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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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9월호>

필자가 진리에 무지했던 시절,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 다녔을 때의 일이다. 성결교단에 속해 있던 그 교회는 중소형 규모의 독립 건물로서 소도시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교인들 사이에 담임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려고 그를 신학교에 보낸다는 소문이 은밀히 나돌았다. 그 아들은 비디오 가게에서 남이 보든 말든 세상 영화 테이프를 한 번에 대여섯 편씩 빌려 손에 들고 사택으로 돌아오던 속물이었는데, 아버지 목사는 그런 자에게 교회를 물려주려 했던 것이다. 그 목사는 자기 자식을 성경대로 훈육하여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성도로 키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머리는 명석했는지 그 아들은 교단 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들어가서도 선배들과 교수들 사이에 촉망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들이 그에게서 어떤 영적인 면도 찾아볼 수 없었을 터인데 그를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그 신학교 역시 세상 속물들의 집합소였음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학교는 한국 교회에 세상 인문학을 도입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그 목사의 아들 문제야 철없는 행동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빙산 밑에 훨씬 더 큰 얼음덩이가 잠겨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청년의 일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수면 아래에 더 큰 문제, 곧 “그 아버지의 문제”가 있었음은 너무나 자명했다. 필자가 그 목사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때 친척 형의 권유로 재미 삼아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이것저것 칠판에 써 가며 성경을 가르친 뒤 교인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마치는 기도를 했는데, 자신은 눈을 뜨고 마이크를 입에 댄 채 지우개로 칠판을 지워 가며 기도를 했다. 아직 교회가 뭔지 몰랐던 초등생인 필자의 눈에도 그것은 목사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교인들을 속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교회를 처음 찾아간 아이의 마음에 ‘저것이 기도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실로 그는 자기 교인들은 물론, 하나님마저도 업신여기는, 목회 아닌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에 필자는 그 교회에 청년으로 출석했다. 그때는 거듭난 상태였는데, 학업을 위해 상경해야 했기에 어느 주일 오후 해가 질 무렵 저녁 예배를 마친 뒤 작별 인사를 하러 목양실로 올라갔다. 목양실은 교회 맨 위층에 있었기에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데 닫힌 문에 노크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분명 그 목사가 예배 후에 목양실로 올라가는 것을 봤는데도 방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방 안이 이상하게도 어둑했다. 소파에는 목사가 홀로 앉아 있었고, 등 뒤 창문으로 비쳐 드는 금빛 석양이 그의 앞쪽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헤, 헤, 헤!”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양실에는 목사 혼자였는데, 그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방에 불도 켜지 않고 들어간 것이다. “헤, 헤, 헤!”는 석양에 그림자가 진 목사의 어두운 얼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고, 그의 손가락은 은행원이 돈다발을 세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소파 앞 탁자에는 저녁 예배 때 가난한 교인들이 강대상에 갖다 바친 헌금 봉투가 쌓여 있었다. 목사는 그것을 들고 목양실로 올라가 돈을 세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노크하는 소리도 못 들었고 문이 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의아해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내려왔는데 그때는 그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헤, 헤, 헤!” 하는 웃음소리와 돈을 세는 엄지손가락의 희미한 움직임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날 필자가 그동안 믿고 섬겨 왔던 담임목사에게서 본 것은 “더러운 이익을 탐내는 한 삯꾼”의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을 때 그 교회가 후임 문제로 갈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다시 세월이 지난 뒤에는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의 행적을 돌아보건대, 그는 지옥에 간 것이 분명했다.

어둠의 자식처럼 어둑한 방에서 홀로 헌금을 세며 웃던 모습을 목양실 밖의 교인들이 알지 못했듯이, 자기 담임목사의 밀실 행위를 알고 있는 교인들이 한국 교회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주님께서는 목사의 자격 요건으로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딤전 3:3, 딛 1:7)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이 나라 교회들에는 순수한 의도로 목회하는 이들이 있는 것인가? 그런 목사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목사들이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않고 성경대로 사역했다면 한국 교회가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종교적 혹은 사회적 권위를 가진 자들과, 예수님에 관해 오해한 자들이 돈에 탐심을 부리는 사례들을 언급하는데, 본 논단에서는 그와 같은 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돈과 목사에 관한 교훈을 짚어 보고자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


첫째, 베드로후서 2장에는 거짓 선지자 발라암과 그로 대표되는 거짓 교사들이 나온다. 『그들이 바른 길을 버리고 빗나가서 브올의 아들 발라암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으나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으니 말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여 그 선지자의 미친 짓을 막았느니라』(15,16절). 발라암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이며, 신약 교회 시대는 그런 자를 거짓 교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1절). 이와 연계하여 바로 앞의 문맥을 보면(벧후 1:16-21),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관한 성경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속죄를 부인하고(『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1절), 탐욕을 품고 지어낸 말로 교인들에게서 이득을 취하는 데 있다(3절). 쉽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생계형 목사들이 성경과 무관한 내용을 교인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마음이 탐욕으로 단련되고 발라암처럼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14,15절) 자들의 행위를, 성경은 발라암에 빗대어서 『그 선지자의 미친 짓』(16절)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말 못 하는 나귀가 그의 미친 짓을 사람의 음성으로 책망했듯이 “짐승에게 책망받아야 할 정도로 형편없는” 목사들이 교회들의 강단을 채우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인 것이다.


둘째, 예수님께 자기 형제가 가져간 유산을 나눠 달라고 요청하던 자가 있었다. 이 자는 예수님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를 했었다. 『그러자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내 형제에게 말씀하셔서 유산을 나와 함께 나누라 하소서.”라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위에 재판관이나 재산 나누는 사람으로 세웠느냐?”라고 하시니라』(눅 12:13,14). 예수님께 유산 분배 문제에 개입해 달라고 요구하는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주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주여』(마 8:2)라고 했던 문둥병자와 달리, 주님을 그저 인간 『선생님』 정도로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인간” 정도로만 인식하는 자들은 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주님을 “돈 문제” 따위에 개입시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 하나님』(요일 5:20), 곧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심을 유념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라고 말씀한다. 한편 한글개역성경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그”로 변개시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려 버렸는데, 그런 성경을 쓰는 자들이 예수님의 일을 “돈”과 같은 인간의 일로 국한해 버린 것이다. 섬김의 결과를 돈으로 평가하는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자들임을 자인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자들로 강단이 채워진 라오디케아 시대의 교회들은 그런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마지막 때의 교회들은 자기 교인들을 속여 갈취한 돈으로 막대한 부를 자랑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교회들을 향해 다음 세 가지 사항을 권고하신다(계 3:18). 1. 주님께로부터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라. 2. 흰옷을 사 입음으로써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라. 3. 안약을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라”는 말씀은, 그들에게는 금으로 비유되는(벧전 1:7) 믿음이 없기에 믿음의 시련이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믿음이 전무한 교회들”임을 보여 준다. “그들이 흰옷을 입지 않아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은 그들에게 『성도들의 의』(계 19:8)인 “흰 세마포”가 없다는 뜻이며, 결국 마지막 때의 배교한 교회들이 벌이는 모든 종교적 행위는 성경적 선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 개개인의 의가 전무한 것이다. 또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명령은, 그들이 현재 영적으로 눈멀어 있는 소경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 교회를 만든 주범은 다름 아닌 자칭 “목사들”이다. 성경적으로 목사 자격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을 인간 “선생님”으로 오해하여 그분을 세상에서 돈 문제나 해결하는 분 정도로 가르친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유산 분배에 끌어들인 사람 외에도, 탐심의 죄로 구원받지 못한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온다(눅 18장).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직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게 되리니,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라. 그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슬퍼하니, 이는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더라』(22,23절). 이 젊은 관원은 어릴 적부터 계명들을 지켜 왔다. 그는 주님을 『선한 선생님』(18절)이라고 부르며 자기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앞서 유산 분배를 요청한 자와 달리 주님을 하늘에서 오신 『선생님』으로 알고 영생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나은 인물이었다. 주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20절)라고 하는 십계명의 내용을 언급하셨는데, 그 부자 관원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지켜 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번에 그의 문제의 핵심을 찌르셨다. 『아직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게 되리니,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22절). 주님께서는 그 젊은 관원에게 십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의도적으로 한 가지를 빠뜨리셨으니, 곧 “탐심”에 관한 마지막 계명이었다.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큰 부자였던 그는 탐심을 정확히 지적받자 몹시 슬퍼하며 영생을 거부한 채 떠나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신다(렘 17:10). 한국 교회에도 젊은 관원처럼 나름대로 신실하게 보이려 하는 목사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탐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목사들이 돈에 대한 내밀한 탐욕을 품고 있는 것이다! 탐심은 정욕의 본질이요(롬 7:7) 우상 숭배이기에(골 3:5)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바른 성경을 택하면 교인들이 다 떠나 버려 생계가 위협받기에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용기 있게 택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이 있다. 그들은 목회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한다! 어떤 교회가 바른 성경을 택하는 데는 믿음과 결단이 필요한 법인데, 매 주일 들어오는 헌금에 대한 탐심으로 용단을 못 내리는 것이다.


넷째, 사도행전 24장에는 돈을 바라면서 특별한 용건도 없이 죄수인 바울을 반복적으로 불러들인 펠릭스가 등장한다. 『그는 또한 바울이 자기에게 돈을 주리라고 바랐는데 그러면 그를 놓아주려고 하였더라. 그런 연유로 그를 더 자주 불러서 함께 이야기하더라』(26절). 로마 총독 펠릭스는 이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 잘 알았고(21,22절),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해 들을 정도로 종교심도 있었다(24절). 심지어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해 말할 때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했다(25절). 하지만 그는 구원받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 뒤로는 바울을 더 자주 불러 함께 이야기했는데, 이는 그가 바울이 눈치를 채고 돈을 주면 놓아 주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펠릭스는 그가 가진 권세와 자기가 법을 집행한다는 점을 악용하여 짭짤하게 돈맛을 본 속물이었다. 이를 삯꾼 목사에게 견주어 보면, 목사로서의 권위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헌금을 유용하고 교인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모습에 빗댈 수 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세상 권세자나 자칭 목사나 전혀 다르지 않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심방을 반복적으로 나가는 목사들은 교인들이 쥐여 주는 돈 냄새를 맡고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사례비”를 챙기는 자들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멸망 전 이스라엘에 주신 책망이 딱 어울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대가없이 문을 닫을 자가 누가 있느냐? 너희는 대가없이 내 제단에 불을 지피지 않는도다』(말 1:10).

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하는 일을 피하라고 명령했다(딤전 6:10-12). 성도들에게서 존경과 섬김을 받는 목사의 자리는 자칫 돈에 취약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왜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말라고 경고하셨겠는가? 목사가 되면 그와 같은 유혹이 항시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좋아하는 목사는 삯꾼이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자가 아니다. 교인들은 그런 자들을 주의 종으로 생각하면서 따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깨우치고 돌아서면 다행이지만, 바른 성경과 그에 따른 권면을 끝끝내 거부하고 그 완고한 무지를 끝까지 고집할 때는 결국 아무런 치유 방법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고전 14:38). 즉 무지는 변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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