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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평화에 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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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올해는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선전 포고 없이 남한을 기습 침공한 6 ․ 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 되는 해이고, 1953년 7월 27일에 정전 협정을 맺은 지 67주년 되는 해이다. 이 협정은 종전이나 완전한 평화 협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전 이후 휴전 상태에 놓인 대한민국은 엄밀히 말해 여전히 전시 상황이다. 다만 전시에 해당하는 “비상사태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준전시에 해당하는 특수한 대치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는 전쟁이 언제든지 다시 발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런 상황에서 “촛불 정권”을 자처하며 등장한 문재인 정권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내세우며 유독 평화를 강조해 왔다. 이는 지난 3년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간한 <문재인 대통령 연설문집>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분량으로 보면 제1권은 1,030페이지이고, 제2권은 928페이지, 제3권은 1,060페이지에 달하는데, 그중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제1권에서는 678회, 제2권에서는 872회, 제3권에서는 699회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제1권부터 제3권까지 전체 3,018페이지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총 2,249회 사용되었으니 1.3페이지마다 한 번꼴로 사용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8년 한 해 동안만 해도 4월 27일, 5월 26일, 9월 18-20일에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이 중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표어가 “평화, 새로운 시작”이었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표어는 “평화, 새로운 미래”였을 정도로 정상회담 때마다 “한반도 평화”가 강조되었다.
그런가 하면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은 준전시 상황과 UN 및 미국 등의 북한을 향한 강도 높은 제재 속에서도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한 철도 연결 사업 등의 설익은 대북 정책을 국민들의 동의 없이 밀어붙였고, 그동안 자신들이 부르짖어 온 “평화”가 마치 이 땅에 찾아온 것처럼 설레발쳤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인가?
지난 6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 ․ 보좌관회의에서 “나와 김정은 위원장이 8천만 겨레 앞에서 했던 한반도 평화의 약속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일방적인 평화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은 문 대통령이 평화 의지를 강조했던 바로 그다음 날인 16일에, 2018년 4월 27일의 남북정상회담 및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합의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들의 혈세로 북한 개성시에 세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보란 듯이 폭파해 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평화만 부르짖던 무지몽매한 문 정권에 큰 타격과 굴욕감을 안긴 것이다. 이번 일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집단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및 여당의 정치인들은, 대통령이 여전히 평화 의지와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든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가 9 ․ 19군사합의 파기는 아니라든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대포로 폭파하지 않은 게 어디냐”라든지 등의 상식 이하의 발언들을 남발했다. 여전히 그들은 정신을 못 차린 채 평화를 위한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작정 평화만을 부르짖는 자들은 정치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지 못한 기독교계 안에서도 넘쳐 난다. 지난 6월 22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한국전쟁 11개 참전국의 교회협의회와 더불어 한반도 종전 선언과 평화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대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23일에는 국내 14개 개신교 교단들과 단체들이 참여하는 한국교회남북교류협력단이 “전쟁 없는 한반도와 남북 상생 평화의 길로 나아갑시다!”라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그보다 앞서서 17일에는 한국교회총연합회가 “북한의 연락사무소 폭파와 거친 언사가 장애이기는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배려하며 평화로 가는 대로를 닦자!”라는 성명서를 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는 감사 예배 자리에 참전군인 신도 74명을 초청해 “희생자들의 헌신을 후대가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면서 “더 이상 전쟁 없는 평화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보답이다.”라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김태영 목사 역시 “평화는 모든 사람이 원하지만 그 길은 멀고 험하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평화의 대로를 수축(修築)해야 한다. 강 대 강, 칼과 칼은 자멸의 길이기에 교회는 모든 역량을 다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상생하는 평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온통 평화만을 부르짖는 이 땅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들이 화평을 부르짖었던 예레미야 시대의 모습에 잘 비견된다.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에 빠졌고 선지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거짓되이 행하기 때문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 말하기를 “화평이라, 화평이라.” 하나 거기에는 화평이 없도다』(렘 6:13,14). 『그때에 내가 말씀드렸도다. 아,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할 것이요, 기근도 겪지 아니할 것이라. 대신 내가 너희에게 이곳에서 확고한 화평을 주리라.” 하나이다』(렘 14:13).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외쳤던 평화는 오지 않았다. 화평을 부르짖던 그들에게는 오히려 왕국의 “멸망”이 도래했으니, B.C. 586년 바빌론에 의해 남왕국 유다가 완전히 함락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평화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평화를 갈망하고 있고 그 갈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는데, 결국 그들 앞에는 “거짓 평화”를 가져올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한 사람”(계 13:18)으로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로 불린다(살후 2:3). 그런 그가 세상 전면에 등장하는 날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평화의 조약을 맺을 것인데, 그때 사람들은 그토록 염원해 왔던 평화가 이 땅에 임했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적그리스도가 가져온 평화는 거짓 평화로서 고작 3년 반의 짧은 기간에만 한정되는 일시적인 평화가 될 것이다. 오히려 적그리스도는 그 거짓 평화를 가지고 멸망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많은 것들을 멸하게 된다.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가 자기 손에 기술을 늘려서 자기 마음속에 자신을 높이고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 그는 또한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를 대적하여 설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부서지게 되리라』(단 8:25). 『또 그의 자리에 한 비열한 사람이 서리니 사람들은 그에게 왕국의 명예를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는 평화롭게 와서 술책으로 그 왕국을 얻을 것이며』(단 11:21).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더라』(단 9:27).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사망과 더불어 맺은 너희의 언약이 무효화되며 지옥과 한 너희의 합의가 서지 못하리니 넘치는 재앙이 지나가면 너희가 그것에 짓밟힘을 당하리라.』(사 28:18)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제로 이스라엘이 적그리스도와 맺은 “평화의 언약”은 “사망과 더불어 맺은 언약”이 될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지난 6천 년간의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해 준다. 진정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이다(레 26:6, 시 29:11, 사 26:12, 학 2:9 등). 다만 평화가 이 땅에 임하기에 앞서서 “의”가 먼저 도래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공의가 광야에 거하며 의가 비옥한 들에 남겠고 의의 행위는 화평이 되며 의의 효과는 영원한 평안과 보장이 되고 내 백성은 화평한 처소와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거하리라』(사 32:16-18). 히브리서 7:1,2의 말씀 역시 이러한 진리를 잘 보여 준다.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여러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그를 축복해 주었던 이라. 아브라함도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으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 곧 화평의 왕이라.』 멜키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순서상 “의의 왕”이 먼저이고 “화평의 왕”은 그다음임을 잘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가지고 오셨을 때도 화평의 나라인 천국보다 의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마 6:33).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내가 땅 위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의 없이 화평만을 가지고 오신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재림 때도, 화평의 통치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대적했던 자들을 멸하시고 죄들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심으로써 의를 먼저 이루신 다음에(사 2:4) 예루살렘을 그 이름에 걸맞게 화평의 도시로 만드실 것이다(사 9:6,7). 그때서야 비로소 지상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것인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시 122:6). 또한 이것은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반면에 정치인들과 기독교계가 부르짖는 것처럼 한반도의 평화나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7: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배제한 채 평화만 부르짖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가져올 거짓 평화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의가 없는 평화를 고대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가 가지고 올 평화에 열광하다가 결국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멸망으로 들어갈 것이다.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 하지만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과 평화를 운운하면서 합의하고 협약을 맺는 것은 한반도 평화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실질적인 대사관으로 여겨졌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외교 공관 폭파에 준하는 만행이나 일삼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평화와 인내를 지껄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배제한 채 인간들끼리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인본주의적인 평화는 결과적으로 멸망만 가져올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야 비로소 이룩될 수 있다. 따라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이 평화를 부르짖지만, 그들에게는 화평이 없다.”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말씀에 유의하면서(사 48:22; 57:21), 평화만 부르짖는 자들의 망상에 빠지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실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고 소망해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