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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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지 않은 이어령의 신앙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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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1년 01월호>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보실까? 일단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처럼 매우 기뻐하실 것이며, 그의 인생을 통해 계획하신 바를 이루려 하실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 사이에서도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을 때 기뻐하실까? 어떤 사람은 좀 더 기뻐하시고 어떤 사람은 좀 덜 기뻐하실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유명하고 학식 있고 부유하며 소위 "영향력" 있는 사람을 더 기뻐하실까? 이에 대한 대답은 "No"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며, 사실상 하나님 앞에는 더 추하고 덜 추한 것이 큰 의미가 없으므로 누구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두 손 벌려 맞아 주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 것같다. 말로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의 친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부자들이 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대학 교수가 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가가 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들의 재력과 "배경"을 좋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구원받고 교회에 오느냐 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가 구원을 받지 않았어도 받은 것처럼 적당히 포장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그 누군가를 교회에 받아들여, 그를 통해 그 교회가 더 성장할 수만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그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기독교 매체들도 마찬가지다. 그 거물급 인사를 잘 포장해서 소개만 하면 수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바로 그를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잘 포장된 기독교 상품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이.어.령, 이화여대 교수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던 바로 그이다. 이 상품을 꾸며 놓은 포장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것이다. 대학교수 출신에다 문화부장관을 했다는 이유로 "최고의 지성"이라는 찬사를 붙인다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도 기독교계로서는 이 정도 인물에 이 정도 포장을 할 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그를 인도한(구령이 아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로서는 교세 확장의 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요, 기독교 출판업계로서는 돈벌이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정한 회심은 필요없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심을 했다면 예전의 세상 지식을 모두 쓰레기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요.』(빌 3:8)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렇게 포장된 인물들은 자신의 세상적 지위와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그들을 포장하기에 매우 좋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상품"은 배설물로 잘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령 교수의 대표적인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혹은 여러 인터뷰들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간증"을 하고 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지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나아갔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 이 말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일단 그는 구원받았다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하용조 목사에게 일본의 한 호텔에서 세례를 받았을 뿐인데, 세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학생들도 알 만한 사실이다. 그는 그의 책과 여러 인터뷰들을 통해 딸의 기도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이끌었다는 "간증"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간증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누구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들을 씻었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주와 구주로 영접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도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이 회심에 대한 간증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에 어떤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께 돌아서서 이렇게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쟁이었다면 거짓말했던 과거를 참회해야 하며, 살인자였다면 그 더럽고 추악한 과거를 참회해야 하고, 우상 숭배자였다면 그 우상 숭배했던 과거를, 진화론자였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했던 과거를, 연예인이었다면 대중들을 사탄적인 세상 문화로 이끌었던 과거를, 인본주의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던 사람이라면 수많은 학생들과 추종자들을 지옥으로 이끌었던 그 과거를 참회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이어령이라는 한 사람의 죄를 들추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가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가 무신론자로서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부했다면, 분명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끌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의 그 잘난 "지성"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지성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거기에서 회심해야 하며, 그것을 던져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의 엉터리 지성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그동안 잘못 가르쳤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전해야 한다. 그래야 참다운 간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나 책 어디에서도 그러한 간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구원받지 않았기에 간증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고 강조하고만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포장하는 광고 카피 중 하나는 이것이다 :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맞는 서술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갖고 있었던 지성이 쓰레기였다는 고백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갖고 있던 지성이 영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세상적 지성이 그리스도 예수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세상 문학과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본주의 철학과 진화론적 과학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현대의 "지성"이었다. 그러한 "지성"이 어찌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가 있겠는가? 적어도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을 붙인다면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엉터리 "지성"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하나님께로 왔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포장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최근에 이 책에 붙은 또 다른 광고 카피는 이렇다 : "길을 찾는 30만 독자, 삶의 의미를 구하다." 이 책이 구도자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정말 30만 명이 이 책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 아니다. 이 카피는 단지 이 책이 30만 부 팔려 나갔다는 말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앙을 빙자한 철학 에세이를 읽고 늪에 빠져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령이라는 잘 포장된 상품을 통해 제시된 또 하나의 책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시집이다. 그가 과거에 혹은 최근에 쓴 시들을 엮은 것인데,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신론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작품이다. 이 역시 무신론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거나 하는 참회의 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신론자였던 시절에도 영성을 향해 열려 있었기에 하나님을 향해 외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포장하는 광고 카피는 이것이다 : "우리의 시가 구원을 향한 절실한 염원이 될 때 차라리 그것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 무신론자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있는가?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이 존재하시는 것...을 마땅히 믿어야 하느니라.』(히 11:6)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절대로 기도할 수 없다. 세상적인 지식들에서 허무함을 느끼고 무엇인가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어렴풋이 여겨 그 존재를 대상으로 철학적 언어로 내뱉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나 시바, 브라만, 크리쉬나 같은 이방 신들을 찾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기도"한다. 그가 "구도자"로 자신을 나타내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구도하는 것은 결코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가 참회의 시를 썼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 시들 역시 자신의 세상적 지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일 뿐이다. 도대체 어떤 회심자가 무신론자였던 시절의 시들을 신앙적인 시인 양 포장해 낸단 말인가?
다시 강조하지만 회심했다는 것은 자신의 죄들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이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이 지은 죄들을 낱낱이 다 자백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한 번 회심했다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돌이켰다는 분명한 간증은 갖고 있어야 한다. 세상 쓰레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오늘날에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돈 때문에 세상적인 쓰레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기독교 연예인들이요, 그중의 하나가 기독교 정치인들이요, 또 기독교 지식인들이다. 타락한 세상 문화의 한가운데서 갈채를 받으면서도, 상을 받을 때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신념 없이 자리를 옮겨다니며 싸움만 일삼는 정치인들이 조찬기도회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또한 세상의 유치한 원리인 철학과 하나님을 거절하는 과학의 속임수에 빠져 있으면서도 대학이나 교회, 사회 단체 등에서 지성인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들을 구원한 구주요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요 그들이 헌신해야 할 주님인가, 아니면 그들의 야망을 실현시켜 줄 하나의 수단인가?
사실상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은 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대중들을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교회를 다닌다 하더라도 대중들을 이끈다는 그 지도자적 위치는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세상의 교만한 지성인들의 모습이다. 차라리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가 쉽다. 그래서 죄인들은 고개를 숙여 기도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고개를 들고 기도하는 것이다(눅 18:9-14). 오늘날 지성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바리새인들과 같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되(마 15:14),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다(요 9:41). 이것은 비단 이어령 한 사람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이어령"들이 눈먼 군중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있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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