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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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변질시킨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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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2월호>

교회가 전념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은 첫째,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구령하는 것이고, 둘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며,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됨으로써 구주를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목적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임을 지역 교회에 맡기셨고, 지역 교회는 이 사명을 성경적인 방법으로 신실하게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은 이처럼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사명”은 저버린 채,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에만 전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호감을 사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사고자 노력하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권리보다는 인권을 더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인 교회들인 것이다.

최근 이 세상적인 교회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진 기독교가 어떻게 하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지,” 또 “이를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지”에 관하여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지난 11월 2일부터 4일까지, 한국 교회로서는 처음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컨퍼런스”가 개최되기까지 했는데, 본 토론회 내용의 주요 골자는 “교회들이 지역사회의 문제와 현실을 직시하고 섬김과 나눔의 실천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퇴색시킨 토론회는 없었다. 그들의 주장처럼 교회가 지역사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방법들을 강구해야만 한다면, 교회는 굳이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라면 현재의 정부기관이나 공공단체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는 것이다.

우선 토론 참가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과 소통하려는 데 있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공동대표이자 본 컨퍼런스의 주 강사였던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는, 사전 인터뷰에서 “교회와 세상 간에 소통의 부재”를 문제로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이웃에 베푸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사회와 지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먼저 물으라.” 또 강조하기를, “지금 지역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묻고 이를 함께 이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목사가 일차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세상과 “소통”하는 문제였다. 그는 교회가 사회적인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니까 사회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도 세상이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성경은 세상에 대해 “악하다”고 말씀한다(갈 1:4). 이 세상 신도 악하고(고후 4:4),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악하다고 말씀한다(눅 11:13, 막 7:21, 엡 2:1-3). 그뿐 아니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 이는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요 15:19). 따라서 세상과 소통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그들의 죄와 심판, 지옥의 형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및 성경적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동원 목사가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목적은 교회의 진정한 사명, 곧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세상일”을 하기 위해, 말하자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되는지를 세상을 향해, 지역사회를 향해 물으라고 독려하고 있다.
어떤 문제이든 주님께 묻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든지(욥 8:8) 짐승들이나 공중의 새들에게도 물을 수가 있다(욥 12:7). 그러나 “세상”에게 어떤 것을 물으라는 권면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교회가 해야 할 책임에 관하여 성경적인 잣대를 접어두고 세상에게 가서 묻는 것만큼 수치스런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한 수치스런 소통의 결과로 이동원 목사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답을 얻었는가? 이에 대해 그는 “복음 전파와 이웃 사랑의 사명의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면서 이웃사랑의 관점이 교회 중심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에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방식”이란,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었다. 이 비정상적인 역전현상은 교회가 해야 할 사명에 있어서 균형이 아닌 불균형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역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역이 결코 우선시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역이란,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목사는 이 첫 번째 사역은 제쳐둔 채, 용인시와 논의하여 노인주간보호센터를 설립운영하고, 장애인과 함께하는 마라톤 대회, 저소득 가정 주거환경 개선 작업, 의료비 지원 등과 같은 사회적 책임만을 다했던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이웃사랑”은 사회적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역, 곧 복음과 진리의 전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을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거나 “복음의 본질”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채택된 ‘2009 교회의 사회적 책임 선언문’에 따르면, “우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복음의 본질임을 고백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고백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도 아니고 복음의 본질도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요 13:34)과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고전 15:1-4)을 철저히 왜곡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소위 사회적 책임이란, 사회와 더불어 사는 한 구성원으로서 지역사회에서 공헌하고 섬기는 역할을 다해야 하는 책임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신뢰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교회들이 이것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진정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진리를 전파하거나 실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고 있다(빌 3:18). 그들은 항상 땅의 것을 생각함으로써(빌 3:19) 어떻게 하면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사실이 이러한데 어찌 “사회적 책임”을 예수님께서 주신 명령이요, 복음의 본질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들은 세상이 원하는 교회, 지역사회가 신뢰하고 인정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신뢰보다는 사람들의 신뢰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원 목사는 말한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가 주 되신 것을 전하기 위해 사람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종노릇뿐 아니라 사람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제 사역 후반기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메시지기도 합니다.”
그가 자신의 “사역 후반기”에 하고자 하는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교회의 임무로 여겼고, 재림 때 주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발견되고자 하며 교회 내의 악을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휴거를 기다리고, 카톨릭의 누룩을 제거하는 치료책으로 재림을 기다리던 그 교회를 다루고 있다.
일은 “사회 속 교회의 역할,” 곧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가 주이신 것과 우리 자신이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인 것을 전파하노라.』(고후 4:5)는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한 데서 나온 잘못된 결심에 불과하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인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지,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지역사회를 섬기는 종이 되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닌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람”이 결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그런 어리석은 결심을 한 이목사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 기록하신 또 다른 서신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신다.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랴? 아니면 하나님께 사랴? 아니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겠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사회적 책임으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변질시키는 그 어느 누구라도 그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의 종”이라는 책망을 결코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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