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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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고난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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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9월호>

미국의 와튼 계량경제연구소와 IMF는 매년 "고통지수"(苦痛指數)라는 것을 발표하고 있고, 국내에서는 이것을 LG경제연구원이 "생활경제고통지수"라는 것으로 발표한다. 고통지수는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실업률을 합산한 경제지표이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그해 물가상승률은 8%, 실업률이 7%였다면, 고통지수는 15%가 된다. 물가가 오르고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고통지수도 증가하여 국민 생활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작년 우리나라 고통지수는 19.5%였다.

누군가가 "고통과 고난은 출생과 사망 사이에 상존하는 심신 상태이다."라고 말했듯이,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다. 『역경은 티끌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고생도 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지만 불티가 위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고생하려고 태어나느니라』(욥 5:6,7). 기본적으로 고통과 고난은 죄의 결과로 시작되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사람은 전 생애 동안 고통 중에서 소산을 먹어야 했는데, 식탁에 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다(창 3:17-19). 『우리가 주의 성내심으로 인하여 소멸되며, 우리가 주의 진노로 인하여 고난받나이다』(시 90:7).

고난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 모두가 견뎌야 할 "삶의 무게"이다. "의인"이라고 해서 고난을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당대에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피했던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과 싸워 이겨 낸 챔피언이었는데, 그의 탄식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오, 내 슬픔을 전부 달아보고 내 재앙을 다 저울에 놓아 보았으면! 지금 그것은 바다의 모래보다도 더 무거우므로 내 말들이 삼켜졌느니라』(욥 6:2,3).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처럼, 사람은 고난을 통해 더 진지하고 성숙한 삶을 살게 된다.

이 땅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난을 받으신 분이 계신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3-6).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이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극심하고 위대했던 이유는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의 죄악들을 지신 고난이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영예를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분이시다(빌 2:6-8).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극악한 범법자를 처형하는 형벌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의 고통이란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한 탈수 현상과 더불어 팔과 어깨가 탈골되고 인대가 찢겨져 나가며, 고열이 동반되고 근육경련 및 파열이 일어나며 여러 가지 고통이 수반된다. 특히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은 몸이 그 무게로 인해 아래로 쳐지게 된다. 그러면 숨을 못 쉬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발에 힘을 주어 몸을 바짝 세우려고 한다. 이때 발에 박힌 못은 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가한다. 그래서 그런 고통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병사들이 예수님 옆의 두 강도의 다리를 꺾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수들이 숨을 못 쉬게 되어 빨리 죽게 되면 그나마 고통을 덜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인간으로서 평범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의 무게 그대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저주 그 자체가 되셨음을(갈 3:13) 감안하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저주가 예수님 한 분께 모두 쏟아진 것인데,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고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주님과 같은 생각으로 무장할 것을 명령한다(벧전 2:21; 4:1).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인의 고난지수"인데, "그리스도인으로서"(벧전 4:16),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벧전 4:14) 받는 고난을 가리킨다. 성도가 세상의 육신적인 일이나 죄들로 인해 고난당하면 수치이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복과 영광을 가져온다.

우선 이 고난지수는 주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연단시키기 위해 주시는 "불 같은 시련"과 관계있다(벧전 4:12,13). 이런 연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마귀와 싸우는 실전에서 승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참자가 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사랑을 고난을 통해 나타내셨고, 지금도 고난을 통해서 사랑의 고귀한 목적들을 이루고 계신다. 이로 인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위해 받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할 뿐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위해 담대하게 고난받도록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니』(빌 1:29). 궁극적으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벧전 4:14), 우리는 그 고난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비굴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서 무수한 고난에 직면하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그 고난을 큰 기쁨으로 즐거워함으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특권이요, 선물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빌 1:29), 곧 왕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신 "하사품"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의 고난지수는 복음과 진리를 담대하게 전파할 때 증가한다. 이것은 성경과 피로 얼룩진 교회사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들이 입증해 준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면서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했다. 『우리가 사면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아니하며 내던져져도 멸망하지 아니하며 항상 주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님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즉 고난을 통해 우리가 입고 있는 질그릇이 깨질 때 그리스도의 능력, 곧 생명이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괴로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또 버림받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성도가 받는 고난은 천년왕국에서 통치할 유업과 직결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은 것은 함께 영광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는 현재의 고난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에 감히 비교되지 못한다고 내가 여기기 때문이라』(롬 8:17,18).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장차 받게 될 상과 유업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신하는 믿음에 있다.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은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간다(고후 4:17). 즉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땅에서 받은 고난을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금, 은, 보석들의 무게로 측정될 것이다. 이를 유념하는 게 좋은데, 지상에서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도 받은 적이 없는 성도는 저 영원에서 무게가 나가고 값어치가 될 만한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지 못하며 살 바에야 짐승처럼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은 "고난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벗 삼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담을 "병"을 갖고 계시는 것이다(시 56:8).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는 각자의 "고난지수"가 얼마큼 되는지 산출해 볼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받은 고난이 얼마나 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고 또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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