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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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산 소망을 저버린 부활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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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5월호>

이교도 카톨릭의 부활절을 지키는 개신교계는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 시청앞 광장에 모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2009년 4월 12일 새벽 광장에 초교파적으로 모인 그들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두 사람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마 18:20), 3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참석한 시청앞 광장에 주님은 함께하시지 않았다. 비록 몇몇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앉아 있었다 해도 분명 주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주님께서 이교도들의 절기를 기념하는 곳에 계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그날 시청앞 새벽공기를 가른 설교 역시 주님의 부활과 무관한 설교였던 것이다.
설교자 오정현 목사는 “한국 교회여, 일어나 다시 희망을 노래하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오목사는 설교에 앞서 부활의 능력을 설명만 하는 시간이 되지 않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 사회 앞에 부활의 능력을 보여 주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 사회 앞에 부활의 능력을 보여 주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제부터는 비성경적인 사회복음을 버리고 교회의 본래 사명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죄인들이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하고 그들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파하는 지상의 영적 기관인 것이다(롬 4:25). 오목사는 한국 교회가 앞으로는 주님을 그렇게 섬겨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오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부활의 능력을 확신하는 개인과 공동체와 지역마다 새로운 은혜의 물꼬가 터졌다면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인천 제물포항에서의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의 기도를 예로 들었다. 이 척박하고 메마른 한국 땅에도 부활의 능력이 선포되게 해주시라고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이 민족이 오늘날처럼 변화되었고, 이 민족의 국가 수도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시청앞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사건이 있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두 외국인 선교사들의 기도를 통해서 이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어 주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오목사는 이 땅에 부활의 능력이 선포되어 이 민족이 어떻게 변화되었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무엇이 변했다는 것인가? 이 민족은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서 자신들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오목사는 이 민족이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되었거나 국민의식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시청앞 광장에 이교도들의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두 선교사의 기도응답이라면, 그들의 기도는 잘못된 기도였음이 틀림없다.
오목사는 베드로전서 1:3-5까지의 말씀으로 부활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체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송축하리로다. 그분은 그의 풍성하신 자비하심을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잔하지 않는 유업을 간직해 두셨으니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벧전 1:3-5, 필자는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인용하였다). 오목사는 이하 6,7절에서 보이는 베드로전서 기록 당시 로마제국의 박해와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아픔과 온갖 종류의 탄압에 믿음이 불로 연단되는 시험에 선 초대 교회의 어려운 상황이 현재의 한국 교회와 상당히 잇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한국 교회 안에 감도는 재부흥에 대한 패배주의(그러나 그들은 성경적으로 부흥한 적이 없다),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 청년 백수 100만 명에 달하는 경제적 어려움, 더럽고 유해한 인터넷 매체로 인해 익사되기 직전인 우리 아이들, 6·25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한 남북 분열과 대립 때문에 생긴 상처, 민주화 과정에서 입은 젊은 세대들의 상처 등, 오목사는 이 모든 상처들이 부활의 산 소망을 통하여 그 날 치유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A.D. 60년 당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로 인해 처했던 박해의 상황과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에 둘러싸여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 서로 상당히 잇닿아 있다는 논리다. 힘들다고 다 같은 상황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교리적, 역사적, 영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적용시킨다고 아무 상황에나 적용해서는 이처럼 매우 우스운 해석이 나오게 된다. 베드로전서의 그 구절들을 오늘날 교회들이 처한 진리와 무관한 사회적 상황에 영적으로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은 매우 어색하며 또 성경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오목사는 이어 본문 3절의 “산 소망”을 설명했다. 그는 산 소망을 부활의 산 소망이라면서, 부활의 산 소망은 성경에 의하면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4절) 산 소망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이 구절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잔하지 않는 유업”(4절)을 다루고 있다. 이 유업은 하나님께서 모든 거듭난 성도들을 위해 문자 그대로 『하늘에... 간직해』 두신 유업이다. 즉 성경에서 유업의 보편적 의미로 통하는 지상의 천년왕국에서의 유업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에 간직해 두신 『새 하늘』(계 21:1)과 『새 예루살렘』(계 21:2)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는 5절과 관련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곧 그들의 휴거를 의미한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하늘의 산 소망을 갖게 된 신약의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과 교회의 휴거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13절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생각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끝까지 바라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베드로전서의 본문으로 부활을 설교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부활과 더불어 그분의 다시 오심과 성도들이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모하여(롬 6:5) 셋째 하늘로 들림받는 휴거를 가르쳤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부활을 기념한다는 부활절 설교에서 왜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들이 빠져 있고 단순히 부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다시 오심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지어 주님의 부활은 물론, 그분의 재림까지 모두 부인하고 은유적,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마음대로 적용해 버리는 것이 후·무천년주의 교단 신학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신학교에서 배출된 목사들은 비록 개인적으로 부활을 믿는다 해도 주님의 재림과 교회의 휴거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자세 때문에 거짓 복음인 사회복음이 등장하여 이 타락하고 그 형체가 사라져 가는 유한한 세상을 변화시켜 자신들과 후손들의 유업으로 삼고자 하는 무리가 기독교계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목사가 이번 부활절 설교에서 주님의 부활을 현실에 적용한 것을 보면, 그의 설교가 성경적인 부활의 능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목사는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을 향하여 거룩한 물질을 거룩하게 낭비하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주위의 장애인들을 섬기고 희생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가진 자들이 희생하고 섬기고 나눈다면, 한국 교회가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 교단과 신학의 벽을 초월하여 ‘세계를 위한 소명자’로서 세계를 위하여 쓰임받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소명(divine calling)이며, 무엇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말인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반드시 주님의 부활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사도들을 보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전파하였다(행 4:1-3,33). 사도들은 모두가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그들도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다 박해를 당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비리와 부도덕성으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인가? 부활의 증인들도 아니면서 부활절은 왜 지키는 것인가? 이교도 카톨릭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자인 오목사는 자기 앞 3만 명의 교인들에게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거리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자고 단 한 번도 촉구한 적이 없다. 그 부활의 기쁜 소식을 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게 하자고 설교한 적이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경건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서 흘러나온다. 주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할 때 분출되는 거룩한 능력인 것이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4).
오목사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순례자요 거룩한 나그네라고 하였다. 북한과 장애인과 가난한 자들을 향한 소명을 실천하면 이 땅에서는 나그네같이 살 수 있겠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천국의 주인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절망의 산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을지라도 다시 한 번 산 소망의 터널을 뚫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소망한다면서,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시대를 변화시키는 소명자로 비상하자고 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단 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에게는 세상으로부터 성별하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고후 6:14-18). 교회는 세상과 그 소속이 다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온 세상은 악함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라』(요일 5: 19). 세상으로부터의 성별은 궁극적으로 휴거를 통해 완성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멸망해 가는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휴거의 소망이 주어졌는데, 만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면 왜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들어올리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인가?(고전 15:51-53)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 타락하여 멸망할 이 세상은 교회가 휴거된 후 전무후무한 대재앙인 대환란을 통과하며 철저히 파괴될 것이고, 그 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통치하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변화요, 만물의 회복이다(행 3:21).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이 멸망당하고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때 주님과 함께 다스릴 소망이 주어져 있다. 이후 영원히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거룩한 소망이 주어져 있다. 이 모든 산 소망은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몸을 입을 때, 즉 휴거될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렇다면 휴거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요일 3:2,3).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순결한 처녀(고후 11:2)인 교회는 신랑이신 주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죄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시지 않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나서는 것은 혼인을 앞둔 약혼한 신부가 간음을 저지르는 일과 같다.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부활의 증인이 아니면서 초대 교회의 부활의 증인들이 당했던 고난과 박해를 자신들과 연결시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논리적 비약을 이루는 것은 그들의 신성한 노력을 멸시하는 것이며, 진리의 지식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님과 무관한 부활절 설교에 성령의 역사는 주어질 수 없었다. 세상을 섬기는 사회복음을 위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사도들이 오늘날처럼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서 사회복음을 전했다면 박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들은 세상을 악하다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기에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거룩한 믿음이다. 이교도들의 절기에 교인들을 새벽부터 동원하여 비성경적인 사회복음 설교를 듣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믿음으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봄이 되면 씨앗들이 죽고 부활하여 꽃향기를 내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지 못한 죽은 설교는 교회들에게 오히려 사망의 향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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