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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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 그들은 무엇을 모르는가 1-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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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8월호>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일곱 교회 시대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미지근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온갖 종류의 교회가 다양한 형태로 모여서 제각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과연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이생뿐만 아니라 이후의 영원 세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필자는 구원받은 후 25년 동안 구원파 교회에 다니다가 2004년 12월에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최종권위로 삼고 있는 천안성경침례교회로 성별하여 주님을 섬기고 있다. 돌이켜보면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와 바른 교회를 알지 못하였기에 너무나 많은 비성경적인 실행 가운데서 시간을 허비했지만 이제라도 참된 진리에 눈떠서 하나님의 말씀인 바른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주님의 자애로운 손길에 감사드릴 따름이다.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는 120년에, 5만여 개의 교회와 1,200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한다. 교회사에서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듯이 교회가 급격히 양적으로 팽창하면 질적으로는 타락하여 참된 복음은 사라지고 외형만 남게 된다.
1960년대 초반에 이 땅에 등장한 구원파도 당시 제도권 교회의 한국식 기독교에 염증을 느끼던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파식 구원을 전파하는 교회로서 처음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사탄은 그곳에도 있었다. 구원을 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옳을 것이라는 사상이 지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서히 구원파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신약 교회의 모범대로 실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한국 땅에 참된 교회는 구원파뿐이라는 자만심과 함께 이제는 점점 더 비성경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구원파식 누룩을 만들어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기에, 이 지면을 통하여 그 실태를 점검해 보고 바른 성경 말씀에 입각하여 바로잡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루속히 구원파 교회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라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속에 있는 무지하고 순수한 성도들이 더 이상 사탄의 연막에 속지 말고 속히 그 수렁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무릎꿇고 엎드려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구원파는 크게 3개의 계열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1960년대 초에 대구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시작된 권신찬-유병언 계열의 기독교복음침례회(처음에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로 칭하다가 후에 변경, 이하 구원파라 약칭함)이고, 다른 하나는 1983년에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 떨어져 나와서 독자적인 노선을 가고 있는 이요한 계열의 대한예수교침례회(생명의말씀 선교회)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복음침례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발한 박옥수 계열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 선교회)이다. 필자는 이들 중 가장 먼저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신약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세가 가장 빈약해진 권신찬-유병언 계열의 구원파 교회에 출석하였기에 이하의 글은 필자가 몸담았던 구원파의 교리와 실행을 중심으로 쓰게 됨을 밝혀 둔다.

II. 구원파, 그들은 과연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첫째, 그들은 참된 경배(예배)를 전혀 모른다.
그들의 예배 형식은 특이하다. 그 동안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오던 권신찬 목사의 사망(1996년)과 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회사의 부도(1997년)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성경상의 근거가 없는 주말교회라는 미명하에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세계선교센터에 모여서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다. 그날 설교된 내용은 DVD나 VIDEO 테이프로 제작되어 전국 및 해외의 지교회에 배포되면 한 주 후에는 각 지교회에서 대부분 그냥 예배당 맨바닥에 앉아 시청한다. 형식이 전혀 없이 진행되는 각 지교회의 예배는 대부분 장시간의 설교를 듣는 시간에 할애되며, 기도의 순서와 예물 드리는 것과 초청 및 헌신의 절차들이 모두 빠져 있다.
성경에는 영과 진리로 경배(개역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로 변개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나(요 4:24), 그들의 예배에서 경건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러한 형식은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자유로움을 넘어 방종적이며, 때로는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므로 주의 첫날에 경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면 그러한 형태의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경배의 참뜻을 알지 못하며, 경배라는 말을 사용조차 않고 하나님께서 어떤 경배를 원하시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극단적인 무형식주의자들(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신앙생활 전체가 예배이기에 별다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모든 경건한 모습은 다 없애 버리고 자유분방한 상태에서 모임을 갖는다. 분명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에로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갈 5:13)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명령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들이면서 종의 위치에 있기도 하다. 따라서 종은 주인을 섬기고 경배하고 그분을 자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드높여야 할 위치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 예배에 직접 참여하고 계신다면 그들이 그처럼 거드름피울 수 있겠는가? 소위 지도자나 설교자라고 하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가야 할 경배를 성도들로부터 도둑질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삼하 15:1-6). 우리의 왕이신 주님은 밖에 세워 두고 사람이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최종권위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상태이다.
그들은 <개역성경>으로도 구원받고 신앙생활하는 데 별 지장이 없다고 말한다. 바른 성경은 참고로 사용하면 된다고 한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더 잘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다 똑같다고 한다. 그래서 영적 조명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의 최종권위는 무엇이며, 잣대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혼돈 그 자체가 아닌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축자적인 영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듯이 진리는 하나뿐이지 않은가?
<개역성경>에서 세례라고 표기된 것을 침례로 읽기도 하며 또 침례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성경에 “없음”이라고 된 구절이 13구절이나 있는데도 별 감각이 없다(마 17:21; 18:11; 23:14, 막 9:44,46; 11:26; 15:28, 눅 17:36; 23:17, 행 8:37; 15:34; 28:29, 롬 16:24; 요일 5:7). 신약성경에만도 약 2,200단어가 사탄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원문비평학이 무엇인지,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딤후3:16,17), 섭리로 보존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시 12:6,7) 전혀 모르며, 관심조차도 없다. 결국 최종권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탄이 그들의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또한, 모든 성경은 제일 먼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역성경>으로는 성경의 짝을 맞출 수 없기에 결국 영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을 하고 개인의 체험적 깨달음을 중시한다. 안식을 깨달았느니, 육신을 벗었느니, 자아가 죽었느니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심오한 진리라도 깨달은 것처럼 영적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성경 말씀이 영적인 의미로 다양하게 해석되고 짜맞추듯이 이현령비현령식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기록하셨으나 사람들이 수많은 다른 성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위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가짜 성서요, 결국 사탄의 모조품 성서인 것이다. 현재 우리 민족에게 섭리로 보존하여 주신 성경은 오직 <한글킹제임스성경>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심조차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구원파, 그들은 과연 어디에 근거해서 일하고 사역하는 것인가? 그 사역이 성경적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임을 등지고 떠나갔는가?

셋째, 그들은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능력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 수많은 성경 구절, 특히 신약 성도의 믿음과 실행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바울 서신에 수없이 기도에 대한 명령과 권면이 등장하고, 교회사에서도 신실했던 주님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역군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님 앞에 무릎꿇는 자세가 없다. 제도권 교회들이 구원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만 하는 병폐가 있다는 것 때문에 결국 바른 기도생활조차도 형식(?)이라며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기도의 능력도, 기도의 응답도,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교제도, 기도를 통해 깨어 있는 삶도 모두 저버린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아직 변화되지 않은 몸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거나 때때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때 자백(요일 1:9)을 통하여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해야 하는데 그들은 자백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백하는 방법도 모르기에 항상 주님 앞에 청결한 양심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한 일들로 인하여 만족하다가도 그 일을 하지 못하였을 때는 실망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며, 자백도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활한다. 즉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의 속죄와 생활 가운데 자백을 통해 깨끗하게 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결국 자백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얘기다. 개인기도뿐 아니라 중보기도와 회중기도에 대하여도 전혀 무지하며, 실질적으로 그런 기도회 모임 자체를 갖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업을 위해서 의논하는 것이 기도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기도가 회사의 영리를 위한 편리한 도구로 도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익이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딤전 6:5) BB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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