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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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자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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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9월호>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살인을 금하셨다. 이 명령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일로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요, 살인자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음을 너희가 아느니라』(요일 3:15).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시기에서 비롯된 미움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살인은 근본적으로 미움에서 발생한다. 사랑한다면 죽이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기 사랑이 지나칠 때는 자기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을 가리켜 "자살"이라고 부른다. 스스로에 대한 절망적 미움이 원인일 때도 있지만, 이 역시 "내가 잘 되어서 사랑받았어야 했는데 '나'라는 인간은 이 정도밖에 안 되니 살 가치도 없어!"라는 아쉬움의 극단적 표현이기에 그 근본 원인은 자기 사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자살을 미화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다. 특히 한 정치인의 자살에 대해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일반인의 자살은 지인들만의 안타까움으로 끝나지만, 정치적으로 명망이 높던 이들의 자살은 그들의 정치 이념과 더불어 숭앙의 위치로까지 승격된다. 현실적으로 국민이 거들떠보지 않는 자살과 국민의 우러름을 받는 자살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자살에도 격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자살에는 격도 없고 가치도 없다. 자살에 격과 가치가 있다면, 살인과 미움에도 그것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살인과 미움을 금하셨다면, 자살 역시 금하신 것이다. 금지된 살인을 미화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성경은 "자살"을 전혀 미화하지 않는다. 자살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마지막 때의 죄인들에게 그 극한의 사악함을 알려 줄 뿐이다.

성경에서 제시되는 자살의 첫 번째 예는 "사울 왕"이다. 처음에는 사울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백성의 요구에 따라 왕으로 뽑혔을 때 기구 사이에 숨어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겸손했었다(삼상 10:21,22). 벨리알의 자식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며 그를 멸시하고 아무런 예물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조차 참고 잠잠하기만 했다(삼상 10:27).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야베스길르앗에 대해 진을 친 암몬인들을 쳤을 때, 백성들이 『'사울이 우리를 다스리겠느냐?'고 말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 사람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그들을 죽이리이다.』라고 사무엘에게 말하자, 사울은 『오늘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나니, 이는 오늘 주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을 이루셨음이라.』라고 하면서 관용을 베풀었다(삼상 11:12,13). 이것이 사울의 초기 모습이다. 겸손과 관용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불순종함"으로써(삼상 13,15장) 변질되어 간 것인데, 급기야 자기 대신 왕이 될 것으로 여겨진 다윗을 시기했고 그를 죽이기 위해 추격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놉의 제사장 팔십오 명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사울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가? "자기 사랑"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자기 왕위를 지키려는 "자존심"으로 인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 사랑"과 "자존심," 이 두 가지가 사울이라는 한 인물 안에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던 것이다.

자기 사랑에서 오는 자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사울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그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최후 결전에서 큰 부상을 입었을 때 그의 병기 든 자에게 한 말을 주목해 보라.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찔러 나를 욕되게 할까 함이라 』(삼상 31:4). 사울의 이 마지막 말에서 그의 관심은 오직 "나"에게 있었다.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최후의 말에서 그의 인생을 결론짓는 "나"가 드러난 것이다. 사울이 칼을 취하여 그 위에 엎드러져 일명 "할복자살"을 한 것에는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의미가 배어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울의 자살은 지속적인 불순종 이후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자존심을 지키려고 벌인 살인 행위였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 타인을 죽이기도 하지만(카인의 아벨 살해) 사울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살의 또 다른 예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유다의 특징은 돈을 사랑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마리아가 매우 값진 감송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자 이렇게 불평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며 돈주머니를 맡아 그 안에 넣은 것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이라』(요 12:6). 유다는 그가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돈을 몰래 훔쳐 가던 도둑이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빵 한 조각을 주시면서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행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식탁에 앉은 제자들 중 몇 사람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맡았기에 그에게 명절에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하셨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신 줄로 생각했는데(요 13:29), 그들이 무슨 추측을 했건 이 일 역시 "돈"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유다에게 속히 행하라고 하신 그 일, 곧 "배반"이 그가 선임 제사장들에게 "은 삼십 개를 요구함으로써"(마 26:15)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돈주머니의 돈을 도둑질해 갈 정도로 돈에 대한 남다른 탐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은 삼십 개에 팔아넘긴 뒤 주님께서 정죄받으신 것을 보고서 후회하여 그 은전들을 성전에 내던진 뒤 목매어 자살했다(마 27:1-5). 이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라는 말씀을 유념케 하는 사건으로, 결국 유다의 자살은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원론적으로 보면, "돈을 사랑해서 일을 벌였는데 일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자살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돈과 자살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에서 수많은 자살들이 전방위로 가지를 뻗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자살의 예들을 보면 거기에 "슬픔"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뻐하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슬픔이 자살로 이어지는가? 성경에는 두 가지 슬픔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후자가 자살로 이어지는 슬픔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구원을 위한 회개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사망에 이르느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이다. 자신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깨달아 "자존심을 버리고" 슬퍼하면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미워하며 회개한 욥과(욥 42:6)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불결함을 선언한 이사야가 그러했다(사 6:5). 이 슬픔은 매우 성경적이고 건전한 슬픔이다. 주께서는 이런 슬픔의 사람을 받아 주셔서 그 사람의 "존재적인 불결함"과 관련된 문제를 친히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결코 의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슬픔이기에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된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부인한 것을 슬퍼하며 후회한 후(마 26:75) 오순절에 3천 명의 혼을 주님께 이겨오는 열매를 맺었다(행 2:38-41). 반면에 "세상의 슬픔"은 "자신이 잘못 행한 것"에 대한 슬픔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로잡는 슬픔이 이것이다. "이미 틀어져 버린 일"에 대해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이기에, 후회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자살까지도 범한다. 『세상의 슬픔은 사망에 이르느니라』(고후 7:10). 이 점에 있어서는 유다가 대표적인 경우이고, 그는 후회한 뒤 나무에 목매어 자살해 버렸다.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해의 최종적인 형태가 바로 자살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5장에는 가다라의 마귀 들린 사람이 나오는데, 이 자는 쇠사슬을 잡아 끊고 족쇄를 산산이 부술 정도로 괴력을 발휘한 점도 있지만, 특히 밤낮 산이나 무덤에서 늘 울부짖으며 "돌로 자기 몸을 상처 내고"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해는 마귀 들림의 주된 특징이기 때문이다(왕상 18:28). 앞에서 언급한 두 자살자의 경우에서도 그들에게 마귀가 들어간 것을 알고 있는가? 『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주로부터 온 악령이 그를 괴롭히더라』(삼상 16:14). 『그 빵 조각을 받은 후에 사탄이 그[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들어가니라』(요 13:27). 마귀 들림과 관련하여 자해와 자살의 상관관계는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충동은 하나님께 복종함으로써(약 4:7) 즉시 벗어나야 할 마귀 들림의 증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자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비그리스도인의 자살은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그의 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므로 지옥으로의 직행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은 죄인의 자살은 제 발로 지옥의 멸망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니, 때 이른 멸망으로 가는 신속한 첩경인 셈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살은 그의 삶의 원칙을 말씀하는 "갈라디아서 2:20"에 분명하게 위배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육신, 곧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것이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도의 삶의 원칙에는 자살이 없다. 성도가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은, 십자가에 육신이 걸린 사형수가 그 육신으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듯이 성도 역시 육신의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지 자살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성도는 이제부터 자기 육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권고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우리 인생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이 육신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 안에 사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삶의 원칙이 분명히 세워진 그리스도인은 자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목적이 확실하면 자살하지 않는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5).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육신을 위해서만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기서 오는 낙심에 목숨을 끊기도 한다. 육신을 사랑했기에, 그 육신으로 인한 슬픔에 젖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을 위해 계획하지 말라』(롬 13:14).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에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하나님께서는 자살을 미화하지 않으신다. "자살죄"를 범하지 않으려거든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라! 자기 사랑에서 오는 자존심을 버리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 슬퍼하려거든 하나님의 뜻대로 슬퍼해야 한다. 구원의 기쁨으로 항상 기뻐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벧전 1:8,9, 살전 5:16)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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