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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위한 회개, 교제를 위한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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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2월호>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회개”에서 나온다. 성경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회개”이다. 시대마다 선포되는 말씀의 핵심은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라는 메시지였고, 광야에서 울려 퍼진 침례인 요한의 음성 역시 회개하라는 외침이었다(마 3:2).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신 설교의 첫마디도 “회개하라.”(마 4:17)였다. 사도들도 회개를 외쳤고, 바울 역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행 26:20) 전파했다. 마틴 루터, 사보나롤라, 존 낙스, 찰스 피니 등 부흥을 주도했던 설교자들의 주된 메시지도 “회개하라.”였다. 회개 없는 구원, 회개 없는 부흥, 회개 없는 성숙한 삶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회개”(repentance)는 생각과 마음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인 창세기 6:6에서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으니[repented]』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에서 돌이키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변화,” 즉 “마음을 바꾸신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하신 것과 관련하여 마음을 바꾸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결심”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복음에 관한 진리를 알고,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의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신뢰하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회개”에는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포함된다. 곧 “죄에 대한 인식”(지적 요소),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슬픔”(감정적 요소), “죄를 버리겠다는 결심”(의지적 요소)이 그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회개의 교리”를 잘못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일례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범해 왔던 개별적인 죄들을 모두 낱낱이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모든 죄로부터 단절되어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데,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그는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즉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특정한 죄들을 저지르는 것을 끊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죄 없는 삶” 자체가 “구원의 증거”가 되어 버린다.
과연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실까? 고린도전서 5장에는 아주 사악한 죄를 저지른 한 성도가 나오는데, 그 죄는 교회 안에 공개적으로 다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라고 말함으로써, 악행을 저지른 그 성도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분명하게 적시했다.
특히 바울은 구원받은 이후 전 생애 동안 죄와 투쟁하며 살았다. 어떤 때는 죄에 패배한 적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므로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3-25). 어떤 성도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죄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된다면, 우리는 이 구절들을 기록한 바울조차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옳을 것이다.
물론 회개는 구원의 한 부분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이 자신의 상태에 관해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말씀에 대해 동의하고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바울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했다. 『유대인과 또한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repentance]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을 증거하였노라』(행 20:21). 이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 곧 『생명에 이르는 회개』(행 11:18)로서 지금까지 지어 왔던 죄들을 단절하는 것과 무관하다. 이때의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자신이 의롭지 않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성령님께서는 그에게 역사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려 주신다. 『그분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나의 아버지께 가므로 너희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요 16:8-11).
개별적인 죄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은 구원받은 다음에 할 일이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개별적인 죄들을 다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었던 것과 동일한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다. 즉 “영적 바리새인들”인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과 같은 삶(금주, 금연, 음행하지 않는 것,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지키는 것 등)을 살지 않으면 결코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회칠한 무덤들과 같음이라. 그것들은 실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도다.』(마 23:27)라고 경고하셨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지금까지 범해 왔던 죄들을 단절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 구원을 위한 회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에 대한 회개만 필요하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회개인 『생명에 이르는 회개』(행 11:18)는 인생에서 단 한 번으로 충분하다. 어떤 성도가 단지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죄 문제와 심판과 지옥을 다루지 않은 채, 번영 신학과 같은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복음 전하는 것을 벌충한다는 차원에서 구원받는 믿음에 무언가를 덧붙임으로써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한 번 마음으로 믿었다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 외에 다른 요소들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 구원받는 것은 결코 행위가 요구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더냐?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냐?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해지려 하느냐?』(갈 3:2,3)
또한 성경은 “교제를 위한 회개”에 대해서도 말씀한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는 다른 관점에서, 구원받은 죄인이 매일 죄들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진리이다. 곧 “교제를 위한 회개”가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에 머물러 있으려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회개이다. “죄의 자백과 회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일 실천해야 하는 필수 항목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8,9). 이처럼 “회개”는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을 때뿐만 아니라 거듭난 이후에도 구원받은 성도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매일매일의 삶에서 죄들을 자백하고 회개할 때, 그 결과 의와 화평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 곧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 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탕자”가 돌이켜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동안 탐닉했던 더러운 죄들을 버려야 했다.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거짓 회개”에 속게 된다. 죄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죄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이 없는 회개는, 아무리 눈물과 콧물을 흘렸다 해도 “감정의 배설”만 있는 거짓 회개로서 결국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이에 대해 찰스 스펄전은 “회개할 필요가 있는 회개도 있다.”라고 말했다. 회개는 잘못된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나 그저 하나님께 잘못을 사과하는 행위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참된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낳는바, 곧 죄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그 죄로부터 돌이킬 때 주님께서는 그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 죄의 용서함을 받는 복보다 더 큰 복은 없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죄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다. “참된 회개”는 죄악으로 점철된 과거에서 돌아서게 할 뿐 아니라, 육신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함으로써 삶의 계획과 가치관과 행동이 변하게 만든다. 이런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
회개는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회개를 통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듯이,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도 회개를 통해 가능하다. 사탄은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지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삶도 살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대적 사탄이 구원을 빼앗아 갈 수 없지만, 성별된 삶을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을 방해할 수는 있다. “구원받은 죄인”은 “회개하는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과 삶을 돌아보고 드러난 죄에 대해 자백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 속에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