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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단체 “종자연”보다 못한 미래목회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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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8월호>

필자는 대학 다니던 시절, 기독교 학생 운동을 좀 했었다. 기독교 학교였던 숭실대학교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당연히 비기독교 학생들한테는 반발을 사는 시간이었다. 당시 비기독 학생들을 중심으로 채플 폐지, 혹은 선택 수강 운동이 있었는데, 어떤 학생들은 <채플 폐지>, <종교 교육 강요 금지> 같은 팻말들을 들고 채플에 참석할 정도로 심각했었다. 필자는 당연히 기독 학생 연합의 일원으로 그 운동을 저지하는 활동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채플 시간에 대학 교회(강당) 앞에서는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몰려와 “종교 교육 반대”를 외치며 채플이 진행중이던 강당 안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었다. 필자 또한 여러 기독 학생들과 함께 저지선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채플 상황이 궁금해서 강당 안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순간 필자의 기독교 학생 운동 신념을 무너뜨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설교 시간에 강단 위에서 “성공회 신부”가 초청 설교자로 강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필자에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작 저따위 신부의 강연을 하는 채플을 수호하고자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는 교내 기독 학생 연합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필자가 서두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오늘날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종교 차별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하 종자연)이라는 기구에게 그 조사를 맡겼다. 문제는 종자연이 “참여불교재가연대”라는 친불교단체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조직이라는 점이다(물론 본인들은 부정한다). 이 단체는 주로 기독교 편향 정책이나 활동을 찾아 고발하고 비판하는 일들을 한다. 종교 차별을 비판하려면 불교나 다른 종교가 우대받는 것도 비판해야 할 텐데 유독 기독교가 우대받는 것들만 비판한다. 사실 이 나라가 전통 문화라는 미명하에 친불교 정책을 취한 게 어디 한둘인가? 버스 정류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절 이름의 정류장이 얼마나 많고, 절 이름을 딴 길 이름이 또 얼마나 많은데, 간혹 한두 개 있는 교회 이름의 길이나 정류장에 대해서만 비판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미션 스쿨”이라는 기독교 재단 학교들(주로 중고등학교)에서 드려지는 의무적 채플을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몇 년 전 대광고등학교 강의석 군이 채플 반대 운동했을 때 강 군을 동조하다가 해임당한 대광고 전임 교목 류상태 목사도 종자연에 가담했다. 불교 재단 학교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한다. 말하자면 종자연은 “종교의 자유”를 추구하는 단체가 아니라, “기독교 확장 반대”를 추구하는 단체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종자연에게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종교 차별 실태 조사를 맡겼다. 국가 기관이 말이다. 종자연이 이 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올릴 경우, 기독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장로 대통령”의 정부가 끝나는 입장에서 한국 교회는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들에서는 종자연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지난 7월 3일 조선일보에는 “미래목회포럼”이라는 목사들 단체에 의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종자연’의 연구 용역을 즉각 취소하라!>는 성명서가 실렸다. 그 성명서에는 100명의 목사들 및 기독교 대학 교수들이 참여했다. 그 밖에 유수한 목사들도 종자연 사태를 비판하고 나섰으며, 국내 대표적 15개 교단들도 연합해서 대처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20여 년 전 필자가 직접 겪었던 대학 채플 폐지-수호 갈등이 그대로 연상된다. 이 나라 교회들이 연합해서 종자연의 그 일을 막았다고 치자. 그러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미래목회포럼이 성명서까지 내면서 그 일을 반대했을 때, 정말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아질까? 그들이 추구하는 “미래 목회”란 대체 무엇인가?
이들이 종자연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미 움켜쥐고 있는 기독교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재단 학교들의 장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학교들은 채플 시간을 통해 종교 교육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의례적 채플일 뿐이다. 거기에 복음은 없다. 필자도 4년이나 경험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단 1분도 복음 전파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단지 철학자들의 강론이나 늘어놓을 뿐이다. 공자나 석가를 얘기하기도 한다. 또한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줄여야 하니, 세상적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 가수들과 코미디언이 등장하기도 한다. 복음이 없으니 초청 강사를 부를 때 성공회 신부, 혹은 카톨릭 신부를 부르기까지 한다. 학생들은 채플 시간에 졸고 있고, 여전히 욕설과 폭력이 난무한다. 그 채플을 통해 학생 인격에 관한 한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한 채플이라면 비기독교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폐지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 학교들은 채플 시간을 의무적으로 갖게 하는가? 그것은 기독교 재단의 장악력 때문이다. 교단들은 자기 교단 산하의 신학교 및 기독교 학교를 여럿 갖고 있는 것이 교세 확장에 유리하다. 이것이 그들이 채플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기독교 학교들의 채플뿐 아니라, 종자연에서 걸고 넘어지는 것 중에는 “국가조찬기도회”도 있다. 그들은 이것을 국가 종교의 행사로 간주한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나라에서 왜 대통령을 모시고 기독교 행사를 하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와대에 있는 불상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도 안하는가? 불교 국가도 아닌데 대통령 궁에 불상이 있으면 안 되지 않는가? 과거에 불상을 원래의 절로 돌려 놓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불교계의 반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종자연은 왜 이 문제는 침묵하는가?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만 반대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들이 복음에 반대하는 것이라면, 그 반대를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독교인들은 복음 때문에 반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어디 국가조찬기도회를 하라고 했는가? 믿음도 없는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을 앉혀 놓고 무슨 기도를 하고, 무슨 축복을 하는가? 지난번에는 한기총 길자연 목사가 조찬 기도회에서 대통령 내외를 무릎 꿇렸다고 떠들썩했던 사건도 있었다. 그것이 성경적인 일인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을 이끌어 주시는 것인가?
그들은 전혀 복음이 아닌 것으로 대적을 받고 있다. 그들이 성경적으로 행한다면, 이 모든 대적에 있어서 성경으로 분명히 반박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들을 돕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상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기독교라는 세력이 그동안 쌓아 왔던 권리를 잃지 않고 싶을 뿐이다. 신문에 광고를 낸 미래목회포럼 역시 이 일을 종교간의 세력 다툼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들의 세력 확장 혹은 유지일 뿐이다. 그들은 이름만 교회일 뿐, 거듭남이 없는 종교 세력이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국가는 반사회성을 띤 종교집단을 제외한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지원하고 장려하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을 전파할 목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 목사인 이상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고 감히 생각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불교나 다른 종교에 기독교 신앙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들 교회가 저들과 유사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이 성명서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이 교회들에 가해지고 있는 이방인들의 비판 및 대적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전조인 것이다. 믿음에 의한 박해가 아닌 박해와 대적은 이들이 잘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분명 종자연 등 저들 대적자의 의도는 악한 것이지만,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 대적하는 말 가운데서도 성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당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라면 깊이 반성해야 한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읍에 남아 있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의하여 죽을 것이나 칼데아인에게 나가는 자는 살리라』(렘 38:2). 이 말을 들은 시드키야와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다. 시드키야는 어떻게 하든 바빌론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중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예레미야가 찬물을 끼얹는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라고 유다가 멸망하는 것을 원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이 일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중흥이나 독립이나 세력 확장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다만 유다가 그리된 것은, 그들의 죄가 깊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이다.
만약 예레미야가 오늘날 있었다면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기독교의 세력 확장을 위해 연합하여 투쟁하는 이 나라 목사들에게, 종자연을 반대할 것이 아니라 먼저 회개하라고 말할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이 땅의 기독교계를 불교나 이방 종교들 발 아래 넘겨 버리실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줄 아는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것을 들으신다 하셨다(요일 5:14). 하지만 예레미야의 상황을 보건대, 이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들의 인간적인 노력만 기울이다가 결국은 그들에게 당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바빌론 제국에 임한 심판도 기억해야 한다. 비록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뜻대로 유다를 파괴했으므로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더 크게 멸망했다. 마찬가지로 종자연을 비롯한 이방 세력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세력”에 대적한 것이지만, 그들로서는 복음이나 세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의 행태가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대적한 것이다. 성경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한다. 심지어 하나님과 성경 자체도 모독한다. 따라서 그들은 멸망에 이르기까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결국은 교인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강단은 복음을 전파하고 죄들을 책망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돌아가 복음 전파라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명령에 순종하라. 그것을 위해 박해와 대적을 받으라. 종자연 같은 이상한 집단과의 세력 싸움은 집어치워 버리고 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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