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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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으로 신약의 도를 강력히 전파한 아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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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1월호>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키"는 이렇게 끝이 난다. 『너희는 내가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호렙에서 규례들과 명령들로 그에게 명했던 내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말 4:4-6). 율법의 경륜에 속하는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첫째, "주의 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라는 것이었고, 둘째,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어 그 백성을 바로잡게 하시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주의 크고 무서운 날』, 곧 재림 전에 있을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을(계 11:1-13) 예언한 것인데, 이것은 지상 재림 전에 있을 7년 대환란 때 모세의 율법이 다시 효력을 발휘하여 구원의 수단이 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자 그 용이 여인에게 분노하여 여인의 씨 가운데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행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믿음] 자들 과 싸우려고 나가더라』(계 12:17, cf. 계 14:12).

대환란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런 다음 율법을 그 시대 끝까지 인내로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기간이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대환란을 예언하시며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3,1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끝"이 바로 "대환란이라는 특정 시대의 끝"인 것이다. 초림 때 거부당한 천국이 다시 도래하기 위해서는 왕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데, 그 시기의 구원은 믿음과 행위의 결합으로 이뤄지며,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행위가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구약의 마지막 책에서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고 신약의 마지막 책에서도 동일한 율법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신구약 두 시대의 구원 방법에 공히 해당된다는 뜻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시대와 대환란 사이에 끼어 있는 "교회 시대"를 망각하면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시대마다 구원의 경륜이 다른 법인데, 교회가 휴거된 후에 대환란이 펼쳐진다는 점을 모르는 자들이 신구약성경에 편재된 "모든 진리"를 교회 시대로 가져와, 이 은혜의 시대에 행위 구원으로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됨을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갈 1:6-8).

한국 교회가 믿음만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죄에 대해 느슨해졌다는 지적이 간간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들이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 것인가? 목사들의 비리가 세상 언론에 오르내리면 교회들은 교인들의 이탈로 들썩대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곤 하는데, 그럴 때면 "행위 구원"을 들고 나와 강조하는 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렇게 함부로 죄를 짓는 게 아니냐!"와 같은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나오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강조하는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닌데, 그들이 마치 바른 믿음을 전파한 것처럼 착오를 일으킨다. 그 결과 정상적인 믿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공격을 받고, 비정상이 정상을 억누르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난립하면서 "야고보서 2:24"을 꺼내어 보란 듯이 흔들어 대는 것이다. 『이제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이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야고보는 바울에게 계시된 신약의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한 채 헤롯의 칼에 죽었다(행 12:1,2). 따라서 그가 기록한 서신은 다분히 율법적일 수밖에 없으며, 구원의 예로 든 것 역시 구약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보냈을 때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25) 창녀 라합은 두 정탐꾼이 오기 전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듣자마자 우리의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인하여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심이라』(수 2:11). 이 믿음에 더하여 두 정탐꾼을 숨겨 주는 "행위"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았던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믿음과 행위가 결합된 구원의 교리이다. 이렇듯 야고보서에는 "환란 시대의 교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를 무턱대고 신약 교회 시대에 적용했다가는 은혜의 복음을 변개시키는 저주받을 일을 저지르게 된다. 교회 시대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결코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엡 2:8,9).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뒤에 그 결과로 따라와야 할 "선한 행위"이다(엡 2:10). 그래서 앞으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침례를 받는 것이다(벧전 3:21). 물 침례는 구원의 모형이며, 이미 구원받은 성도의 구원 간증이다. 침례의 행위는 결코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이은혜의 시대에 율법을 지켜 행위로 온전케 되려는 자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로 가야 하는데, 바울은 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고(갈 3:1)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을 향해 강력하게 저주했다. 『율법의 행위로 난 자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 있느니라. 기록되기를 "행하도록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해서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저주를 받느니라."고 하였음이라.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음이니라』(갈 3:10,11).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유대인 사도들도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고백했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했다는 것이다(갈 2:16).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19-31의 "이스마엘과 이삭의 비유"를 통해 구약과 신약, 이 두 언약을 비교 대조함으로써(24절), 서신을 기록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제시했다.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의 아들인데, 하갈은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비유된다(24절). 즉 하갈을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아 율법의 종노릇을 시작하게 된 시내 산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율법에 속박된 당대의 예루살렘에도 비유하는데(25절), 말하자면 그녀는 언약으로 치면 "구약"인 것이다. 그런 여인의 아들이라면 이스마엘은 여종의 자녀가 되기에 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예표하게 된다.

반면 사라는 자유로운 여자로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바울은 셋째 하늘의 예루살렘이 우리 신약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어머니라고 했는데(26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으셨고, 또한 셋째 하늘에서 오신 분이기에 우리의 영적인 출처가 셋째 하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셋째 하늘의 예루살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낳은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비유되는 사라는 언약으로 치면 "신약"이다. 그녀가 낳은 이삭은 신약을 통해서 나오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예표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에 육신을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하였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도다.』(29절)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했던 것처럼, "이스마엘이 예표하는 자들"이 "이삭이 예표하는 자들"을 박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율법의 행위로 온전케 되려는 무리가 은혜로 온전케 된 성도들을 박해한다는 말이다. 구약으로 신약을 박해한 것이다.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공격한 것과 같은(골 2:16,17) 매우 해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도 율법의 행위로 신약의 진리를 훼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구원을 전파하는 성도들을 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들이 구약이라도 제대로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계시를 사모했더라면 바른 믿음을 박해하지는 않았으리라. 하나님과 그분의 성경에 대한 자세가 잘못되어 있기에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리를 배척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와는 다르게 사도행전 18장에는 성경에 밝은 유대인 한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아폴로"이다. 아폴로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언변이 유창하고 구약성경에 밝았으며(24절), 그 성경으로 주의 도를 배워 주의 일들을 정확하게 말했다(25절). 이런 아폴로가 에베소에 있는 한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형제들에게로 데려가 『하나님의 도를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26절). 아폴로가 이전에 누구에게서 주의 도를 배웠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배웠거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에 회심한 구약을 믿는 어느 유대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이 그런 아폴로에게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준 하나님의 도는 사도 바울을 통해 계시된 "신약"이었다.

구약만을 알았고 구약만으로 주의 도를 증거했던 아폴로에게 신약이 계시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후 아폴로가 아카야를 지나고자 하므로 형제들이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영접하라고 부탁하니라. 그가 도착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니 이는 그가 성경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증거함으로, 유대인들을 강력하게 논박함이더라』(행 18:27,28). 구약성경만으로 주의 도를 깨우쳤던 아폴로가 신약의 향상된 진리를 깨닫게 되자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사람들에게』, 곧 신약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는 인물로 바뀐 것이다. 그가 지나가고자 했던 아카야는 "고린도 교회"가 있던 지역으로, 바울은 그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와 아폴로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게 하셨느니라』(고전 3:6). 고린도 교회를 복음으로 개척한 사람은 바울이었고, 그 교회에서 주로 말씀을 가르친 사람은 아폴로였다는 것이다. 아폴로는 그가 더 정확하게 깨닫게 된 하나님의 도, 곧 신약으로 유대인들을 꼼짝 못하게 하여 신약 교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 은혜의 시대에 행위 구원을 가르쳐서 십자가의 원수들로 행하는 자들은 아폴로를 기억해야 한다. 아폴로는 율법을 통해 주의 도를 정확히 알았고, "향상된 계시"를 깨달은 뒤로는 신약의 진리를 강력하게 전파했다. 거짓 목사들의 죄를 빌미로 율법적인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헛되게 만드는 마귀의 일이다. 율법은 행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는 우리를 신약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주의 도가 계시되어 있는데, 구약을 통해 그 도를 가르쳤던 아폴로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지도교사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려 함이라』(갈 3:2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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