(Percy) 경, 영국 문장원(紋章院) 총재가 함께하고 있었기에 그 시련은 그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에드워드 3세가 죽자 손자 리차드 2세(Richard II)가 나이 열한 살에 왕위를 계승했다. 기대했던 독점적 섭정(攝政)의 자리를 손에 넣지 못한 랭커스터 공작은 그의 권세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는 이때다 싶은 위클리프의 대적들은 그에 대한 고소 항목들을 새로이 다듬었다. 교황의 권위에 힘입은 주교들은 위클리프의 재판 회부를 주장하며 나섰고, 그는 실제로 램베스(Lambeth)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바깥에서는 민중들이 금방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어수선했고, 법정에서마저 어떤 최종적인 선고도 내려서는 안 된다며 루이스 클리포드(Lewis Clifford) 경이 엄포성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판사들은 지레 겁을 먹고 위클리프에게 교황의 미움을 사는 교리들을 설교하지 말라는 금지령만 내리고서 전체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이에 콧방귀를 뀐 후 맨발로 돌아다니며 두터운 모직으로 된 프리즈 가운(frieze gown)을 걸치고서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1378년에 두 명의 교황, 즉 우르반 6세(Urban VI)와 합법적인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사이에 경합이 벌어졌다. 위클리프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교황 제도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그것을 각계각층 사람들이 진지하게 읽도록 했다. 그런데 그 해가 다 지날 무렵 위클리프가 심신 기능에 심한 이상이 생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갔다. 옥스포드에서 가장 저명한 시민 넷을 옆에 끼고서 구걸하러 다니던 수사들은 그를 찾아가 그들에 대해 역설하고 다녔던 내용들을 그의 혼을 위해서라도 철회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엄한 얼굴로 응수했다.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살아서 수사들의 악행을 만천하에 폭로할 것이다!”
병상에서 일어나자, 위클리프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매우 중대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소책자를 발간하여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제시했는데, 이에 성경 발매를 금지시키려는 주교들의 발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경 판매량을 치솟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인쇄본을 확보할 수 없는 사람들은 특정 복음서나 서신서들의 사본이라도 손에 넣으려 했다.
이 일이 끝나자, 위클리프는 더 나아가 화체설 교리를 목표로 삼았다. 1381년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이 교리를 공격했고 논문을 발표했다. 옥스포드 부학장으로 있던 바턴 박사(Dr. Barton)는 그 대학 수뇌들을 소집해 위클리프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서 파문 운운하며 위협을 가했다. 위클리프는 이제 랭커스터 공작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데다가,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이전의 적수 윌리엄 코트니(William Courteney) 앞으로 출두하라는 법정 소환 명령까지 떨어져 난관에 부딪혔다. 때문에 자신이 그 대학 직원으로서 주교 관할권에서 면제됨을 구실 삼아 스스로를 보호했고, 이 탄원은 대학 당국이 자기 직원을 지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수락되었다.
지정된 시간에 소집된 법정은 최소한 그의 견해들에 대해 판결이라도 내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어떤 것들은 오류로 어떤 것들은 이단으로 정죄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 주제를 문서로 출판하여 재판 결과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주교는 모든 이단 사설과 위클리프가 간행한 책자들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옥스포드 총장에게 내리는 지시 서한들을 왕에게서 받아 냈고, 위클리프는 검열의 폭풍 속에서 물러나와 어느 후미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미 그의 견해들은 길을 걷다 두 사람을 만나면 그 중 한 명이 위클리프파라 확신해도 무방할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기간에 두 교황 사이의 다툼은 계속되어 교서를 발표한 우르반은 종교의 대의명분을 위해, 또 교황청을 지키기 위해 클레멘트와 그의 지지자들을 대항해 무기를 들어올리자며 종교에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촉구했다. 종교의 이름을 팔아먹은 그 야비한 전쟁은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던 위클리프로 하여금 다시 펜을 들게 했다. 타협을 모르는 신랄하기 짝 없는 글 때문에 우르반의 분노를 사 전례 없는 큰 문제를 야기한 듯했지만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되었다. 얼마간 중풍에 걸린 그를 적들이 분노를 쏟을 가치도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시 돌아온 위클리프는 자신의 교구인 러터워스(Lutterworth)로 가서 교구 목사를 지냈다. 그리고 1384년 말 실베스터의 날(Silvester’s day)에 주님의 품에 평안히 잠들었다.
위클리프의 박해자들은 그가 죽은 지 41년 뒤 진토가 된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재로 만들었고, 그 재를 주워 담아 강물 속에 던져 버렸다. 그렇게 그는 3대 요소, 즉 흙과 불과 물로 분해된 셈인데, 이는 위클리프의 이름과 교리 모두를 완전히 소멸시켜 없애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그의 시체를 파내어 뼈들을 불사르고 재를 물 속에 가라앉게 했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얻은 열매와 그의 교리에 담긴 진리는 불태울 수 없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