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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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가 없는 것을 보시고 불쾌히 여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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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8월호>

사람들은 자기들의 출생에 관하여 애착을 느낄 뿐 아니라, 신비로운 경이를 부여하기도 한다. 한 생명의 탄생은 그럴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가 생성되더니, 성장하며 체질이 달라지고 표현이 달라지고 사고가 달라지며 자기보존, 자기번식, 자기만족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생의 목표를 세우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잘 판단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자기의 계획대로 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기 판단 착오와 협력자들이 만든 실수, 교묘히 머리를 쓴 불량한 인간들의 속임수, 갑작스런 사고와 재앙, 사업에 필요한 자금 문제, 때로는 국가 시책의 문제, 그 외에도 인간적인 갈등 등이 복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죄의 세상은 바르게 일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양심을 가지고 공의와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없도록 태클을 건다. 악의 씨들은 각종 마피아이다. 고리대부업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속이려고 달려드는 거짓말쟁이들, 상가 건물주들,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사기꾼들, 다단계 사기꾼들, 보이스피싱 사기꾼들까지, 그들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해충처럼 숨어서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해친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정부의 시책들, 공무원들의 비리, 기업주들 위에 군림하는 노조, 학생들에게 북한을 찬양하는 전교조 교사들, 또 참된 지식을 가르쳐야 함에도 학생들에게 진화론으로 세뇌시키며 그것을 참교육이라 하는 자들도 있다. 종교들은 차제에 제쳐 두고라도 교회들은 어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데간데없고 거짓 교리들을 그들 교단 식성에 맞는 대로 가르치려 들기에 거짓말투성이다. 심지어 성경에 없는 것인데도 그들 교회 강단에서는 물론이요, 라디오와 TV 방송에까지 나와 함부로 떠들며 선교라고 이름 붙이고 ARS 전화번호로 돈 내달라고 사기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성경을 모르는 교단의 종들이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혼란시키게 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의 참뜻을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가르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명철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하는 일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혼란시키는 마귀의 일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 1:20,21).
그리스도인은 교인이 아니고, 또 기독교란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마귀에게 점유되었던 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편으로 이겨오게 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을 기독교인 정도로 아는 사람은 아직 진리의 냄새도 못 맡은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이 목사를 하고 있다. 이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다. 왜 그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가? 구령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도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십자군 전쟁(1096-1272)을 일으켰다. 교황이 자기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차지하려 하면서 모슬렘들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자며 시작한 전쟁이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슬렘과 했던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의 교황 우르바노 2세(Pope Urbano II, 1088-1099)는 예루살렘 성지순례 의식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구원과 결부시켰다. 이는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이 지하드에서 싸우다 죽으면 즉시 낙원으로 가서 쾌락을 만끽한다고 속였던 것과 흡사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약 9년이 되었을 때 시리아 안티옥에서 처음으로 쓰였다(행 11:26).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그 무렵부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하고 생활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대에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나라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를 갖추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보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진대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의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라. 화를 내되 죄는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17-27).
그리스도인은 교인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는 성경대로 이러한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과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너희의 생활방식에 탐욕이 없도록 하고 현재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이는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
그리스도인(성도)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특히 주님께서 어떤 지역에 교회를 세우실 계획을 가지셨을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세워지지 않고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 세워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없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다녀도 그리스도인처럼 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콘스탄틴이 베드로 위에 세웠다는 교회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무관한 교회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 안에서 계획되어 주님 자신의 몸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근거 위에 주님 자신의 반석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고전 10:4).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웠다는 로마카톨릭과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카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 했지만, 그것은 성경에 무지한 이교도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기극이다. 베드로는 로마에 간 적도 없었고 교황은 독신이어야 하지만 베드로는 장모가 있었다(마 8:14). 『우리에게 다른 사도들이나 주의 형제들이나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동반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5)
개신 교회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얼마간은 카톨릭에 항거했다고 해서 자신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
tants)라고 이름 붙였지만, 믿음은 어떤 구호나 캠페인이나 선동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거듭난 후 성경을 믿어 자신의 생활에 적용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목사나 교사나 선교사나 부흥사라는 직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 후 타락한 프로테스탄트들이 바른 성경을 배격하자 어떻게 변모되었던가? 성경이 필요 없는 교인들로 변모되었다. 쭉정이가 밀에게 무엇이겠는가?(렘 23:28)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려 하실 때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불러 일하시겠는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결행하신 것이 기독교란 종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님은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다양하고 무오한 증거로 증명해 주셨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 위에 주님이 왕국을 세워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통치하시는 것이다(계 1:5,6). 모든 세계 정부들은 성경에서 벤치마킹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왕국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 형태가 아니고, 왕을 위한, 왕에 의한, 왕의 정부의 형태이다. 물론 의로 심판하시고 화평을 유지하시는 왕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멜키세덱과 같은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화평의 왕이시다(히 7:2).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시고 약속하신 진리를 믿을 수가 없기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 같은 인간들에게 거짓말하신 것으로 안다. 인간들은 70-80년의 수명을 받아 다양한 형태로 죽어 가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을 수 없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아무 교회나 하나 정해 놓고 아무 성경이나 하나 골라 자기 멋대로 믿는 체하다가 죽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인간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생활 방식이라고 단정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을 설득시킬 다른 방법이 있는가 보라! 하나님은 공의와 진리를 실행하시는 분이신데 인간들이 그 점을 믿지 않기에 그들을 설득시킬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매 시대의 문제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그 누구라도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는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 2:14,15). 하지만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무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어떤 능력도 없게 된다.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그 일 때문에 죄가 그들 안에 들어가 인류를 죄의 형벌과 지옥의 심판을 받게 하셨는데, 그 죄에 대한 벌을 대속해 주시려고 하나뿐인 아들을 죄값으로 내어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을 기록하셨는가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해 버리면서도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
1. 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주님을 믿는 것인가? 『주를 거역하여 범죄하고 거짓말하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억압과 반역을 말하고 마음으로부터 거짓된 말들을 품으며 또 말함이니이다』(사 59:13).
2. 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의가 뒤로 돌아서고 정의가 멀리 섰나니 이는 진리가 길에 쓰러졌고 공평이 들어가지 못함이라』(사 59:14). 그들은 진리를 땅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공의가 뒤로 돌아섰고 정의는 더 멀리 섰으며 공평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성경 말씀에 순종했는지 알 수 있겠는가? 교인 수가 많으면 좋은 교회인가? 『정녕, 진리가 쇠하니 악에서 떠나는 자가 스스로 약탈품이 되는도다』(사 59:15). 그런 세태에서 성경대로 정직하게 주님을 섬기는 무리들이 오히려 마귀의 약탈품이 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단이 되셨고(행 24:5), 신약 교회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믿고 섬겼던 사도 바울 역시도 이단이 되었다(행 24:14).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킹제임스성경>으로 바른 교리를 실행하고 거리에서 설교하고 구령하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부른다. 『주께서 그것을 보셨으며 공의가 없는 것을 주께서 불쾌히 여기셨도다.』(사 59:15)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원하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믿는 체하고 자기가 원하는 교회에 다니는 일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 일인가? 그런 행위는 성령의 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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