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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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보다 귀한 그리스도인의 부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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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3월호>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말들이 있는데,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이다. 국가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청년 실업과 빈부 격차 심화와 같은 문제들이 많은 이들에게 피부 깊숙이 와 닿는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인 경기 불황과 맞물려 있다. 즉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 최고 갑부들 중에 3분의 2가 "금수저"가 아닌 "자수성가형"이라 하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한 그러한 통계가 신선한 도전도 자극도 되지 못한다. 지금은 10명 가운데 2명만이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계층 상승이 가능하고 나머지 80%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게서 큰 금액의 부동산을 물려받아 "종합부동산세" 납부 의무 대상이 된 "미성년자들"이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생존가계부"까지 작성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 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이 곧 "헬조선"을 벗어나는 길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이 "헬조선"은 흥미롭게도 조선 시대에도 있었던 생각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그의 책에 『처음부터 도적과 양반이 따로 없다. 태어나기를 잘못하면 도적이 되고, 운수 좋게 잘 태어나면 양반이 되는 세상이다. 가뭄이라도 들거나 전염병이라도 돌면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저절로 떼를 이루어 도적이 된다. 그래서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다.』라고 기록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노력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문제는 그 안에 살며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을 말할 때 그것은 세상적 계급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성도가 있을 수 있고, 보다 남루하게 입은 성도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소유의 유무에 따른 계급이라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성도의 믿음을 외모로 판단하며 차별하는 것을 금하셨다(약 2:1-4). 교회는 금이나 진주나 비싼 옷으로 단장한 사람이 활보하는 곳이 아니라, 검소한 옷차림과 경건함과 선행으로 단장한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는 곳이다(딤전 2:9,10). 학력과 재력과 외양이 아닌 성경대로 믿는 "믿음"으로 존중받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십자가를 걸어 놓고 교회라 자처하며 나서더니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을 신약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이 "헬조선"의 시대에 "미혹된" 혼들이 한 번쯤 기웃거려 볼 만한 곳으로,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이다.
그들이 소위 "희망의 신학"이라 부르며 가르치는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론"은 요한삼서 1:2의 말씀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혼이 잘됨같이 네가 번성하고 강건하기를 바라노라.』 그들은 이 구절을 기초로 해서, 모든 믿는 자들이 부유하고 건강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속죄의 유익이 혼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네 혼이 잘됨같이』) 현 생애에서의 부와 건강에까지 미친다는 것이다(『네가 번성하고 강건하기를[prosper and be in health]』). 모든 성도가 이 세상에서 부와 건강을 누리며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번영 신학"은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가 지극히 사랑하는 가이오에게(1절) 그의 혼이 구원받은 것처럼(속죄) 또한 번성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 목사는 한 개인에 대한 사도 요한의 바람을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바람"(wish)은 "교리"(doctrine)가 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로마서 15:26에서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야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모아 기부했다. 은사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고린도 교회에도 가난한 성도들은 있었고(고전 11:22), 사도 바울과 가까이 지냈던 디모데(딤전 5:23)와 트로피모(딤후 4:20)는 질병에 시달렸다.
신약 교회 시대에 가장 신실한 성도로 통하는 바울 역시 평생 동안 부유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약한 것들』(infirmities, 질병)을 자랑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궁핍』을 기뻐했다(고후 12:10). 또한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의사 누가를 데리고 다녀야만 했다 (갈 4:13, 골 4:14, 딤후 4:11). 그럼에도 바울은 어떤 은사주의자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영적인 능력과 거룩함을 유지했다 (빌 3:10, 고후 11장). 그러니까 질병도 바울의 믿음을 흔들지 못했던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가난과 질병은 결코 "믿음 없음"의 표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부요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고린도후서 8:9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 이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번영 신학"을 위해 오용하는 대표적 구절이다. 그들은 『부요하게』라는 말씀에서, 성도가 이 멸망할 세상에서 돈 많은 부자로 사는 것에 초점을 맞췄지만 바울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다.
문맥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과 관련 있으며(고후 8:1-6), 본문 9절을 기록한 목적은 고린도 교회의 "현재의" 풍족함으로 다른 가난한 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함으로써, "후에는" 그 교회의 풍족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서로 간에 균등함이 있게 하려는 것을 알려 주려는 데 있었다(고후 8:14). 바울은 이 점을 가르치려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한 본을 원칙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된 것처럼, 고린도 교회가 자신이 가진 것을 떼어(즉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되어") 다른 교회를 부요하게(즉 "풍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잘 이해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과 그에 따른 성도의 부요하게 됨이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우선 우리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가난하게 됨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마리아)이 출산 후 정결례를 위해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던(레 12:8, 눅 2:24)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가난하셨던 것이다. 자라서는 머리 둘 집도 없이 사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자기 머리 둘 곳조차 없노라."고 하시니라』(마 8:20). 지금으로 보면 전형적인 "흙수저 계급"이셨지만,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데"에는 이런 육신적인 시각을 초월한 어떤 영적이고 가장 실제적인 의미가 있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지니셨던 셋째 하늘의 부요하심을 버리셨음을 의미한다(빌 2:5-8).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빌 2:8)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는데,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복을 받고"(엡 1:3) 또 하나님의 양들로서 "풍성한 삶"(요 10:10, 시 23:1)을 살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성육신을 통해 반사적으로 유익을 얻어 부요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이신 주님 자신까지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얘기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모든 성도들의 구주이시다.
지역 교회 안에는 속칭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성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것을 과시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후 10:17).
예수님께서 각 성도에게 주신 풍성한 삶에 만족하고,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영원을 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이다. 영원에서 누리게 될 풍성함은 형체가 사라져 가는(고전 7:31) 세상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갖고 계셨던 찬란한 영광을 우리가 눈으로 목도하며(요 17:5,24) 누리게 될 영생의 복은, 그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는 경이로운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니』(히 11:1).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현 세상을 잠깐 살면서 항상 믿음으로 해야 할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이 없으리로다...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요... 진실로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1,4,6)이어야 한다. 어떤 물질도 주님과의 동행을 대신할 수 없다. 지옥에 가야 할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야말로 영원한 "금수저"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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