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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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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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4월호>

무엇을 하든지 목적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방향을 전환하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을 바꾸게 되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은 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한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후회스럽고 낭비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살펴보고 그 방향을 잘 정립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믿음의 길을 후회 없이 달려가길 바란다.

먼저, 성도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살펴보자. 바울은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헐벗고 굶주렸으며 온갖 박해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조차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열매로 많은 곳에 지역 교회들이 세워졌다.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바울은 계속해서 날마다 밀려드는 교회에 대한 염려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격려하고 책망하기도 하며 그들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바울은 그야말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애쓰고 수고한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나의 고난들을 기뻐하고 또 그리스도가 고통받으신 이후에 있는 것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엡 5:25) 자신을 주셨음을 알았기에,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내가 너희를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지만 나는 너희를 위하여 아주 기꺼이 쓰고 내 자신마저도 쓰리라.』고 고백하면서(고후 12:15) 그들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를 위하여 살았다면 모든 성도들 또한 그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왜 교회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주를 위하여’ 살아야지!”하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 중에는 아무도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신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의 것이라』(롬 14:7,8).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그런데 이렇게 고백한 바울 자신은 정작 “교회를 위하여” 살았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시대에는 누구라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면 반드시 교회를 생각해야만 한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며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요 21:15-17).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내 양들을 먹이라.”고 하셨다. 즉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교회를 사랑하라. 그들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눈으로 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요일 4:20)는 말씀 속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적용해 보면 ‘교회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바울이다. 그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가 교회를 박해하려고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고 하셨는데, 이는 교회를 박해하는 일이 곧 주님을 박해하는 일임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 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바울은 이 같은 진리를 배웠기에 주의 몸인 성도들이 모이는 주의 만찬에 죄를 가지고 참여했을 때 주님의 몸에 죄를 짓는 것이라며 강하게 책망했다(고전 11:27).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이기 때문에 성도 개개인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위하여 섬겨야 함을 알 수 있다. 은사는 교회가 유익을 얻게 하여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함께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모든 것이 내게 합법적이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합법적이나 다 세워 주는 것이 아니니라』(고전 10:23). 따라서 은사는 반드시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만 한다.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나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우느니라』(고전 14:4). 『너희도 마찬가지라. 너희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한 이상 교회를 세우는 데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형제들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희가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각자에게 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으니 모든 것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전 8:1). 이 말씀들에서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는 일이 곧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는 자신을 세우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루시퍼는 이사야 14장에서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3,14)고 외쳤는데, “내가... 하리라(I will)”를 무려 다섯 번이나 언급하면서 자신을 높이고자 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자기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를 따르는 것인가? 주님이 아니라 마귀를 따르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성도들에게나 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일한 적은 없었는가! 특송을 부를 때 자신의 노래 솜씨를 뽐내기 위해서 하지는 않았는가! 구령을 할 때 자신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구령했다고 자랑하기 위해 하지는 않았는가! 만일 이 같은 동기로 했다면 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작은 섬김이나 봉사, 구제, 기도가 다른 연약한 성도의 믿음을 세워 주고, 그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면 그는 결코 자기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 10:42).


많은 이들이 구원받은 후 여러 이유로 교회에 속하지도 않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기는 하나 교회의 모임이나 교회가 하는 일에 관심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성도들을 무시하면서 자기는 주님을 무시한 적이 없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은 주님을 위해 사노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마귀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교회를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와 상관없이 혼자서 “저는 주님께 기도해요. 저는 매일 말씀을 봐요. 저는 주님을 사랑해요.”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배제하고서는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살 수가 없다. 보이는 교회를 위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 것처럼 모순된 일도 없는 것이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바울도 교회를 위하여 살면서 교회를 위하여 고통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처럼 교회를 위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실제적인 삶의 목적 역시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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