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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부정하는 정진석 추기경의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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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5월호>

지난 3월 29일, 한 신문기자가 소위 "부활절"(Easter)을 맞이하여 정진석 추기경을 인터뷰했다. 그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담긴 뜻"을 듣기 위해서였다.1) 이 세상에서 겉으로는 가장 경건해 보여도, 가장 성경에 무지한 집단이 로마카톨릭(천주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황이고, 추기경이며, 사제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경적 교리의 핵심 중 하나인 "부활"에 관해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답은 "성경적 진리"가 아니라, 오직 "어리석음"뿐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입은 어리석음을 쏟아 내느니라』(잠 15:2).

부활에 관하여 정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물질은 변화가 있고, 영원은 변화가 없죠. 그래서 영혼도 비물질이고, 부활한 영혼이 결합하는 육신도 비물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성경 대목이 그것을 보여 주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적인 "몸"의 부활로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의 부활"이라든지, "모든 육신적인 것들로부터 탈피하여 영광으로 돌아가셨다"든지, "그분은 영으로 부활하셔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든지 하는 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부활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부활을 말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부활"(엡 2:5,6, 거듭남)이나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부활"(겔 37:1-14, 민족적인 회복)을 제외하고는, 항상 "몸"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덤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나, 또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영이 아니라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영으로 성도들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그 "몸"으로 천상에 올라가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 사이에는 아직도 "몸의 부활이냐, 영의 부활이냐"의 어리석은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정추기경은 어떠한가? 그 역시 이 논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느 누구의 "호감"도 잃지 않기 위하여 매우 "중간적인" 말을 고안해 냈다. "부활한 육신은 현세의 육신과 다른 것이죠... 부활한 영혼이 결합하는 육신도 비물질입니다." 즉 몸이 부활하긴 했는데, 그것은 영이나 혼처럼 비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양편에 있는 어느 누구의 주장도 거스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는 실제적인 "몸의 부활"을 말하면서, 실체가 있는 "물질적인" 몸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육신의 타고난 몸"(natural body)과는 다른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다(cf. 고전 15:35-50).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영"(spirit)처럼 비물질적이라든지, 추상적인 무형의 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은 몸이 없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무서워서 어떤 "영"(spirit)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손과 나의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을 때, "살"과 "뼈"가 있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을 단순히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몸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몸이었다(눅 24:41-43).
그러나 이 몸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몸"이기에, 현 세상에 속한 인간의 "타고난 몸"과는 다르다. 그것은 영원히 썩지도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는 몸이고, 잠긴 문을 통과할 수도 있으며(요 20:19),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금새 사라질 수도 있는 초자연적인 몸이다(눅 24:31). 장차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과 같은 몸을 입고(롬 8:29, 빌 3:21, 고전 15:51-53) 그분을 만나 뵙게 될 것이다(요일 3:1-3).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물리적인 몸을 입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무덤을 아무리 뒤져도 그분의 뼈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분의 뼈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들 가운데 있게 된다(고전 15:17).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영의 부활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실제적인 몸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추기경은 입으로는 "육신의 부활"을 언급했어도, "실제적인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언급했던 "비물질적인 몸의 부활"이란, 사실 "영의 몸(spirit body, "영적인 몸"이 아님)의 부활"과 다를 바 없는데, 이런 주장은 "영은 몸이 없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그가 쏟아내는 어리석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졌던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나의 살이요, 나의 피’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수님께선 당신을 먹이신 겁니다. 엄마가 젖을 주는 것처럼 말이죠. 자신의 생명줄을 먹이신 거죠. 그걸 통해 나와 화학적 결합을 하라는 겁니다. 주님과 내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거죠."
로마카톨릭은 매주 미사 때마다 가증스런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는데, 이때 빵과 포도주를 성별함으로써 빵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포도주는 실제 피로 바뀐다고 가르친다(화체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을 먹고 마시는 일종의 식인행위(Cannibalism) 의식을 행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 살과 피를 매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소위 그 "성체"가 죄들로부터 깨끗하게 해줌으로써 그리스도께 "연합"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정추기경은 이 "연합"과 "일치"를 가리켜 "화학적 결합"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먹고 마시는 매우 "불경하고 비성경적인 결합"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를 가리켜 "화학적인 결합"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연합"은 "성체성사"를 통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이 어리석은 주장들은 요한복음 6장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요 6:63). 즉 이 생명은 그분을 "먹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것이다(요 6:33-36,40).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마찬가지다. 그분을 "물리적으로 먹고 마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분을 "실제적으로 믿음으로써" 주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은, "죽음"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장사된 사람들이다. 또 "부활"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것처럼 이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되었다(롬 6:4). 하지만 이 "부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졌던 것처럼, 장차 그분의 부활하심의 모양과 같이 되어 그분과 함께 살아나게 될 것이다(롬 6:5,8). 이것이 장차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런 소망"이고, "영광스런 부활"이다.
그런데 정추기경은 이러한 "부활"을 가증스런 "성체성사"를 통해 경험하려고 한다. 그는 4년 전 부활절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체성사의 삶을 통해 부활의 신비에 참여합시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 제일 먼저 주일 미사에 적극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종교 의식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결코 참여할 수 없다. 심지어 장차 다가올 "생명의 부활"(요 5:28,29)인 "첫 번째 부활"(계 20:6)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게 하고, 자신의 저주를 마시게 할 뿐이다(고전 11:27,29). 구원받지 않은 그가 매주 "성체성사"를 통해 마신 그 저주는, 장차 그가 맞이하게 될 "부활"의 상태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대답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부활 성야(3일 밤)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빛입니다. 그래서 그 상징이 큰 부활초죠. 거기서 신자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조그만 초에 불을 붙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나눠 가지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거죠. 예수님이 죽으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야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겁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길"이란, 결코 구원의 길이나, 진리의 길,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성체성사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헌혈이라든지, 골수기증, 사후 장기기증,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사명과 책임 등을 의미한다. 이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는 것인가? 정추기경이 가고 있는 길은 김수환 추기경이 갔던 길과 똑같은 길이다. 그의 길은 "극락왕생"을 빌었던 승려 법정이 갔던 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가 가고 있는 길은 여느 종교적 위선자들과 다르지 않다. 그 길을 갔던 그들은 부활할 수 있는 것인가? 분명 그들도 "부활"할 것이다. 심지어 실제적인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부활"이나 "첫 번째 부활"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맞이하게 될 "부활"은 다름아닌 "벌레와 같은 몸"을 입은 "죽은 자들"의 "저주의 부활"이기 때문이다(계 20:5,11-15). BB


(주석)
1) 중앙일보, 2010년 4월 1일, 27면(종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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