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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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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7월호>

필라델피아 시대에 매튜 헨리, 앤드류 맥클라인, 존 헨리 죠벳 등은 목사로서 사역하면서 영적 교훈 혹은 경건 생활에 관한 교훈 등을 위주로 한 성경 주석을 출간하였다. 플리니피스크와 레비 파슨은 1819년경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다니엘 블리스는 시리아에서 개인 사역을 하였다(필라델피아 시대의 주의 군사들이 도래한 것이다!).
1854년 나가사키 항에 페리호가 정박함으로써 일본에서의 복음 사역이 재개되었는데 리긴스, 윌리암스, 헵번과 시몬즈 등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그 중 가장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제임스 발라프(1872)가 조직한 “요꼬사마 밴드”라는 선교단체였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도시샤 대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그룹이 훈련시켜 배출한 전도자들로는 카나모니, 야마무로, 크와베 및 키무라 등이 있다. 한편 허드슨 테일러는(1832-1905) 중국 내지 선교회를 세웠다. 판디타 라마바이와 몇 사람들은 인도에서 알렉산더 더프(1853)의 사역을 이어받아 복음을 전했다.


빌리 브레이

빌리 브레이(1794-1868)는 영국의 콘월 출신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했던 전도자였다. 그는 심히 죄악된 삶을 살다가 구원을 받았으며, 거듭남과 아울러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브레이는 커다란 집회를 개최해 본 적은 없지만 죽을 때까지 꾸준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빌리 브레이는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미친(mad)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기쁜(glad) 사람이란 뜻이다... 나는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한쪽 발은 ‘영광’이라고 말하고 또 한쪽 발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브레이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점철되었다. 아마 그러한 영적 축복을 누린 신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브레이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거실에서 춤을 추며 기뻐 외쳤다. “나의 아내 조에이는 빛나는 영광을 지닌 자들에게로 갔도다. 찬란한 천사들과 함께 거하니 영광이 있으라.” 라오디케아 교회시대(1900-1990)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빌리 브레이의 전기를 읽어야만 한다. 특히 그가 실제로 산을 옮긴 때와 그의 마지막 한 잎을(그 돈은 의사를 불러 딸을 치료하려던 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주어버린 그 때를 잘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도 그의 딸을 치료해 주셨다. 빌리 브레이의 “다리를 건너는 이야기”는 실천신학과 성화에 있어서 이미 고전이다.


클라우스 함즈

클라우스 함즈(1778-1855)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던 관념론(Rational- ism)을 공격했다. 니브가 지적하는 19세기 전반기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종교적 부흥은 세속적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로크만, 키에르케고르, 쉘링, 게세니우스, 기본, 칸트, 쉴러, 팔레이, 페인, 피히테, 밀, 나폴레온(카톨릭), 헤겔, 슐라이어마허, 텔리란트(카톨릭), 메떼르니히(카톨릭), 페스탈로치, 베에토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바로 클라우스 함즈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토마스 구트리(1803-1873), 에드워드 어빙(1792-1834), 헨리 페리(1829- 1890), 로랜드 힐(1744-1833), 그리고 다니엘 롤랜즈(1800)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피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을 전파했다. 그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에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롤랜즈가 설교하는 강대상 밑에 누군가가 화약을 갖다 놓고 휴즈를 연결시켜 놓기도 했고, 한번은 가까운 거리에서 엽총 알에 맞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사람들은 단 하나의 책, 즉 <킹제임스성경, 1611>만을 설교했고 믿었다.


크리스마스 에반즈

크리스마스 에반즈(1766-1838)는 웨일즈 출신의 설교자로 존 죤스, 윌리암 윌리암즈, 다니엘 롤랜드, 존 엘리아스 등의 뒤를 이어 부흥을 이끌었다. 1742년에는 두 명의 위대한 설교자가 스코틀랜드를 복음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윌리암 맥컬로크와 제임스 글랜딩이었다. 맥클로크는 글래스고우 근처에서 사역했는데 일년에 400여 명의 남녀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했다. 이들의 회심은 강제로 미사에 참여하는 따위의 로마 카톨릭식 개종도 아니고 라오디케아 교회시대에서 흔히 행하는 “입으로만” 하는 그런 회심과는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심이었다. 그들은 성인 남녀로서 맥클로크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 울면서 자비와 용서를 구했던 자들이다.
크리스마스 에반즈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9살 때 부모를 잃었고 회심하기 전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한 번은 거의 익사할 뻔하였으며, 한 번은 칼에 찔렸고, 또 한 번은 달리는 말에 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후에도 그의 회심으로 그를 미워했던 친구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그의 눈을 상했다. 그는 서투른 설교자였으며 초라한 옷을 입고 다녔지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남녀노소는 울고, 뛰며, 소리를 질러댔고 어떤 때는 흥분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크게 고무되어서 때로는 글자 그대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웨일즈의 뛰는 자들”(The Welsh Jumpers)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웨드워드 페이슨은 메인 주 포트랜드에서 목사로서 설교했으며 사무엘 부엘은 롱 아일랜드에서, 그리고 리챠드 박스터는 키더민스터에서 부쉬넬(1802-1876), 비쳐(1800-1887), 필립스 브룩스(1835-1892), 프레데릭 로버트슨(1816- 1853), 그리고 존 뉴맨(1801-1890) 등과 더불어 사역했다. 부쉬넬은 후일 독일의 배교자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사회주의에 몰입했고 끝내 어린 아이에게는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며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크리스챤이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이단에 빠지고 말았다.

리만 비쳐는 삼위일체 문제로 이단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에 관해 건전한 교리를 갖고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거짓 교리인 후천년주의를 가르쳤고 “거듭난 인류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였다는 것이다(성경 어디에도 인류가 거듭난다는 말은 없다. 개개인이 성령으로 거듭날 뿐이다).
그는 또한 해리엇 비쳐 스토브와 쥴리아워드 호브 등과 함께 “왕국을 이 땅에 가져오는 일”에 힘썼다. 그들은 북군이 남쪽의 백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행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진리라는 단어가 가장 남용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한 구실은 “자유”였다. 그들은 북쪽의 양키 군대가 남북전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0년 현재 미국의 흑인향상협회 지도자 중 그 누구도 흑인들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1782-1834)은 최초의 개신교 중국 선교사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중국인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 가지 대적이 중국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과 동인도 회사의 간부들이었다. 모리슨은 창고에서 살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으며 중국어 사전과 문법책도 만들었다. 사실 이것들 덕분에 1945-1965년 모택동이 만들어낸 공산주의에 관한 책들을 중국인들이 읽을 수 있었다(복음전파, 성경교육, 문화, 배교를 기억하라).


죠슈애 마쉬맨

죠슈애 마쉬맨(1766-1837)은 윌리암워드와 윌리암 캐리의 선교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사무엘 마즈렌은 마오리스(뉴질랜드)의 사도로 불리는 사람으로 1794년 호주로 갔다가 1814년 처음으로 뉴질랜드로 갔다. 그때부터 1838년 그가 죽을 때까지 마즈렌은 뉴질랜드로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가서 마오리스 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마즈렌의 사후 3년이 지나 그 지역을 방문했는데 셀윈 주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이 지역 전 주민이 신앙으로 돌이킨 것을 보았다.” 마즈렌이 죽었을 때 뉴질랜즈의 모든 마오리 족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들이었다.
마즈렌은 홀트와 네슬 본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비평 원문들은 완전히 무시했다. 그것들은 윌리암 메이스(1729), 벵겔(1734), 하우드(1776), 버치(1798), 허그(1808), 알터(1787) 등이 만들어낸 “성서”들이었다. 마시맨과 마즈렌 같은 선교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이들 부패한 성서들은 오늘날의 커스터, 웨스트, 메이첸, 로버트슨(하바드 출신), 예일, 옥스포드, 할레, 캠브리지, 다트마우스, 프린스톤, 튜빙겐, 베를린 대학의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심는 것은 종류대로 나오는 법이다.


존 펙

존 펙(1789-1858)은 일리노이와 미주리 주로 선교사역을 펼쳤다. 그는 죠나단 고잉 박사가 미국 침례교 가정선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으며 후일에 켄터키 코빙톤에 신학교를 세울 때도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피터 파커(1804- 1888)는 의료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중국의 캔톤지방으로 갔다. 그들은 바울의 지침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1611년 권위역본, 즉 <킹 제임스 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파하러 간 것이다. 윌프레드 그렌펠(1866-1940)은 라브라도르와 뉴파운드랜드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일했다.
헨리 마틴(1781-1812)은 페르시아로, 데이비드 리빙스톤(1813-1881)은 동아프리카로, 한스에기드(1686- 1758)는 그린랜드, 알렉산더 더프(1806-1878)는 인도로, 알프레드 세이커(1814-1880)는 카메룬으로 갔다. 아렌 프렌시스 카이너(1794-1851)는 띠에라 델 푸에고에 있는 파타고니아 지방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픽톤 아일랜드에서 굶어 죽음으로써 자신의 피로 주님을 증거했다. 가디너(네이트 세인트처럼)는 포크랜드 섬의 원주민들을 복음화시킬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희생적 죽음 후 영국 국민들의 각성으로 30년도 채 못되어 포크랜드 섬의 모든 원주민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존 게디(1815-1872)는 뉴히브리즈 지역으로 갔던 카나다 선교사였다. 그는 존 페이톤(1824-1907)의 선구자였
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 페이톤의 전기를 타잔의 모험담처럼 읽고 있다. 게디가 에네이팀 섬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32년 그곳을 떠났을 때 그곳에는 이교도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어떤 사람들에게는 게디야말로 “영국의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일지 모르겠다).
존 페이톤은 타나 지방의 인간 사냥꾼들 및 식인종들과 싸웠다. 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그가 갖고 있었던 무기는 <킹 제임스 성경>과 찬송가뿐이었다. 그의 아내가 죽었고 그의 아들도 죽었으며 선교센타는 타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성경 하나만을 든 채로 타나에서 쫓겨났다.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아니와 섬으로 선교를 하러갔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모든 원주민 성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도록 이끌었다.
페이톤은 최소한 30차례에 걸쳐 직접적인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이것은 직업 군인이나 깡패들보다도 더많은 횟수이다). 그리고 적어도 20번은 무기가 그의 얼굴 혹은 몸에 거의 닿을 정도의 위협을 받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존 페이톤의 전기를 읽어야만 한다. 존 페이톤의 삶을 존 웨인, 아브라함 링컨, 맥아더, 케네디, 패튼 장군, 존 레논 등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이들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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