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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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후회,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원로목사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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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2월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구원을 위한 회개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사망에 이르느니라』(고후 7:10).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로 인해 슬퍼하게 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슬퍼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슬픔”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상의 슬픔”과는 달리 구원을 위한 회개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눈물과 회개는 주님 보시기에 값진 것이다. 이는 “세상의 슬픔” 가운데 후회는 했어도 스스로 목을 매고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들어가 버린 유다(행 1:18,25)와 달리, 주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른 슬픔”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왔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들은 크고 작은 여러 모임들을 통해 그들의 신실하지 못함을 회개하고 또 회개해 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2006년 릭 워렌 목사 초청집회, 2007년 한국 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를 치르면서 그들의 눈물의 회개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그들의 “슬픔”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다시 목사들은 신년을 맞이하여 “회개”를 위한 모임을 마련했다. 지난 1월 11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주여, 우리를 살려 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신년 하례회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는데,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목사) 등 핵심적인 원로목사들을 비롯한 여러 목사들은 각성, 회개, 사랑, 성결, 통일, 다섯 가지 주제로 발표의 시간을 가졌고 각 주제와 관련된 기도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때늦은후회. 이것은 옥한흠 목사의 “슬픔”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25년간의 목회에 대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내 목회 때 이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한 일이 몇 번 있느냐? 한 번도 전하지 못한 말씀이 수두룩하다는 겁니다. 왜 전하지 못했느냐? 교인들이 부담스러워 하니까. 또 그런 말씀을 자꾸 전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목사처럼 들리니까 자연히 기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집에서 성경을 보면서 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없이 가감하지 않고 말씀대로 전하는 목회자의 양심을 빼먹고 25년간 사역을 했구나 하는 저 자신의 가책과 아픔을 많이 느낍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참된 목회자가 가야 할 길목에 중요한 경고문 하나를 세워 두셨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딤후 4:3). 사실 옥목사뿐 아니라 이 나라 수많은 목사들이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로 강단을 채워왔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드러나게 하여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이건만, 그들은 실로 “목회자의 양심”을 저버렸던 것이다. 높은 위치, 화려한 외관, 함부로 올라가지 못할 성역으로 강단을 “구별하려” 하면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단을 “거룩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계속되는 옥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목회자로서 할 말 다 합니까? 말씀대로 가르칩니까? 죄를 죄라고 똑똑하게 정말 가슴을 치면서 설교할 수 있습니까? 무슨 설교하려고 하면, 앞에 앉아 계신 어느 장로님 걸려 못하고, 무슨 설교하려고 하면, 어느 분이 걸려서 못하고, 무슨 설교하려고 하면, 또 교인들이 마음 상해서 교인 줄어들까봐 못하고, 이리저리 못하다 보니까 우리는 성경의 반 토막은 잘라내고 설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등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을 보더라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 등 신약의 어떤 사도들을 보더라도 크리소스톰, 피터 왈도, 사보나롤라, 위클리프, 후스, 루터, 웨슬리, 무디, 스펄전, 조지 뮬러, 빌리 선데이, 밥 존스 시니어, 프랭크 노리스 등 신약 교회사의 그 어떤 설교자들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설교자들로서 그런 종류의 회개를 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없다. 그들 역시 인격이나 사역에 흠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회개한 적이 종종 있었다 해도, 25년만큼이나 긴 사역 기간 동안 사람들이 두려워 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땅히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지 못했다고 가슴을 쳤던 설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최소한 설교자로서 기본적인 책무와 양심을 지키는 것, 곧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결코 소홀함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 중 누군가가 소홀히 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설교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신실한 성도들의 입에서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국 교인들의 존경을 받아 온 옥목사가 (목사로서 성경에도 없는 은퇴를 한 이후) 자신의 25년 사역을 돌아보면서 토로한 그 “슬픔”이 아무리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한들, “그런” 회개에 대해 함께 슬퍼하며 공감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라도 회개했으니, 함께 동정하자는 말인가?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설교로 잘못된 길로 들어선 수많은 교인들의 25년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긴 기간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에 속아 온 교인들의 지난 25년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단 말인가? 때늦은 후회이리라.
설령, 그 “슬픔”에 동정한다 해도 역시나 공감할 수 없는 것은 그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목회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이는 목회자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에만 있지 않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자체”에도 귀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것은 목회자의 양심이기 이전에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라는 사실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가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슬퍼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가슴을 쳤어야 옳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슬픔. 또 한 명의 원로목사라 할 수 있는 조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양심의 가책을 털어 놓았다. “우리는 교회 짓기에 너무 바쁘고, 교회 치장하는 데 너무 바빠서...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양심에 가책이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테레사 수녀의 헌신과 심장병원 건립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일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누는 정신”을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슬픔을 토로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났다(롬 5:8). 그리고 그 사랑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 전파되었고, 그와 같은 복음 전파를 통해 실천되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거리낌없이 해주는 것도 없다(행 20:24-27). 그러나 이런 사랑은 오늘날 교회들의 사역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제1계명보다 제2계명을 더 중시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사랑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는 거기에 안주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사랑의 실천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죄인들의 병들고 헐벗고 버림받은 영적인 상태를 보고 눈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조목사의 회개와 슬픔은 결코 이런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선진 교육을 도입하고, 병원을 짓고,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하며, 여성 교육과 해방 운동을 하고, 애국 운동을 주도하는 일들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 문을 열어 놓았던 초기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오늘날 교회들이 잃어버렸다는 것에 그는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이웃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라도 나누는, 그리고 남을 치료해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좋은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으셨습니까?... 피투성이가 된 상처 입은 사람들을 부둥켜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의 관심사는 오직 사회에서 소외받는 불쌍한 약자를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돌보지 못한 것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 1차적으로 맡겨진 사역과 사랑의 실천은 이런 것이 아니다.
대형 교회 안에서 부요해진 그가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슬퍼하면서도, 자신의 비성경적인 복음과 은사주의 거짓 교리로 사람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왜 슬퍼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그의 부요함이 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물질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슬픔은 하나님의 방식을 따른 슬픔이 아니었다.

한국 교회들은 그들 스스로도 무언가 잘못 되어 있다는 것은 느끼면서도 정작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을 슬퍼하고 회개해야 할지를 모르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한국 교회가 자신을 바꾸지 못하는 힘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원로목사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할 줄 모르기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슬퍼하였던 이것이 얼마나 간절하게 너희 안에서 역사하였으며...』(고후 7:11). 만일 그들이 바른 성경과 바른 진리를 찾고 그것을 따를 의향만 있다면, 이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뜻대로 온전히 슬퍼하고 회개하게 되어 그들 안에 그들을 변화시킬 만큼 역사하는 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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