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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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독교적 정서를 조장하는 악한 영에 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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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11월호>

분당 샘물교회 아프간 피랍사태로 한국 사회의 반기독교적 여론이 심화되고, 인터넷 매체를 통한 반기독교적 정서가 사회 안에 팽배하게 나타나는 등 반기독교적 정서의 수위가 높아져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미국도 다를 바가 없는데, 16-29세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바나 리서치’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젊은 비기독교인의 16%만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나머지 84%의 눈에는 기독교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요인으로는, 정죄하길 잘한다(87%), 위선적이다(85%), 구식이다(78%),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한다(75%)는 순으로 나타났다.1) 이와 같은 반기독교적 정서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국내 한 방송사에서는 「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취재 방송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한층 더 부각시켰다. 한편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는 ‘인터넷과 안티기독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개해 보고자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인터넷 문화에 대해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진실이 왜곡되기도 하고, 교계의 그릇된 모습과 미숙한 대안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올바른 판단과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가리켜 『악한 현 세상』(갈 1:4)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악한”(evil)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포네로스”(πονηρὀσ)인데, 이것은 단순히 “나쁜”(bad)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철저하고 완전히 악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 세상의 신”은 마귀로서, 그는 지난 6천 년간 온 세상을 미혹해 왔고(계 12:9),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후 4:4). 이 세상 신인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따라서 그에게 속한 “악한” 세상도, 그에게 속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요 15:18). 평소에는 신사적이고 예의바르며 종교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다가도,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태도를 바꾸기 마련이다.
따라서 반기독교운동, 반기독교정서, 반기독교문화 등에 그리스도인들이 요동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경을 최종권위로 믿고 진리대로 실행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진실한 마음으로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호감을 가졌다면 그는 이제 막 구원을 받을 순간에 있거나 최소한 진리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해왔고, 지금도 대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정도와 방법, 드러나는 양상만 차이가 있을 뿐, 역사적으로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호감”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진리를 말하고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좋은 감정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언제나 그를 향한 대적과 방해가 뒤따랐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로 세상을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기에(행 17:6),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관계 중심적이며, 세상에 깊숙이 연루된 교회들의 경우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첫째,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얻는 평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교회를 지향하고 만다. ‘인터넷과 안티기독교’를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나온 대안이란 어떤 것들인가? 교회 내 자정운동 및 성결 회복,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 기독교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회개 및 역사적 공헌에 대한 강조,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혜롭지 않게 드러내지 말 것, 기독교 교리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등이다. 그들의 초점은 성경적 관점에서 어떻게 대응할까에 있지 않다. 세상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오해를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실로 그들은 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의 종에 불과하다. 『내가 이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랴? 아니면 하나님께 사랴? 아니면 내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겠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둘째, 기독교계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열매로 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성경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기에 세상의 눈치를 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고심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앞의 통계 결과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정죄하길 잘한다.” 이는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 세상적인 교회들이 서로 나뉠 때는 성경적 성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육신적인 동기와 목적을 위해 분열한다. 명목은 주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열매는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정죄뿐이다. “정죄하길 잘한다.”는 시각은 이런 면에서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표현이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해 비꼬는 표현이었다면,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강단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지옥으로의 영원한 정죄”를 설교하는 사람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화평과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그와 같은 복음 전파는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고, 그들로부터 호감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복음 전파”를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복음”이란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사회봉사”가 “선교”인 양 그렇게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샘물교회의 아프간 피랍사태가 가져온 열매가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방송사가 취재했던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던 사람들의 모습에 지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은사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성경적인 거리설교의 모델도 아니고, 신앙생활의 규모도 갖추지 못한 모습을, 방송사는 그들의 구미에 맞게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표출했겠지만, 그와 같은 모습 역시 성경적인 복음 전파는 아니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와 같은 방법으로 지옥을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위선적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 오늘날 교계의 모습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교계의 모습은 실로 위선적이라 할 수 있다.
“구식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교계는 이미 세상이 “구식”이라고 여기는 “진리의 말씀”에서 돌아선 지 오래며, 세상 지향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세상의 “최신 유행”에 많이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열린예배, CCM 등).
“정치에 지나치게 많이 관여한다.” 실로 그렇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마 22:19-22, 막 12:17, 눅 20:25).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로 인해 미움을 받을 때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상과 같이 교계가 진리에서 떠난 결과로 인해 받는 “고난(?)”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이는 누가 억울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을 의식하여 슬픔을 참으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기 때문이라. 너희의 잘못들로 인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이 되느니라』(벧전 2:19,20).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진리의 전파로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조성이 되든지, 비성경적인 열매와 죄들로 인해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조성이 되든지 간에,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와 같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선 사탄은 한 방송사를 통해서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왜곡된 “복음 전파”를 통해서 “거리설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시켜 놓았다. 특히 방송 말미에도 나왔듯이, 한 어리석은 “신학자”의 입을 통해서,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거리전도의 형태를 제재하기 위한 법”을 마련할 시기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사탄은 이런 반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교계로 하여금 진리에서 돌이켜 더욱더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세상과 연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이 반기독교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노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법적인 제재로 나타나든지,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려워하는 영으로 다가오든지 간에 어쨌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전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탄의 위협에 동요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강건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으로 무장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딤후 1:7,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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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연합신문, 제941호, 2007.10.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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