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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올바른 교제를 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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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6월호>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교제를 하려면-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이다
언젠가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달리기 경주’가 열린 적이 있었다. 선수들은 각자 출발선상에 서서 긴장된 얼굴로 출발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우뢰와 같은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출발신호는 울렸고, 모든 선수들은 오직 우승을 향한 일념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한 선수가 얼마 못가 다른 선수들의 몸에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이미 다른 선수들은 앞다투어 멀찌감치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이 넘어진 선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지난날 자신이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흘렸던 땀과 수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예기치 못했던 일로 인해 관중석에는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울고 있는 선수를 안타까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중간쯤 달려가던 선수들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넘어진 선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를 어깨에 부축하고 그토록 그들이 염원했던 결승선을 다같이 통과해 우승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이에 감동받은 관중들은 다같이 일어나 그들을 향해 힘찬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을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이 “동일한” 싸움(빌 1:30)을 “동일한” 몸 안(고전 12:13)에 있는 다른 지체들도 함께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군대에는 함께 싸우는 군인들 간에 “전우애”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몸 안에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감염을 막기 위해 백혈구들이 견고한 “면역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영적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피보다 더 진한 “그리스도인들만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로 “어두움 가운데 있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교제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교제에 동참할 수 있고 그 기쁨들을 나눌 수 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 안에 있는 “동일한 싸움”을 보고 듣고 있는(빌 1:30)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관한 귀중한 권면을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어떤 격려나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인정이나 자비가 있다면 같은 생각이 되어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 되고 한 생각이 되어 너희는 나의 기쁨을 이루라』(빌 2:1,2).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보게 된다. 첫째로, 교제는 『같은 생각』과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과 사랑”을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위대한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다(빌 2:3,6-8). 또한 그러한 죽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롬 5:8). 성경은 “죽음에까지의 순종”을 언급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들을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죄』(고후 5:21)와 『저주』(갈 3:13)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비참한 장소였다. 그 형벌을 죄인들을 위해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보여진 장소이기도 하다.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났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도다』(시 85:10).
둘째로, 그 교제를 통해 기쁨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세상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가질 수 없다. 평범한 이야기에 그저 웃어 줄 수는 있어도 내면의 진정한 기쁨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알지 못할 벽을 발견하게 되고, 세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이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며(빌 3:20),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것들”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썩지 아니하는 “말씀의 교제”가 있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기억될 “간증의 교제”가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기쁨 가운데 노래하는 “찬양의 교제”가 있으며 기도의 응답과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의 교제”가 있는 것이다(엡 5:19,20). 우리가 나누는 교제에 있어서 “서로 간에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지 못했다면 우리의 교제가 올바로 이루어졌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원리를 무시할 때, 우리의 교제는 오히려 “상처”와 “실족,” 심지어 “배교”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깊은 기쁨의 교제를 나누려 할 때, 이를 시기한 마귀는 우리 안에 거점을 두고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좋지 않은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귀가 “교제”를 방해하기 위해 거점을 만들 수 있는 요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를 괴롭게 하는 “쓴 뿌리”(히 12:15)와 성도들 간의 “불신과 증오,” 그리고 자신이 뭔가 된 줄로 생각하는 “자부심”(자존심)인 것이다.
“쓴 뿌리”는 자기 자신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자신의 육신적인 언사나 행실이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미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마귀는 그러한 겨자씨만한 것을 거점으로 충분히 큰 나무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마 13:31,32).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논리나 주장, 모호한 논쟁거리 혹은 죄와 거짓 교리의 누룩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혼란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막는 일은 “진리의 지식”이 많은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나누어 져야 할 몫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러한 것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로 다가서자. “순수한 질문”이라는 핑계로 논쟁이 될 만한 것들을 교제의 자리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경험했던 간증과 각자가 주님 안에서 성숙해진 모습을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일반적인 이야기를 교제 안으로 가져올 수 있지만 세상적으로 치닫고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 이야기거리들을 피해야 한다. 또한 사람은 감정을 지닌 존재이기에 어떤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어떤 말도 꺼내지 말자!
“불신과 증오”는 어떤가? 『험담하는 자의 말들은 상처와 같이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당사자가 없는 가운데, “그 형제가 어떻다느니, 저 자매는 어떻다느니” 따위의 험담이나 비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어울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팔을 가지고 자신의 다리를 찢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는 자해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 간의 불신과 증오는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분열을 일으킨다. 결국, 실족한 성도들은 “사람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어떤 추종자를 따라 “배교”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일찍이 사탄은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자였다. 사람의 본성은 “자존심”이 상하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벽을 치기 마련이고 사탄은 이러한 감정들을 이용하여 그에게 허황된 자부심을 심어 주기도 한다. 때로는 한 그리스도인이 그 동안 맺은 “열매(?)”들을 근거로 사탄은 그에게 자부심을 심어 놓기도 한다. 그러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기보다 신앙적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든다. 교제는 결코 누가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다.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들보다 존중하고 자기 일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돌아보는 시간인 것이다(빌 2:3,4).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통해 교훈과 도전을 얻고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신앙적인 수준의 차이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아무리 “성숙한 어른”이라도 “어린아이”에게 배울 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부심은 또한 교리적인 헛된 논쟁이나 다툼과 허영을 불러일으켜 아름다운 교제에 누를 끼치기도 하고 더러운 길로 잘못 인도하기도 한다(히 12:15b, 신 29:18,19). 자기가 알고 있다는 “진리의 지식”은 유익은커녕(고전 10:24) 오히려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칼과 독이 되기도 한다. 『현명한 자의 혀는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나, 어리석은 자들의 입은 어리석음을 쏟아 내느니라』(잠 15:2). “진리의 지식”은 현명한 사람들의 입에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빛을 발하는 것이지, 논쟁이나 다툼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입에서는 그 가치가 떨어지고 우습게 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에서 언급된 은사들을 주신 목적을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는 데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실제적인 지침들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엡 4:12-16).
1. 과연 우리가 나누는 교제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인가?(12절)
2. 우리의 교제 안에 섬김이 있는가?(12절)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있는가? (12,16절)
4.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 됨에 도달하도록 서로를 돌아보고 있는가?(13절)
5. 헛된 교리적인 논쟁에 휩싸이고 있지는 않는가?(14절)
6.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15절)
7.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15절)
『둘이 하나보다 더 나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수고에 대한 좋은 상을 가짐이라. 이는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의 동료를 일으켜 세울 것임이라. 그러나 혼자 있는 자가 넘어지면 그에게 화로다. 이는 그를 도와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음이라. 또한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서는 어찌 따뜻할 수 있으리요? 만일 누군가가 그를 압도하면, 두 사람이 그 자를 저항하리니 삼겹줄은 쉬 끊어지지 아니하는도다』(전 4:9-12).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올바르게 형성되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더 큰 힘이 모아지고 우리의 주님을 더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