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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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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6월호>

죽음 이후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죽은 후 심판을 받는다(히 9:27). 엄밀히 말하면 죽는 것 자체도 심판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에 대한 결과로 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범죄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고(창 2:17),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사망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롬 5:12). 즉 죽음은 범죄한 인류를 향한 저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가? 멸망할 죄인들에게는 저주가 임해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받은 자들인데 그들에게도 이 저주가 임해 있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저주만 남아 있다. 우리도 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은 육신의 저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이 세상의 저주 가운데 놓여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적으로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고 승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이 사망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며, 그것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1. 성도의 죽음은 안식이다.
장례식장에 가 보면 흔히 "편히 잠드소서." "고통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어라." 하는 말들을 듣게 된다. 이 세상의 고난을 끝내고 편안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사람에게 하는 말들이다. 늙어서 죽든, 사고로 비명에 죽든 모든 고인들에게 이런 말들을 한다. 하지만 그들 고인들이 정말 안식에 들어갔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죽음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예비되어 있지만, 죄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보다 훨씬 심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안식이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는 실로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요』(계 14:13)라고 말씀한다. 다니엘도 그의 지상에서의 소임을 다했을 때 "네가 쉴 것이요"(단 12:13)라는 말을 들었고, 누가복음 16:23에서는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 이곳은 낙원이요, 여기에서 그는 안락하게 쉬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만 구약에서와 신약에서의 안식은 그 장소가 다를 뿐인데, 구약에서는 낙원이 음부 안에서 지옥과 다른 한 구역으로 제시되는 반면, 신약에서는 셋째 하늘로 제시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아직 구약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부자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이 커다란 구렁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로 그 낙원에 있던 성도들은 셋째 하늘로 옮겨졌다. 에베소서 4:8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갔고...』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후에 죽은 신약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올라간다. 사도 바울이 잠시 죽음의 경험을 했을 때 그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으로 끌려 올라갔다고 말했다(고후 12:2,4).
성도들의 이 안식에 대한 아름다운 예표는 출애굽 사건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거친 후 카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요단 강을 건너 카나안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래서 이 땅을 바로 안식의 땅으로 부르는 것이다. 시편 95:11에서는 카나안 땅을 분명히 "안식"이라 부른다. 엄밀히 말해 이 사건은 두 가지를 예표한다. 그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스라엘이 누릴 천년왕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환란 후 이스라엘을 천 년의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히브리서 3,4장에서는 출애굽 때의 안식과 미래의 이 안식을 비교하면서, 과거 광야의 백성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처럼 미래에는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4:5,7).
그러나 한편 이 사건은 성도들이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안식을 예표한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카나안에 들어가서 실제적으로 쉬지는 못하고 전쟁을 해야 했지만, 성경이 그 땅을 "안식"이라고 묘사한다면, 저 하늘에서 쉴 우리의 궁극적인 안식과 비교할 수 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요단 강"을 건너 안식에 이르렀다. 이는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거대한 물층을 상징한다. 창세기 1:7에서 언급된 바 "창공 위의 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휴거될 때 변화된 몸으로 이 물을 통과해 셋째 하늘에 들어가겠지만, 먼저는 우리가 죽으면 우리 혼으로 그곳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찬송가에서 "저 요단 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이라고 친송을 부르는 이유이다.
이곳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해 올라가신 곳이다. 그곳에는 아버지 보좌가 있고, 그 오른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실 때 성도들을 위해 집을 짓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집은 아주 큰 저택이다(요 14:1-3). 갈라디아서 4:26에 따르면 그곳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요한계시록 21:1,2에 따르면 그 도성은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는데, 그 성은 영원 세계가 펼쳐질 때 새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그 도성의 화려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가게 될 곳이다. 앞서 죽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현재 저 하늘의 낙원에서 편히 쉬고 있다. 이 지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고생을 당한 성도들일지라도 그곳에 가면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무수한 천사들과 더불어 안식 가운데 거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그렇게 행복한 것이다.

2. 성도의 죽음은 새 옷을 입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라.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 여기서 "집"이란 몸을 말한다. 하늘에서 오는 집으로 "옷입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육신은 장막 집이며, 후에 입게 될 집은 영원한 집이다.
성도의 죽음은 그러한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과 같다. 현재 이 썩을 몸, 죽을 몸을 입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각종 질병과 허약함으로 우리 장막 집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는 죄의 결과이다. 만약 이러한 고통의 몸을 안고 영원을 산다면 그 얼마나 비참할까? 그런 점에서 범죄한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 나무를 가려 버리신 것은 오히려 은혜라 아니할 수 없다. 범죄한 인류는 질병과 허약함으로 고통당하다가 죽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새 몸을 입는다.
현재의 육신은 질병뿐 아니라 죄로 인해서도 고통을 겪고 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많은 죄들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오히려 해방이고 자유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상의 몸을 입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 속으로, 혼은 셋째 하늘, 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3:21). 물론 성도의 영은 그가 구원받는 순간 이미 천상에 앉혀 있지만(엡 2:6), 궁극적으로는 죽으면 하나님께로 간다. 이 경우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혼"인데(벧전 1:9), 바로 이 혼이 "나 자신"으로서 육신을 입고 살다가 그 육신이 죽으면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올라가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혼이란 보이지 않는 내면적 존재다. 보통 이 혼을 "인격" 혹은 "정신"이라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몸을 벗고 혼으로 하늘에 가게 될 때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분명히 알아본다는 사실이다. 혼은 인격을 가진 주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인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존재가 아니다. 혼은 나 자신, 즉 진정한 나이다. 그리고 그 진정한 나는 몸의 형태를 갖는다. 지금은 육신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이 육신에서 해방되면 그 자체가 몸처럼 보여질 것이다. 이것을 "혼적인 몸"(soulish body)이라 말한다.
지옥에 간 죄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그 부자는 지옥에 갔으나 아브라함이나 나사로를 알아보았다. 그는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또한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서라도 떨어뜨려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보니, 각 지체가 분명히 있는 몸의 모습이다. 이처럼 지옥에 있는 죄인들이나 천상에 있는 성도들이나 혼적인 몸을 입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옥에 있는 혼적인 몸들은 절대로 해방되는 몸이 아니다. 오히려 불꽃 가운데서 더욱더 고통을 받을 것인데, 심지어 벌레가 될 정도로 비참하게 변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묘사하시면서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4,46,48)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 반면 성도의 혼적인 몸은 자유함에 이르는 몸, 영광스런 몸, 영원한 몸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몸이 될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새 옷"을 입는다고 말한다.

3.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과정이다.
성경은 종종 죽음을 잠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잠을 잔다는 것은 깬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죽음이 잠이라면 깬다는 것은 부활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고전 15:51).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나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막 5:39, 요 11:11). 그리고 그들이 깨었던 것처럼 성도들도 죽음이라는 긴 잠에서 깰 것이다.
부활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제로 놓고,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논리로 전개해 나간다(고전 15: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성도의 부활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도 성도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히브리서 2장은 설명해 준다.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 2:14,15).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죽지 않게 된다는 것보다는 죽음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아예 죽지 않으셨다면 죽음과 싸워 이긴 것이 아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셔야 죽음과 싸웠다가 이긴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그것으로써 주님은 죽음에 대해서도 승리자가 되신 것이며, 또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를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으로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우리는 휴거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죽은 성도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 따르면, 그들의 부활이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의 휴거보다 먼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죽은 성도들을 장례치른 사람들에게 매우 귀한 위로가 될 것이다(살전 4:18).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 우리와 만나게 될 것인데 왜 슬퍼하는가? 단지 지금 다시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쉬울 뿐이다. 부활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변화된 육신을 입게 된다. 지금 천상에는 혼이 가는 것이며, 그는 혼적인 몸을 갖게 되지만, 부활 때에 우리는 지금처럼 육신을 입게 된다. 하지만 지금과는 현저히 다른, 완벽한 육신을 입는다. 그 몸은 부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3:2에서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부활하신 몸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초자연적인 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을 때 벽을 통과해서 들어오셨다. 또 부활하신 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고 하셨으나 잠시 후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마 28:9). 즉 그 사이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오셨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음식을 드시기는 하셨으나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확실히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지, 결코 배고파서가 아니었다(눅 21:41-43). 즉 우리의 부활할 몸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 먹을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 몸에는 더 이상 죄가 없다. 지금은 아담의 성품을 갖고 있는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때에는 예수님과 같고 또 하늘에 속한 완벽한 몸을 입는지라 죄와는 상관없는 몸이 될 것이다. 이것만 해도 부활은 우리의 큰 소망이 된다. 죄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위대하고도 멋진 일인가? 뿐만 아니라 그분처럼 변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그분과 같은 몸을 입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33살 반의 남성의 모습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분이 죽고 부활하셨을 때의 모습이 33살 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받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이 땅을 통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의 왕이 되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서 그분과 더불어 이 땅을 통치할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의 비유에 따르면 신실한 종들은 열 고을, 다섯 고을 등을 다스릴 권세를 얻는다. 그런데 만약 혼만이라면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시편 8:4-6에 보면 인자, 즉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셨다고 했다. 아담이 바로 그러한 통치권을 받은 것이다. 시편 115:16에서도 『하늘, 곧 하늘들까지도 주의 것이나 그가 땅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주셨도다.』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통치를 위해서라도 육신을 입으셔야 했다. 초림 때 그분은 그 몸으로 속죄제물이 되셨지만, 재림 때 그분은 그 몸으로 위대한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그때 우리 역시 그분의 통치에 동참할 것인데,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위대한 몸을 입어야 한다.

성도들은 부활한 몸으로 영원토록 살 것이다. 이 더러운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도, 저 하늘에 올라갈 수도 없다. 그러나 부활하여 변화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계신 저 하늘에 혼만이 아닌 몸으로 올라갈 수 있고, 다시 내려와서 주님과 함께 통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부활로만 가능하며, 그것은 또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한 관문일 뿐이다. 성경 말씀이 이토록 확실한데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에겐 안식이 있고 자유가 있고 부활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성도들만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저주받은 죄인들에게는 지상에서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 것이며, 벌레처럼 비참한 모습이 될 것이고, 부활한다 해도 정죄의 부활, 즉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일어나 다시 불못으로 들어가는 그 비참한 부활을 당할 것이다. 성경은 오직 두 개의 길만을 제시한다. 안식이냐 고통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구원이냐 저주냐? 당신의 상태는 어떠하며,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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