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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면 개혁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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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11월호>
지난 9월 열린 예장합동 제100회 총회에서 교회 강단에 십자가 부착을 금지한 과거 총회 결의를 재확인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합동 측은 이 같은 결의를 지난 1957년 제42회 총회에서 했으며 이번 총회 전에도 재론한 적은 있지만 번복한 적은 없는데, 이는 십자가를 "우상화"하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한다. 언론에 따르면, 총신대 김길성 교수(조직신학)는 "과거 공의회에서 일종의 '성상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이콘'이라고도 하는 성상, 곧 예수님이나 성자들의 얼굴을 새긴 조각 등을 금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강단에 십자가를 부착하지 않기로 한 것은, 아마 십자가에 담긴 신앙적 의미 이상으로 그것을 성상화하거나 그 외 다른 조각들이 따라서 들어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동신대 조직신학)는 이번 결정에 대해 "종교개혁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는 개혁주의 교회라면, 예배당에 십자가상 등을 부착해선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갈보리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거듭난 성도에게는 육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의미가 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손바닥 너비만큼 주어진 육신의 생명보다 귀한 영적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이 주님을 처음 알게 된 믿음의 시작이요, 그가 누릴 영원한 기쁨의 발원처이다. 갈보리의 거친 십자가는 죄로 죽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야 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부어진 곳이며, 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결정체이다. 그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박힌 그리스도인은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십자가를 두고서 그 형상을 우상화할 우려를 한다는 것은, 그럴 가능성을 내재한 교회들의 영적 수준이 매우 형편없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주님과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못박혀 있는 십자가를 어떻게 우상화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 밑에서 바라보기에 우상화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갈보리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들이다. "십자가 우상화 가능성"이라는 생각 자체가 그들이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영적 수준임을 보여 준다. 종교개혁 당시 반카톨릭 프로테스탄트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십자가상을 비롯한 모든 카톨릭 형상을 불허한 것은 시대적 상황에 맞는 믿음의 행위였다. 말 그대로 그들은 "카톨릭 우상 숭배"에 항거한 "개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개혁주의를 자처하는 자들이 십자가상 제거를 강조하며 자신들의 행위가 중세 암흑시대의 종교개혁 정신과 일치한다고 떠벌린다. 참으로 그러한가?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인 것인가? 칼빈주의자들의 십자가상 제거 행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와 정말로 관련 있는 것인가?
첫째, 그들 예장합동은 스스로 반카톨릭이라 하면서도 카톨릭 성경인 개역한글판을 사용하는 모순을 보임으로써 종교개혁과 무관한 자들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개역한글판의 유래를 설명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서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으로 큰 논란 없이 보존되어 왔으나, 신약성경은 A.D. 250년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아니한 필로(Philo, B.C. 20 - A.D. 50)와 오리겐(Origen, A.D. 184-254), 또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이 변개되었고, 그들에 의해 변개된 성경에서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의 명을 받고 50권의 사본을 복사한 것이 확산되어 변개된 사본의 씨가 되었다. 유세비우스가 복사한 사본에서 제롬이 라틴벌게이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카톨릭 성경의 원문이 되었고, 이 변개된 사본들은 주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와 카이사랴에서 변개된 후 로마와 여러 지역들로 확산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본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으로... 이들 사본에는 외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 두 사본을 근거로 1881년 영국의 웨스트코트(Westcott)와 홀트(Hort)가 헬라어 신약성경을 만들어 출간하였고, 독일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네슬(Nestle)이 1898년에 소위 네슬(Nestle)판을 출간했다.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사본에서 영어개역본(RV, 1884), 미국표준역본(ASV, 1901), 개역표준역본(RSV, 1952), 새국제역본(NIV, 1978) 등이 나왔고, 네슬판과 미국표준역본(ASV)과 중국 성경에 힘입어 <개역한글판성경>이 탄생하게 되었다.』
개역한글판성경은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가짜 성경인 것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인 마귀가 카톨릭을 통해 세상에게 준 것이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낳으신 그분의 성도들에게 주신 성경이 아니다. 개역한글판과 관련된 성경 변개의 문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 다루어져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성경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자들의 성경 변개 문제는 A.D. 58년경의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관심사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이 죄인들에 의해 변개될 것을 미리 아셨기에 "말씀보존"에 관한 약속을 구약성경에 확실히 해 놓으셨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이 "말씀보존"의 약속에 따라 주어진 성경이다. 그것은 "종교개혁가" 루터가 번역한 <루터성경>(1534)과 같은 원문에서 나온 성경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그야말로 "종교개혁 성경"인 것이다!
종교개혁을 이야기하려면 자신이 사용하는 "성경"부터 확인해야 한다.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를 제거하여 종교개혁 정신을 따른다는 자들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혐오한 카톨릭 성경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모순된 집단인가를 보여 준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바른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은 성경부터 바꿔야 개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경이 틀렸는데 어떻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바른 성경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 수가 있는가?
일례로, 요시야왕이 개혁을 이룬 것은 외형적인 성전 수리 때문이 아니었다. 겉으로 하는 개혁은 그 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마 23:27).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힐키야에게 주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하셨고(왕하 22:8), 요시야왕은 그 책의 말씀들을 듣고서 옷을 찢었으며(왕하 22:11), 그 말씀들로 인해 실질적인 개혁이 진행될 수 있었다(왕하 23:1-25). 성경적인 개혁은 "성경"에 근거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과 비교했을 때 36,000군데나 틀리고 신약에서만 2,200단어 이상이 삭제된 개역한글판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성경이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의 실체를 보여 줄 뿐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자들과, 그 왜곡한 것을 수용하고 전파하는 자들은 결단코 개혁자들이 될 수 없으며, 카톨릭과 동일한 하나님의 대적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시 56:5).
둘째, 존 칼빈을 따르는 예장합동이 십자가상을 제거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와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서 그 이후에 이루어지게 된 일들의 시점을 "창세 전"으로 거꾸로 돌리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선택"과 "예정"을 동시에 다루는 에베소서 1:4,5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창세 전 망상"을 깨뜨려 보도록 하자.
먼저 에베소서 1:4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라고 말씀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시점을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으로 잡는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창세기 1:1 이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았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그를 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정하셨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성도로서 택하시는 때는 언제인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진 이후" 죄인이 그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이다. 그 순간 그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엡 1:13), 동일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아 들어간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죄인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주님을 신뢰했을 때가 그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시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미리 정해지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다(벧전 1:20).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양』(계 13:8)을 믿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 그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은 창세 후의 갈보리 십자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번에는 그 다음 구절인 에베소서 1:5을 보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adoption]할 것을 예정하셨으니』(엡 1:5).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셨다"는 그들의 거짓 교리로 곧장 달려간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다고만 말씀할 뿐이다.
성경에서 "예정"은 "입양"(adoption), 곧 "양자 됨"과 관련 있는 단어이다. "양자 됨"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하는데, 4절의 "택함"과 마찬가지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시점부터 적용된다. 그 일의 완성은 『양자 되는 것[adoption], 곧 우리 몸의 구속』(롬 8:23)이 이뤄지는 휴거 때이다. 이것은 양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제적인 초자연적인 몸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고(엡 1:5),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롬 8:29).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2).
아무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실제적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법적 지위를 가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정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몸의 구속을 받을 수도 없다. "택함"과 "예정"이라는 성경적인 용어들을 가져다가 존 칼빈의 망상에 꿰어 맞추면, 갈보리 십자가와 또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참되고 영원한 것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장합동은 종교개혁 정신과, 갈보리 십자가와 무관한 자칭 개혁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부터가 카톨릭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들의 교리는 갈보리 십자가 이후에서 동떨어져 창세 전을 헤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논할 자격도 없고, 2천 년 전 갈보리에서 흘려진 보혈이 적용되는 사람들이 아님에도, 그들은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를 떼어내 종교개혁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존 칼빈의 『다른 복음』(갈 1:6)이 만들어 낸 "다른 십자가"로 벌이는 교회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를 떼어내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왜 십자가만 떼어내는가? 목사들은 사제들의 가운을 벗고, 그들을 흉내내어 목에 두른 스톨도 벗고, 카톨릭 성가대 같은 성가대도 해체해야 되지 않겠는가?
참된 개혁은 외형적인 탈카톨릭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 교회에서 바른 성경으로 성경적인 교리를 실행하고, 반카톨릭 교회사를 가르치며, 신약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주님을 섬기는 데서 시작된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고 성경대로 믿고 섬기는 성경침례교회가 신약 교회의 참된 모델이다. 성경침례교회에 들어서면 가시면류관을 쓰고 주홍색 띠를 두른 나무 십자가가 서 있는데, 우리는 이 십자가를 우상화할 염려를 전혀 하지 않는다. 갈보리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전파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를 부족하나마 그 나무 십자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