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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하는 법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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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6월호>
성경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씀한다(전 1:8). 또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증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도 말씀한다(전 5:10). 사람은 언제나 더 보고, 더 듣고, 더 갖고 싶어하지만 그럼에도 이 말씀들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그들은 왜 이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첫 사람 아담은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 그것들을 다스리도록 지음받았었다(창 1:28). 그 첫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두 개의 왕관을 거머쥔 온 세상의 왕으로서 그것들을 다스리도록 지음받았다. 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로 인해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태로 전락한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조금 얻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현재보다 더 갖고 싶어하는 탐심이 있다. 탐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 하는 육신의 욕망이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관인 영이 죽어 있기에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육신을 만족시키려고 탐심을 부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고 탐심을 부리면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너희의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색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렇다면 탐심을 버리고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탐심이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이라고 명령하셨다면 당연히 그 지체를 죽이고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을 통해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사도 바울은 온갖 위험과 고난, 배고픔과 헐벗음을 경험했음에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내가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빌 4:11). 바울을 따르는 우리 역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만족을 위해서는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니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들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6-8).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잠언 30:8은 『내게서 허황된 것과 거짓을 제해 주시고, 나를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며 내게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소서.』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이 잠언 말씀에서 사람의 만족이 “부”에 있지 않고 필요한 “양식”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만족을 원한다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마 6:32). 그래서 그 필요를 공급하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나니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후 9:8). 하나님께는 그분께 기쁨으로 드리는 성도가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할 때 그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실질적인 “필요” 또한 그분의 풍요함을 따라 채워 주실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빌 4:19).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행 2:45), 그런 그들 가운데에는 그 누구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행 4:34,35). 이와 같은 내용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가 “필요”해서 그것이 채워졌으면 만족할 수 있지만, 육신적인 “원함”이 발동하면 절대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의 원함은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원함도 결코 가득 차지 않는다(잠 27:20). 그러나 “필요”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만 채워지면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이 잠언을 기록할 당시만 해도 그의 삶의 방향은 “필요”에 맞춰져 있었다. 『내게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소서』(잠 30:8). 그러나 타락 후 그의 삶의 방향은 “원함”으로 바뀌었다. 『내 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억제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 마음이 나의 모든 수고를 기뻐하였고 이것은 또한 내 모든 수고에서 나온 나의 몫이었음이라』(전 2:10). 그러나 그가 이처럼 원함으로 만족을 얻고자 했을 때, 그의 삶에는 부족함만 나타났다. 『그후에 내 손이 했던 모든 일들과 내가 수고했던 수고를 내가 보았더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었고 영의 고통이었으며 해 아래서 아무 유익이 없었도다』(전 2:11). 그는 아내를 얻고 또 얻어서 그의 원함으로 무려 “천 명”이나 두었지만(왕상 11:3), 그가 “필요”로 아내를 구했다면 『오직 하나』만 두고, 그로 만족했을 것이다(솔 6:9). 이 세상은 육신의 “원함”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 세상의 신인 마귀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속삭인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누구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인가? 성도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다. 이것들이 채워졌다면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외에 성도가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육신에 필요한 양식이 있어야 하듯, 영에 필요한 양식이 있어야 온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시더라』(눅 10:41,42). 이 말씀에서 『필요한 것』이란 “말씀”이다. 성경에 따르면 “말씀”은 육신에 필요한 양식보다 더 필요한 영의 양식이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의 말씀들을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역시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 주께서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를 배고프게 하셨으며 너도 모르고 네 조상도 모르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이 무엇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정말 필요한 양식이 무엇인지를 광야에서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필요”한 것이 아닌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원했다. 그들도 솔로몬처럼 “원함”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출애굽을 원했지만 출애굽한 뒤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원함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물을 원했고, 다음에는 먹을 것을 원했다. 물론 이것들은 필요한 것이므로 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기”도 원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원함을 채워 주셨지만 그렇게 원하던 고기를 얻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폭식”으로 나아갔다(민 11:20,33).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성도가 원하면 때로는 그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곧 그의 행사를 잊어버리고 그의 조언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오히려 광야에서 심히 욕심을 부려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니 주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주셨으나 그들의 혼 속으로 메마름을 보내셨도다』(시 106:13-15). 광야의 이스라엘은 육신의 원함은 채웠지만 대신 그들의 혼은 메말라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혼의 메마름이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마 4:4)고 말씀하신다. 거듭난 성도의 “영”이 필요로 하는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도는 “육”에 필요한 양식만 채우지 말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영에 말씀을 풍성히 채우면 어떻게 되는가?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가 나오게 되고, 마음속에서는 은혜로 주께 노래하게 되며, 말에 있어서나 행실에 있어서나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골 3:16,17). 그리하면 새 사람으로 옷입게 되어 영적인 “입을 것”이 동시에 채워지게 된다(엡 4:24). 말하자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있어서 참된 만족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육신의 필요가 채워졌음에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이유는 “말씀”으로 자신의 영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자신을 먼저 채우고 육신에 필요한 것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자녀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 주신다.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지 않기에 마르다처럼 수고하고 염려할 뿐, 만족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이 악한 현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만족스런 답변이 되어야 한다. 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광야의 삶”뿐이다.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긴 세월을 낭비하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또 세상의 끝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권면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0:1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