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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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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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바울은 그의 생애 동안 최선을 다해 “순수한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대부분의 생애를 그렇게 살았다(롬 9:1, 딤후 1:3). 바울은 구원받기 이전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교회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자로서 살았으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썼다(행 24:16). 또한 그는 유대인들의 공회를 향하여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선한 양심으로 살아 왔노라.』(행 23:1)라고 말했고,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는 사역의 성패가 선한 양심에 달려 있다고 권면했다(딤전 1:19). 그뿐만 아니라 거짓 교사들은 양심의 기능이 마비되었으며(딤전 4:2), 구원받지 않은 자들은 양심이 더럽혀져 있다고(딛 1:15)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는 “죽은 양심”과 “악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양심에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지상 삶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양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심은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양심까지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미개한 종족이라도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양심으로 알고 있기에 도둑질한 죄인에게 형벌을 가한다. 구약성경이 없었던 당시 필리스티아 지역의 그랄 왕 아비멜렉은 “자신의 누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사라를 그의 아내로 취하려 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개입하시어 막으셨으니(창 20:3), 아비멜렉 역시 “간음”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간음하는 자들은 간음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것이다.


양심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겠으나, 따르지 않으면 정죄를 받는데, 곧 그가 거역한 양심에 근거하여 정죄를 받는다. 이방인 코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양심대로 올바르게 행하는 그에게 영생으로 보상하셨는데, 바로 시몬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전해 주셨고 그 복음을 믿은 코넬료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롬 2:6,7).

-한편 세뇌당한 양심은 그 사람을 속여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구원받기 이전에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은 바울은 양심에 관한 한 아주 “담대한”(?) 사람이었다. 교회를 파괴하고 집마다 들어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는 일에 있어서 양심이 떳떳했고, 그들을 매질하고 형벌을 가하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는 데도 담대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스테판의 죽음에 동참한 일과 관련하여 양심에 강한 찔림이 있을 때까지는, 유대교라는 종교에 세뇌당한 양심으로 완전히 속아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종교로는 양심이 진리에 대해 올바로 반응하게 할 수 없다. 『그들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딤전 4:2). 성경은 이들의 양심이 더럽혀져 있다고 경고한다(딛 1:15).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의 조상들처럼(마 23:29-35) 자기들의 메시아를 배반하고 살인하는(행 7:52) 동안에도 “유대인의 명절”(요 6:4)을 잘 지키기 위해 로마 총독의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요 18:28), 유월절 양을 먹는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은 걱정하면서도 정작 참된 유월절 양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데는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들 “양심”의 실체였다. 이방인의 “더러운” 건물 안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을 만큼 인류 역사상 가장 “정결한” 척했던 종교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양심으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했지만, 정작 더러워진 것은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었고, 결국 그들의 양심은 화인을 맞아 그 기능을(롬 2:15) 상실하고 말았다. 마귀가 주는 거짓 확신으로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은 자기들이 임의로 규정해 놓은 종교 의식이나 종교적인 행위의 선을 넘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찔림을 주시는 성경적 확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이런 짓들을 하는 자들은 초림 당시의 유대교나 암흑시대에 수천만 명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데 사용된 고문 도구를 축복한 로마카톨릭 안에만 있지 않다. 성경적 진리와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 신과 악한 현 세상의 풍조에 짓밟히는 것에 전혀 분개하지 않는 종교인들도 그들과 한통속인데, 이들 역시 죽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지옥으로 치닫는 저주받은 혼에 대해서는 어떤 연민도, 마음의 동요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저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만 열을 올리는 목사들이나 교인들 역시 죽은 양심을 지녔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파괴하고 “성별”이라는 명목으로 “괴뢰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님을 위한다고 떠들어 대는 배교자들도 양심에 어떤 거리낌이나 어떤 회한이나 후회 또는 죄책감도 없이 그들의 가증한 짓들을 자행한다. 그들은 화인 맞은 양심으로 인해 “악”에 관한 한 어떤 회개도 하지 않고 어떤 경고도 받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진리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육신이 충동질하는 대로 행하면서도 온갖 변명을 갖다 붙이며 죄를 정당화한다. 화인 맞은 양심은 모든 감각을 잃었기에 잘못한 일에 대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종국에는 진리와 무관하게 살아도 아무 불편함이 없는 속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양심은 점차 죽어 간다. “헤롯”은 처음에 침례인 요한의 설교에 올바로 반응했다. 그의 설교를 기쁘게 들었으며 그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행하였다(막 6:20).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듣게 되자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요한을 대적했다. 헤롯의 양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원인은 “사람을 두려워한 것”에 있었다. 헤롯은 자신의 아내가 두려워서 요한을 체포했지만,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는 여론이 두려워 곧바로 요한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관들, 군 지휘관들, 지역 유지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잃는 것이 두려워졌을 때는 요한을 죽이고 말았다(마 14:9-11).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보다 더 심각한 죄는 육신의 정욕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양심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양심이 살아 있으면 “하나님의 강한 사람”이 되지만, 양심이 죽으면 “겁쟁이”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참지 못했던 다윗은 혈혈단신으로 거인 골리앗을 향해 용감히 나아갔지만, 가드 왕 아키스 앞에서는 그를 몹시 무서워하여 미친 체했다(삼상 21:12,13). 홀로 담대하게 싸워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는 한 여자 이세벨의 위협이 무서워서 살기 위해 도망쳤다(왕상 19:2,3).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아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도 그의 부모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못했던 까닭은,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면 그 사람을 회당에서 출회하기로 이미 결의해 놓은 유대인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요 9:22).


하나님께서는 양심이 화인 맞아 죽은 사람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시고(눅 23:8,9) 버림받은 상태로 내버려 두신다(롬 1:24,26,28).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죄라도 저지르게 되는데, 일례로 양심이 죽어 버린 헤롯은 하나님의 사람인 침례인 요한을 죽였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과 관련하여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눅 23:11).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양심”에 달려 있다. 사람이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구세주를 만나 구원받게 된다. 구원받은 성도의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고 새로워지며, 그렇게 정결해진 순수하고 선한 양심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순종하고자 열망한다. 양심은 성도를 지켜 주는 “최후의 방어벽”이다. 선한 양심에 죄를 짓는 것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BB





지난 12월 8일 영국을 필두로 미국, 캐나다, EU, 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호주, 일본, 중국, 브라질 등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각국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집단 면역을 형성하여 현 코로나 위기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자국민들에게 백신 접종을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기존의 코로나19보다 전파력이 더 강한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했다. 백신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안감 때문에 접종이 지지부진한 데다가 전파력이 강한 변종까지 나오자, 각국 정부는 백신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해 보겠다는 계획에 차질을 빚는 모양새다. 그러한 위기 상황은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인데, 백신 확보 자체가 상대적으로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난 12월에 시작된 코로나19 제3차 유행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 적용” 및 “5인 이상 모임 금지” 등 강도 높은 조치가 여전히 계속되는 실정이다. 그로 인해 국민이 받는 경제적인 타격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한편 성경의 진리와는 무관한 “종교 행위와 의식들”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돈을 걷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 집단들”은 그 누구보다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난색을 보이는 집단이 바로 “로마카톨릭”인데, 이는 그들이 매주 행하는 “미사”에서 가증한 종교 의식인 “성체 성사”에 참여해야 구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코로나 정국이 장기화되고 있어 집합 금지 조치에 따른 비대면 예배 시행으로 인해 성체 성사를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은 그들로서는 큰 난관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신령성체”(성체를 실제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 모시는 것)라 해서 성체 성사에 직접 참여할 수 없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하게 마음으로 모신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그들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있다. 결국 “구원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그들의 성사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의식으로서,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교 행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로마카톨릭의 “미사”는 일종의 “피 없이 행해지는 제사 의식”이다. 이 종교 의식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가 촛대와 초, 십자가, 향로 등 제사를 위한 도구를 이용하여 집전하게 되는데, 그중 미사의 핵심인 “성체 성사”에는 성체 포(布), 성작(포도주를 담은 잔) 수건, 미사 경본(기도문을 적은 책) 등이 놓여 있는 제대(제단) 위에서 “제병”(누룩 없이 만든 둥근 빵)이라는 제물을 바치고 나눠 먹는 일정한 종교 의식과 행위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제병”은 “제사 때 사용하는 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라틴어로는 “호스티아”(Hostia)라고 부르는데 이는 “희생제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제병은 “제사에 봉헌된 희생제물”인 것이다.


우선 그 모양이 천편일률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인 것부터가 비성경적인데, 그마저도 미사에 참여한 교인들은 포도주는 마시지 않은 채 제병만 받아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 의식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라고(마 26:26-28, 고전 11:26) 말씀하셨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를 같이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빵이나 포도주 어느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성체 성사를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로마카톨릭 교회법 제925조 “카톨릭교회교리서” 1390항). 그들이 이렇게 “포도주”에 대해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성체 성사에 사용되는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피”로 바뀐다고 믿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데, 교인들이 그 “거룩한 피”를 받아 마시다가 실수로 얼굴이나 수염에 묻히고 옷과 바닥 등에 흘리게 되면 그 포도주가 묻은 부분 역시 거룩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논란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양의 “포도주”를 미사가 끝난 이후에 사제들이 나눠 마시게 되는데 그야말로 “술의 향연”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미사의 기원 자체가 “피 없는 희생제물”이 요구되었던 바빌론의 이교도 종교 의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에 따르면, 키프로스의 고대 도시 “파포스”에 있는 “비너스 제단”에서는 어떤 피도 바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제단에서는 사제들이 희생제물을 가지고 “창자 점”을 쳤다. 이러한 점술은 킬리키아에서 유래했고, 또한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바빌론 성읍을 그대로 본떠서 세운 성읍이었기 때문에, 결국 “피 없는 희생제사 의식”은 바빌론에서 시작하여 킬리키아를 거쳐 키프로스의 파포스로 전해졌고, 바빌론 종교 의식을 따르는 로마카톨릭에 의해 종교적 제의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한편 성체 성사의 핵심 교리는 “화체설”에 있는데, 이것은 동그랗게 생긴 제병과 포도주에 사제들이 축성(祝聖)하면 이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가 된다는 교리이다. 말하자면 로마카톨릭 교도들은 성체 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 실제 살과 피를 받아먹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이상한 교리”를 위해 근거 구절로 삼는 것은 요한복음 6장과 마태복음 26장 등이다.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요 6:5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유대인이 실족했었다(요 6:60,66). 이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하신 “비유”의 말씀을 비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신 말씀은 실제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 아니었다. 그것은 “믿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40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졌나니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47-51절).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생명의 빵”에 관한 설교가 “문자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은 63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 명확한 진리 앞에서 눈먼 소경들인 로마카톨릭은 영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전 세계 약 13억 명의 카톨릭 교인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다. 그러면서 매 주일 “광란의 사육제”를 즐기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대환란 기간에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펼쳐질 실제 “식인 행위”의 모습을 예시하고 있다.


대환란 때 카톨릭 사제들이 벌일 식인 행위와 관련된 예언은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느헤미아 11:1에서는 백성의 남은 자들 가운데 “십분의 일”이 제비 뽑혔고, 이사야 6:13에서는 백성들 가운데 “십분의 일”이 돌아와서 실제로 먹힐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도 십분의 일이 있을 것이요 그것이 돌아와서 먹힐 것이니 잎이 떨어져 줄기가 남아 있는 보리수나무와 상수리나무처럼, 거룩한 씨도 그 줄기가 되리라.” 하셨더라.』 이와 관련하여 선지자 미카는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하고 그들에게서 가죽을 뜯어내며 그들의 뼈에서 살을 뜯어내고, 너희가 또 내 백성의 살을 먹고 그들에게서 가죽을 벗겨 내는도다. 그들이 백성의 뼈를 부수어 잘게 다지기를 마치 솥과 가마솥 안에 넣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때 그들이 주께 부르짖을 것이나 그는 그들을 듣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때에 그들이 행한 악한 행실에 따라 그들에게서 자기 얼굴을 숨기시리라』(미 3:2-4). 호세아 8:7,8, 예레미야 51:34, 예레미야 애가 2:5 등에서도 “이스라엘은 삼킨 바 되었으니,” “삼켰으며,” “삼키시고”와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모두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표현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편의 여러 구절들(14:4; 27:2; 35:25; 56:1 등)에서도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을 마귀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실제로 먹는 식인 행위에 관해 예언하고 있다. 『정녕, 그들이 자기 아들들과 자기 딸들을 마귀들에게 제물로 바쳐』(시 106:37). 사도 요한 역시 제단에 바쳐진 인간 제물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계 6:9). 즉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제단 위에서 목 베임당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시편과 선지서들의 예언대로 그들의 몸이 실제로 먹힌 것이다. 이처럼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는 인간 제물과 그에 따른 피의 제사를 요구할 것이다. 『다른 신을 급히 쫓는 자들의 슬픔이 커지리니 나는 그들이 바치는 피의 술제물을 바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름들도 내 입술에 두지 아니하리라』(시 16:4).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그분의 몸을 속죄제로 영원히 드리신(히 10:8-12) 이후로 등장한 교회 시대에는 “실제적인 희생제사”가 없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누군가가 이 시대에 희생제사를 거행한다면, 그것은 신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히 9,10장)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니콜라파 사람들이 제멋대로 자신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이교도적인 바알 숭배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솔로몬은 『악인의 희생제는 주께 가증한 것』(잠 15:8)이라고 했고, 『네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조심하라. 가까이 다가가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희생제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그들은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음이라.』(전 5:1)라고 경고했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의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들, 그들을 추종하는 카톨릭교도들에게 정확히 적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듣기는커녕 미사를 통해 이교도 바빌론에서 유래한 가증한 의식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대환란 기간에는 “인격화된 사망과 지옥,” 마귀 숭배, 기근, 홍수, 지진 등과 같은 온갖 자연재해와 전염병들, 적그리스도와 마귀들 및 마귀의 자식들에 의해 자행되는 비정상적인 일들, 특히 “식인 행위”가 아주 흔하게 일어날 것이다(계 6-19장). “큰 창녀”(계 17장)인 로마카톨릭의 치마폭 안에서 마치 거기에도 “구원”이 있는 양 착각하며 사제들이 주는 빵과 포도주를 입을 벌려 받아먹는 어리석은 카톨릭교도들이여, 이제는 무지몽매함에서 깨어나 그 창녀에게서 빠져나오라! 주님께서는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계 18:4)라고 경고하신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이 경고의 말씀에 유의하여 한시라도 빨리 돌이켜 나와야 할 것이다. BB

특집 목회자 칼럼 46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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