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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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복지의 헛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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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10월호>

기독교 사회복지의 헛된 이상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마련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 동정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오늘도 차갑고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국가가 외면하는 일들을 마냥 좌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사랑과 이상’을 가슴에 품은 채 두 손에는 ‘빵’을 들고 암울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교회들 역시 예외가 아닌지라,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로 ‘사회복음’을 표방한 구제사역은 지금까지도 교회들의 중심 사역이 되어오고 있다. 노숙자 및 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교회, 고아들을 돌보는 교회,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교회, 장애인 및 비장애인 통합 목회를 시행하는 교회, 지역 내 복지자원을 네트워킹하여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교회, 심지어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교회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 교회들은 소외된 이웃을 하나로 끌어안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알게 모르게 노력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재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지난 8월 20일엔(7일 동안) 대내적으로는 지금까지의 공헌을 치하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행사가, 대외적으로는 기독교 사회복지 사역의 실상과 결실에 대해 알리고 기독교 이미지를 쇄신하는 행사가 열렸다. “행복한”(행복한 복지 한국의 약칭)을 슬로건으로, “이웃을 품에 안고 희망 여는 한국 교회”를 주제표어로 내세우며 치러진 “기독교 사회복지 엑스포 2005”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려는 교회들이 “행복한 복지 한국”을 건설해 보겠다는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땅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아무도 선뜻 나서서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헌신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러나 본 행사에 대한 각종 평가나 소외된 이들을 향한 “교회들”이 갖고 있는 목적과 비전에는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들을 상당수 발견하게 된다. 바울도 권면한 바, 그리스도인은 열성을 가지되, 『지식을 따라』야 하고(롬 10:2), 선한 일들에 힘쓰되 정해진 『규칙대로』 해야 한다(딤후 2:5). 그렇게 할 때,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그 “열성”과 “노력”은 성경적인 기준에 부합되어 (세상의 존경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과 (썩어질 상패가 아닌) 영원한 면류관으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본 행사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성경적으로 바로잡아 보았다.

첫째,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본 행사가 치러지는 동안 참석자들의 일관된 관점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교회가 사회를 섬김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교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정체기에 있는 한국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지금까지 교회가 이런 사회적 책임에 소홀히 했기 때문에 그 본질이 퇴색되고 성장은 하향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행사 대회장)가 개막식 대회사에서 밝혔던 바 이미 한국 교회는 “사회복지 사업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상태다. 물론 사회복지 투자의 전체적인 규모를 보면 그 비율이 내포하는 의미가 크진 않겠지만, 비기독교 단체에 비해 차하는 비중이 그 정도라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소홀히 했다고 말할 정도까지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과장된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가 교회의 부흥이고 성장이라면, 교회의 왜곡된 사명을 부추기는 행사(4년마다 개최될 예정임)를 중단하고 진짜 본질적인 사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이것이다. ① 구령하는 교회(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②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여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양성하는 것). ③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선교하는 교회(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반면 「주는 자의 행복」(눅 6:37,38)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던 김삼환 목사(명성교회)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교회가 은혜를 받아서 더 잘되는 길은 수많은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섬길 자를 찾아내고, 더 많은 봉사에 한국 교회가 일어나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사랑과 봉사를 하는 데 힘을 모으며 일을 하고 많은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 교회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왜곡하면서까지 소외된 이웃을 섬기자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잃어버린 혼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적인 이상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데 온 에너지를 모아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복지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아니라 정부의 본질적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교계지도자들보다는 더 현명했다. 그는 폐막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복지정책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둘째,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진정한 복음주의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 신학의 선각자적 인물로 알려진 미국의 로널드 사이더 교수는 본 행사에 참여하여 “성경적 균형”을 이루는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연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만 노력을 기울인 나머지 전반적인 사회 문제에는 등한시한 복음주의자들의 불균형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교회는 복음만이 아니라 사회복지 활동과의 단절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그가 활동한 미국에는 적용될지는 몰라도, 최소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 특히나 성경적인 복음이 아닌 사회복음에 치중해 온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할 수 있다.
사이더 교수는 계속해서 “한국 교회가 복음주의와 사회복지를 하나로 묶는 일을 감당하길 바란다.”며, 진정한 복음주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죄는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죄도 포함되어 있기에, 사람을 바꾸려는 노력은 물론 “사회적인 제도 개혁”에도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천국복음과 연관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서 올 『새롭게 되는 때』(행 3:19)에 이루어질 일들로, 그 때가 오면 모든 만물이 회복되고(행 3:21), 사회적인 부조리, 경제적인 불평등, 빈부의 격차, 소외된 이웃, 장애인들의 문제, 고령화, 가정해체 등 오늘날 교회들이 우려하는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사이더 교수는 탈세한 돈을 돌려준 삭캐오의 예를 들면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과 맺는 관계만으로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살기 좋게 변화시켜 나가는 일”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이것은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에 교회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못하면(딤후 2:15) 아무리 고귀한 이상과 열성이라도 헛된 이상이나 지식에 따르지 않은 열성이라는 책망만 들을 뿐이다. 천국복음과 은혜의 복음을 한데 묶어 버리면 오히려 다른 복음(갈 1:6,8)이 될 뿐이며 진정한 복음주의를 말하고자 한다면 사회복지와는 분리된 “은혜의 복음”만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본 행사 내용을 보면 사회복지 측면을 너무도 강조하여 사이더 교수가 역설했던 “성경적 균형”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무색하게 되었다.
셋째,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에큐메니칼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틈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연합을 배제한 어떤 형태의 연합도 거부해야 한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면서까지 교회적으로 연합하여 온 힘을 집결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동안 지켜온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바른 신념마저도 저버리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본 행사는 정부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 상태라 교계 주요 목사들뿐만 아니라 정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향후 ‘복지한국’ 건설을 위해 정부와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지현 스님도 참석하여 ‘사회복지영역에 책임을 갖고 있는 종교단체들이 종교를 초월해 엑스포를 함께 열어도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복지라는 공통분모는 에큐메니칼을 위한 좋은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교계에서는 ‘교리와 신학은 교회를 분열시키지만 섬김과 봉사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한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광성교회의 서북노회 가입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장로교 통합과 합동 측에서 본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에 나온 평가였다.
이와 같은 평가와 행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이로 인해 분리된 기독교 교단들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종교들까지 하나로, 하나로 연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단호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비성경적 교리를 실행하는 교회와는 연합하지 말아야 한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다른 종교 더 나아가 정부와는 결코 연합하지 않아야 한다. 정부와 결탁한 기독교의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암흑 시대를 낳은 로마카톨릭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넷째, 소외된 이웃을 돌보되 진정한 이웃 사랑의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옥한흠 목사는 ‘사회복지가 사랑을 실천하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며 “사회복지의 대상은 우리의 이웃이며 그들에 대한 사랑 실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영혼 구원을 위해 힘쓰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빼놓지는 않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정한 이웃에 대해서는 바른 지식을 겸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이웃은 구원받은 지체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의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이기 때문이라』(엡 4:25).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세워 줄 필요가 있다(롬 15:1,2). 교회가 힘써야 할 사회복지의 일차적인 대상은 교회 안의 지체들이다. 이러한 사역을 온전히 수행한 이후에 교회는 확장된 개념의 이웃에게로 눈을 돌려 그들의 필요를 채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진정한 이웃 사랑은 결코 “사회복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일 뿐 진정한 이웃 사랑은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에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사회복지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이웃 사랑에 대해 온전한 본을 보인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같다. “부스는 커다란 베이스 드럼을 들고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는가?’라는 찬송을 했다... 거리를 방황하던 문둥병자들이 그 행렬을 따랐고, 휘청거리고 있던 주정뱅이들도 어두운 도랑에서 기어 나왔고, 매춘부들도 골목길에서 마약으로 창백해진 얼굴과 술 냄새를 풍기며 따라 나왔다... 부스는 때로 행렬을 멈추고 기도를 할 때도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1)
구제사역으로 잘 알려진 부스는 진정한 이웃 사랑을 ‘빵’이 아닌 ‘생명의 빵’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 소외된 이웃들은 ‘빵’이 아닌 ‘생명의 빵’을 보고 그를 따랐던 것이다.

폐막식 때 선포된 ‘비전선포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한국 교회를 건강한 복지 신학 위에 세우고 모든 강단이 복지 지향적 말씀 선포에 힘쓰며 모든 교회가 복지 인력을 양성 관리하며 복지선교 개발을 위해서 노력한다.” 자, 이것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다루어져야 할 중심 내용이라면 참으로 이 나라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강단은 복지 지향적 말씀이 아닌 죄인의 양심을 찌르고 깨우쳐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하여 복음을 들고 거리로 나갈 그리스도의 군사 곧 부스와 같은 고급 인력을 양성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사회복지는 이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확신하건대, 그들의 슬로건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는 ‘사회복지,’ ‘지상 낙원,’ ‘지상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교회가 기독교 사회복지 사역의 중심에 서 있다면 더더욱 이 나라는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께서는 “행복한 복지 한국을 만듭시다.”라고 외치는 기독교 사회복지가가 아니라, “당신은 어린 양의 피로 씻겨 있습니까?”라고 외칠 수 있는 담대한 복음 전도자를 원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하자. BB


1) 피터 S. 럭크만, 신약교회사, (서울: 말씀보존학회), p.626, 바첼 린세이(Vachel Lindsay)가 기록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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