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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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한 한국 교회에도 희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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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2월호>

지난 12월, 이원규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저서, <힘내라, 한국 교회>가 출간되었다.1) 제목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 최근 들어 부쩍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교수는 본 책을 통해 위기에 놓인 한국 교회에 마지막 돌출구와 대안 섞인 희망을 제시하고자 했는데, 사실 어떠한 성경적인 통찰도, 어떠한 성경적인 믿음도, 어떠한 성경적인 대안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본 책의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 무슨 희망적인 메시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제시한 희망이란, 한낱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종교적 철학이나 긍정적 사고방식의 소산물에 불과하다. 이교수는 종교사회학자이지 성경교사는 아니다. 세상의 지혜와 잣대로 판단하는 그에게서 무슨 성경적 대안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역시 이 배교한 한국 교회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극히 세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희망은 교회일 수 있고, 또 교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보기 때문이다.”(p.10.) 지나친 망상에 사로잡힌 왕국 건설자의 이 후천년주의적인 사회복음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비참하고(고전 15:19) 가장 수치스런 사람들로(빌 3:19) 만들고 있다.
자, 이제 그의 한심한 펜 끝에서 묻어 나오는 배교한 한국 교회의 실상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자. 그리고 희망을 발견해야만 한다면 성경적인 관점에서 찾도록 하자.
먼저 성경적인 교리가 무너진 배교한 한국 교회에서는 결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배교(背敎)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 보면,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적 가르침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이를 성경적으로 적용해 보면, 성경적인 교리, 곧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여(딤후 4:3), 그것에 역행하는 믿음이나 행동을 가리킨다(롬 16:17, 딤전 1:10).
그렇다면 배교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하면, 인권이 하나님의 권리 위에 군림하게 되어 있고, 결국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첫째로 두려워하고 사랑하게 되어, 모든 것을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판단하게 된다.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항상 건전한 성경적 교리를 견딜 수 없어 한다. 이것이 바로 휴거 직전의 마지막 교회 시대인 라오디케아2) 기간(계 3:14-22)의 현 주소라 할 수 있다.
이원규 교수가 그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어떻게 성경적인 교리를 견딜 수 없어 하는지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 세습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교회 세습은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이 있다는 의미며”(장신대 김명룡 교수의 말을 인용, p.52). “교회는 교단에 속해 있고,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교단적인 정서나 사회의 정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p.56). 교회 세습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인을 두는 행위라면, 교회 위에 교단을 두는 것 역시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다른 권위를 두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교수는 이 두 번째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는데, 이는 그가 사회적인 정서나 교단의 정서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판단의 잣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성 차별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성차별 의식은 여자 목사 문제에서도 나타난다”(p.67). “교회 내 성차별의 실상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성에게 성직은 말할 것도 없고 평신도 지도자의 지위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p.6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친히 정해 놓으신 질서(딤전 2:11-14)나 목사(장로, 감독)와 집사의 자격요건(딤전 3:2,12, 딛 1:6 - 『한 아내의 남편』)에 관하여, “알기 쉽고 분명하게”(잠 8:9)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그럼에도 이교수가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사회적으로 급변하고 있는 현상을 근거로 성경의 권위에 역행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사형제도 폐지를 역설하면서] “사형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따라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교인들은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 스스로 완전한 의인으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거두어 갈 권리가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p.187). 그의 주장대로라면 어디 사형제도뿐이겠는가? 다른 형벌제도도 폐지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에게 형벌을 주고 말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성경은 비록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이 아닐지라도, 사형을 통해 생명을 거두어 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 있다고 말씀한다(롬 13:1,4, 행 25:11).
[성탄절 회복을 주장하면서] “성탄절은 교회의 존재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세상에 오신 날, 그날은 평화와 자유의 날이다... 이 소식에 감격하는 모든 이에 의해 신나는 한마당 잔치가 열릴 수 있는 성탄절이 다시 한 번 찾아오면 좋겠다”(p.95).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크리스마스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든지,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배교한 교회들이 이교도의 절기를 기독교적으로 각색하고 승화시켜서 만든 “가증스런” 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가증스런” 각색은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제사문제에 관하여] “제사를 반기독교적 의례라고 무조건 매도하는 것은 다수의 문화적 정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제사의식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의식을 기독교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카톨릭의 노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p.113).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가증스런” 각색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가? 나도 그같이 행하리라.”고 말하지 말라』(신 12:30).
배교한 한국 교회 안에 이처럼 파괴된 성경적 교리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건전한 교리를 거부하는 한 한국 교회는 결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또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저버린 한국 교회에서는 결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교회가 마땅히 전념해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구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둘째, 구원받은 성도들을 바른 말씀으로 양육함으로써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셋째, 구주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회에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던 이교수는 교회가 해야 할 역할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왜곡된 주장을 펴고 있다.
“사회봉사 활동은 교회의 본질적인 책임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p.30). “이제 한국 기독교에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지고 있다. 하나는 신앙 노선이나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교회가 하나 되어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함께 매진하는 일이다”(p.106). “기독교인은 적극적으로 한국의 시민 사회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호화혼수 거부 운동, 국산품 애용 운동, 투기 안하기 운동 등도 전개해 볼 만한 운동이다”(p.126). “성숙한 시민운동은 일종의 사회 선교라고도 할 수 있다”(p.129).
이 어리석은 종교사회학자에게는 사도 바울이 생명을 아끼지 않을 만큼의 가치를 두었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행 20:24). 왜냐하면 그의 세상적인 지혜로는 이 “위대한 사역”이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결론적으로 위 두 가지에 있어서 낙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위기에 빠진 한국 교회에 희망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가 “희망”에 관하여 기껏 논할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비록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교회는 “열성적”이고, “사회를 향한 희생과 봉사”에 있어서 “헌신적”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회복”해 나가면 희망이 있다! 과연 이런 것이 희망인가?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성경적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성(롬 10:2),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이 없는 사회를 향한 헌신, 그리고 비성경적인 교리나 실행을 회복하는 것, 이런 것들은 결코 희망이 아니며 절망일 뿐이다. 심지어 그것은 파멸로 이끌어 갈 뿐이다.
그러나 이 배교한 한국 교회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를 향한 권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 또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계 3:18,19). 지금이라도 희망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두지 않은 채, 인본주의적인 관점으로 비성경적 교리를 믿고 실행했던 지난날들을 회개하라. 그리고 밝히 눈을 떠서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고 있는 배교한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BB

주석)-----------------
1) 아래에 괄호 안의 페이지는 본 책의 페이지를 나타낸다.
2)이것은 “시민권,” “사람들의 권리,” 혹은 “사람들을 위한 정의”라는 뜻으로,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은 아무런 권위가 없고 사람들이 권위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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