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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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칭의론을 배격하는 임태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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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4월호>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에만 그 근거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가 믿음의 선진들이 찾아놓은 성경의 진리들과 그들의 실행들을 배격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른 성경이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측정하여, 위대한 성도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개혁자들과 각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셨던 하나님의 종들의 훌륭한 모습들은 본받고, 그들의 오류는 버려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년)는 모든 카톨릭적 요소들을 극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신약성경의 칭의 교리를 밝히 드러낸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최근 호서대 신학과 임태수 교수는 “루터 칭의론의 문제점”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신문>에 칼럼을 실었다(2007년 3월 11일, 제20면).
1. 루터 칭의론의 정당성
다음은 임태수 교수의 주장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사상은 개신교회에 행함을 배제하고 공허한 믿음만을 남겨 둔 결과를 낳았다. 실천과 윤리적 차원이 결여된 개신교회를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루터의 칭의론 곧 “행함이 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논쟁의 여지없는 신약 교리다. 만약 임교수가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강단에서 가르치거나 글을 쓰면 안 된다. 그는 먼저 바른 성경의 빛 앞에 나아와서 자신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인지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롬 3:2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의로운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피흘리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롬 3:25; 4:25). 우리가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심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주시며(고후 5:21),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선포하신다(롬 3:26).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선함이나 의로움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3:27, 엡 2:9).
당시 로마카톨릭은 온갖 성사와 의식, 성인들과 형상 숭배, 면죄부 판매 등과 같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었다. 루터는 로마카톨릭의 이러한 영적 흑암 가운데서 이 칭의의 교리를 찾아내어 복음의 진리를 밝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임태수 교수는 성경의 칭의 교리를 비평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저주함은 물론 선의의 독자들을 다시 로마카톨릭의 영적 흑암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4,28).
2. 칭의와 행함의 관계
임교수의 주장 - 『그러나 사람들은 루터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선행/행함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오해 내지 곡해하고 있다... 그런 곡해를 할 수밖에 없는 주장을 한 루터 자신에게 보다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칭의와 행위와의 관계를 정연하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야고보서의 교리적인 위치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불렀다 .1) 또한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 사역을 믿는 자들에게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어 있다는 진리를 이용해 왔고, 구원의 은혜를 죄를 짓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원파다. 그러나 무지한 자들의 오류를 빌미로 신약성경의 칭의 교리를 비평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자신의 혼을 저주할 뿐이다. 호서대 신학과 임태수 교수는 칭의가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며, 칭의와 믿는 자의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임교수는 성경의 진리를 증거한 루터만 탓하는 것이다. 임교수는 바울이 성경적 칭의 교리를 변질시키는 자들에게 어떻게 경고했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혼란케 하는 자들이 심지어 베어져 버리기를 원하노라』(갈 5:12).
그러면 칭의와 행위와의 성경적 관계는 어떤 것인가? 칭의는 행함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롬 4:5), 행함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갈 3:3,10). 그러면 칭의의 교리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른 선한 행위들로부터 우리를 이탈케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선한 행위들을 위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다(엡 2:10). 선행은 칭의의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칭의의 목적인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들과(행 15:1), 행위로 의롭게 됨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단들이 있었다(행 15:5). 동시에 의롭게 된 사실을 오히려 죄를 짓는 계기로 삼으려는 자들도 있다(롬 6:1). 성경은 양극단 모두를 배격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의 공로나 행위가 아니라, 은혜가 칭의의 근거이고, 믿음이 그 수단이며, 선행은 이러한 칭의의 목적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의롭게 되기 위해서, 혹은 의롭게 됨을 유지하고자 선행을 하지 않고,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마땅한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롬 6:15-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고 자신을 위해 정결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조금 더 근원적으로 접근하자면, 오늘날 교계에 칭의와 구원과 행위에 관한 오해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롬 14:10). 만약 혹자가 구원만 받고 바른 성경과 바른 신앙이 정립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는 방향도 종착지도 결산 시점도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당연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안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경적 세대주의와 전천년주의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백보좌 심판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구분하지 못한다. 전자는 천년왕국 이후에 이뤄질 마지막 심판으로 모든 시대의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판결을 받고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는 심판이다(계 21:15-19). 후자는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심판으로 각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전 3:1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순수하고 신실하며 온전하게 섬겼는지, 우리가 이룬 행위들의 질을 시험하는 심판이다(고후 5:9-11).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엄격한 주인으로 나타나신다. 성경은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유하노라.』고 말씀한다(고후 5:11).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주어질 상급을 바라며 경주하듯 선한 일들에 진력하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고전 9:24).
종합해서 말하자면, 칭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며 유지된다. 이러한 칭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한 일들을 하게 하기 위한 기반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들을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을 받도록 선한 행위들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성경적 칭의 교리도 선한 행위들의 의미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의 의미도 모르므로 크게 오해하였다.
3.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임교수의 주장 -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말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했지만(롬 3:28), 결코 “오직 믿음으로‘만’(sola) 의롭게 된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
개신교 전체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로마카톨릭의 창녀집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지금, 수많은 배교자들이 성경적 칭의 교리를 내던지고 로마의 품에 들어가고자 한다. 그들이 매번 들고 나오는 것이 루터의 로마서 3:28의 번역이다. 즉 “오직” 믿음은 성경에 없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임교수가 전혀 면밀한 성경학도가 아니며, 성경과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자임을 알 수 있다. 임교수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을 읽어 봤는가? 아니면 루터가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설명과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봤는가? 루터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독일어로 독일인들에게 말하게 한 훌륭한 성경 번역자이다.2) 로마서 3:28에서의 루터의 실제 번역은 “믿음으로만”(allein durch den Glauben)이다. 루터는 로마서 3,4장에서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바를 독일어로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적 문맥적 요구에 따라 “allein”(only)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이다.
루터가 깨달은 신약의 칭의 교리를 비평하는 로마카톨릭 교도들은 그가 자신의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로마서에 첨가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루터가 고의적으로 “allein”(only)을 추가한 것이라면 그가 로마서와 함께 교리적 기초로 삼았던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칭의 교리에 결정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야고보서 2:24에서도 그는 있는 그대로 성경을 번역하였다.3)
우리는 루터가 로마서 3:28에서 “allein” (only)을 추가해야 했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3:27에서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고 말한 부분과 3:28에서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라고 말한 부분의 문맥에 따라 루터가 사도 바울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독일어로 전달되게 하기 위해 “믿음으로만”(allein durch den Glauben/only by faith)이라고 번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교수가 바른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성경의 문맥을 파악하는 실력에라도 도달했더라면, 정직한 루터를 힐난하며 로마카톨릭과 함께 서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카톨릭 교도들이 루터를 비평하고 성경적 칭의 교리를 비웃고 조롱하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을 임교수는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칭의 교리에 있어서 하나님과 바울과 루터는 일치하지만, 임교수는 로마카톨릭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지옥행을 자처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면 임교수는 결국 믿음과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신약성경의 확고한 교리를 보라.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 11:6).
임태수 교수가 신약성경의 칭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은혜에 행위를 더하여 구원받으려는 행위구원론자이며, 지옥의 한귀퉁이를 예약한 구원받지 않은 죄인일 뿐이다. 임교수는 또한 바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신약성경의 칭의 교리를 바르게 전파한 하나님의 사람 루터를 비난하는 죄를 지었다. 그는 교만하고 성경에 무지하여 지옥행을 자처할 뿐만 아니라, 거짓 교리를 유포함으로써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기만하려 한 것이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진리의 영을 따랐다. 임교수는 미혹의 영을 따르고 있으며 자신의 신학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루터와 동행하되 그와 함께 멈추지 말고 진리의 영을 따라 온전한 진리의 길을 주께서 오실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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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틴 루터가 이해하지 못한 야고보서의 교리적 위치와 적용에 관해서는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야고보서>(말씀보존학회, 2001)를 참조하라.
2) 마틴 루터는 에서 그의 로마서 3:28의 번역이 언어적 문맥적 요구에 의한 번역이며, 루터 이전의 자국어 성경들과 저작들에서도 동일하게 이해하고 옮긴 번역들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3) 독일어 루터성경(1523)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롬 3:28 “allein durch den Glauben”(only by faith), 갈 2:16 “durch den Glauben”(by the faith), 약 2:24 “nicht durch den Glauben allein”(not by faith only). 바른 성경의 번역자들의 정직함과 선함이 드러나는 구절들을 진리에 대항하는 자들이 오히려 비방하는 예가 역사적으로 계속 있어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신실한 성도들 가운데서 교만한 배교자들을 가려내는 장치로 사용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