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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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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8월호>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능력”을 가지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돈이 곧 능력이며,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서 돈을 가지려고 애를 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현실인 것이다. 소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돈 많고 사람 많은 대형 교회에 다니면 목에 힘을 준다. 교회 건물이 크고 재물이 많은 것으로, 또 다니는 교인 수로 자신들의 신앙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은 재물도 건강도 아닌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다(고후 12:9). 그는 자신이 약한 것을 알고 시인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고,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육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영적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분별력”이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북침인지 남침인지도 분별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어이없게도, 북한이 침공해서 내려왔으니까 북침이라고 이해하는 학생들이 많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기 때문에 남침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데도 말이다.
분별력이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것이 정결한지 불결한지, 또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구분할 줄 아는 것이 바로 분별력이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고 “오늘 날씨가 어떻겠구나.” 하며 구분하면서도 이 악한 현 세상을 보고서는 그 심판과 멸망이 가까웠다는 것은 분별하지 못한다(마 16:3,4). 마지막 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별이 없는 것이다(딤후 3:4). 특히 교회라고 하는 곳들에 분별력이 부재한데, 일례로 그들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관련하여 아무 분별력도 없이 아무 성경이나 마음에 드는 것을 택해 읽어도 된다고 말한다. 다 같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경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대충”의 자세를 취하는 자들이 자기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혹시 뭐라도 잘못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메르스에 감염될까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가급적 가지 않고, 손을 자주 깨끗이 씻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등 개인위생에 철저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대한민국에 소위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870만 명이라고 하는데, 그들 중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들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행위 구원의 차이, 성령으로 거듭남과 물침례, 세례와 침례의 차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교회 건물, 신약의 성전의 의미,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된 성경과 변개된 개역성경의 차이, 바른 교리와 거짓 교리의 차이 등을 모른다. 그렇기에 하는 일마다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주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능력은 영적 분별력이다(고전 2:14,15).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분별력이 없으면 속게 되고,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엉뚱한 곳에서 생을 허비하게 된다.
둘째, “전투력과 차단력”이다.
그리스도인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마귀는 성도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계략을 꾸미고 있다. 마귀의 공격에 맞서려면 먼저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어야 한다.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엡 6:11). 그러나 갑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 있기에 패배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번에 우리나라에 퍼진 메르스 바이러스로 인해 S병원에서는 감염환자들이 계속 늘어났고, 심지어 방호복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까지도 감염된 반면, 평소에 방호복 착용 훈련을 철저히 하여 피부 감염이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른 M병원은 확진 환자들도 모두 치료해서 돌려보냈고, 의사와 간호사 중 단 한 사람도 감염되지 않았다고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 예비군이 되면 군복을 대충 입는 습성을 갖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대충 입어서는 전투력과 적의 공격을 막는 차단력을 갖출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을 때, 비로소 악한 날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엡 6:13).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군사는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 화평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갖추는 훈련을 반복하고 성도들을 위해 인내와 간구의 중보기도를 할 때(엡 6:14-18) 영적 전쟁에서의 전투력과 차단력을 완벽하게 갖출 수 있게 된다. 완벽하게 될 때까지 전신갑옷을 갖춰 입는 훈련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제대로 싸울 수 있고 완벽하게 보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아 내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또 틈을 노려 비집고 들어오는 영적 바이러스들을 막아 내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확실하게 갖춰 입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셋째, “지속력”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일회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신실한 섬김이 끝까지 유지되는 삶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성도들이 얼마나 신실했는가를 판단하실 것이므로(고전 4:1-5),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성도에게 필요한 능력이 바로 지속력이다.
믿음의 생활이 양은냄비처럼 금방 뜨거워졌다가 식어 버린다면 그것은 신실한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그 일을 끝까지 중단 없이 수행한다면 바로 그 성도가 주님께 신실한 성도로 인정받는 것이다.
마치 굽다 만 빵처럼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빵을 굽기 시작했으면 열을 지속적으로 끝까지 가해야만 먹을 수 있는 빵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 또한 영 안에서 열심을 내는 섬김에 일단 불이 붙었으면 그 불을 꺼뜨리지 않고 끝까지 피워야만 하나님께서 흠향하실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지속력은 신실한 성도가 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접하고 지역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지만,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의 섬김에는 지속력이 없고 타성만 엿보일 뿐이다. 타성에 젖은 사람은 결코 주님을 섬길 수 없다. 타성은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형식주의에 젖은 성도가 많아질수록 지역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죽어 갈 뿐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바울이 명령했듯이(엡 6:6), 교회에 지속력을 잃은 성도가 늘어날수록, 그 교회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가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조금도 기쁨이 되지 않는 종교적인 형식만 남은 교회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추진력”이다.
주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추진력이 없다면, 그의 신앙은 제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섬기기는 하지만 이전의 것을 반복하는 정체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믿음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기 일쑤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이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라.
『그가 소망이 없는데도 소망 가운데서 믿었으니 “네 씨가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약 백 살이 되고서도 자기 몸이 이제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으로 생각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18-22).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믿음의 추진력이란 이런 것이다. 그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배가 추진력을 잃으면 풍랑이 일 때 뒤집어질 수 있듯이, 믿음의 추진력이 없는 성도는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면 믿음이 좌초될 수 있다. 추진력이 없는 신앙생활은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세상 풍조와 거짓 교리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기도 한다. 배는 바다를 항해하라고 있는 것이지 물 위에 마냥 떠 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돛을 달았으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믿음의 목적지를 향해 성경의 해도(海圖)를 짚어 가며 헤쳐 나가야 한다.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조정경기의 배들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한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거친 물살에 밀려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른다. 앞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의도하신 항구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얼마나 강한 믿음의 추진력을 가졌는가는 그 성도와 말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다(롬 10:17). 믿음에 추진력이 더해지려면, 젖이 되는 말씀에만 머물지 말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성도의 영적 성장은 믿음의 성장을 의미한다. 젖만 먹고 있지 말고, 꿀, 사과, 빵, 고기, 단단한 음식과 같은 말씀들도 먹어서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젖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나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나니, 이는 그가 아기이기 때문이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 말씀을 사용함으로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히 5:13,14). 젖이 되는 말씀만 먹어서는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단단한 음식 같은 말씀을 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하여 믿음에서 강한 추진력이 뿜어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매일 상고해야 한다(행 17:11).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시 1:2).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딤후 2:15).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고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2).
그리스도인은 영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하늘의 사람답게 주님께서 주시는 영적 능력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성도에게 필수적인 영적인 능력을 갖출 때, 그 성도는 천성을 향해 가는 이 순례의 길을 끝까지 즐겁게 걸어갈 수 있게 된다. 그 능력의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능력을 구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