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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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성경적인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는 칼빈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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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8월호>

칼빈 500주년을 기념하여 장로교단들 사이에 연합과 일치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작년 제주도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는 4개 장로교단이 연합예배를 드렸는가 하면, 최근에는 교단들 사이에 강단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교단에서는 연합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단 통합의 초석을 깔기도 했고, 지난 7월 10일에는 장로교 26개 교단이 한자리에 모여 500주년 기념 “장로교의 날”을 개최함으로써 그들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각오를 선포하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이 그 안에서 분열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함께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모두는 같은 것을 말하고 또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여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함께 연합하라』(고전 1:10). 또한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화평의 띠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됨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라』(엡 4:3).
그러나 “연합”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성경적인 연합은 아니다. 흔히 연합은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교계 전반에서 전개되고 있는 교단들 간에 연합의 취지나 진행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목적 자체가 매우 비성경적이고 육신적이며, 인본주의적이고 편협하며, 정치적이고 심지어 불순하기까지 하다. 최근 교계의 이슈가 될 만큼, “칼빈의 후예들”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연합의 움직임 역시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연합과 일치를 위해 부르짖는 그들의 주장을 통해 왜 그들의 연합이 비성경적인지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지난 7월 17일 장로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한 지도자 초청 간담회에서, 이종윤 목사(서울교회)는 ‘장로교 정체성 회복과 연합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발제한 바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야 할 성경적 믿음이 아니라, “장로교인”으로서 보여야 할 종교적 신념을 취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과 “장로교인”은 결코 동일한 단어가 아니다. 전자는 자신의 믿음을 성경에 기초하지만, 후자는 어떤 신조나 신경, 신앙고백 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적 신념”을 들어보자. “한국 장로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사도신경과 함께 모두 헌법에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이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위에 하나 된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이러한 잃어버린 처음 신앙을 찾는 것이 장로교 정체성 회복을 위한 첫단계다.”
이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계 3:14-22)에 속한 “칼빈의 후예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공통된 신념”이 무엇인가? 항상 그들이 고백하는 “같은 신앙”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그들의 “정체성과 본질”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 그것은 결코 성경이 아니다. 진리도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사도신경>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든지, “성경적 진리이다”라든지, 혹은 “성경적 진리에 가깝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짐으로써 파선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딤전 1:19).1)
그들은 그런 “극단적”이고 “편협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성경적 교리에서 “총체적”으로 벗어난 “신앙고백” 따위에 그들의 교회를 세우고 있다. 어떤 장로교회들이라도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고백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 그들이 인간적인 전통을 따라 만들어낸 “교회헌법”에 명문화하고만 있다면 그들의 연합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위에 하나 된 교회를 세울 수 있고...”
그러나 성도들이 지켜야 할 연합의 기초는 믿음을 파괴하고 영적 노숙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신앙고백에 있지 않다. 왜 그런가? 이는 칼빈의 후예들을 양산해 낸 “칼빈주의의 독소”가 그 안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의 독소란, “어떤 사람이 개별적으로 하늘 나라나 지옥으로 영원히, 그것도 무조건적으로 선택되었고 예정되었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망상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비성경적인 “종교적 신념”에 따른 연합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같은 생각,” “같은 믿음,” “같은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결코 성도들이 열심히 지켜야 할 “성령의 하나 됨”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시작부터 연합과 일치를 위한 “첫단추”를 잘못 꿰었던 셈이다.
또 한 명의 발제자로 나섰던 박경수 박사(장신대)는 교회분열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교회일치 원칙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원칙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중 주목할 한 가지는 “본질적 교리와 비본질적 교리를 구분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이 둘 사이를 구분하고 서로의 신학적인 입장 차이를 낳고 있는 “비본질적 교리”를 서로 양보할 때, 여러 개로 분열된 장로교단, 더 나아가서는 한국 교회가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본질적 교리는 무엇이고, 또 비본질적 교리는 무엇인가? 이 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장로교의 날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이종윤 목사의 말에 그 진의가 드러나 있다. “성도 간에 성찬[주의 만찬에 대한 비성경적인 표현-필자 주]을 같이 못하면 형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난해 4개 교단이 제주도에서 모이긴 했으나 성찬을 함께하지 못했다. 당시 여자 목사와 장로를 세운 교단이 문제가 됐는데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한 결과였다... 교단마다 신학적인 입장이 다르기도 하다. 어떤 교단은 여자 목사와 장로를 인정하고 어떤 교단은 인정하지 않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는 데 인식을 함께했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양보하면 한국 교회는 충분히 연합과 일치를 이룰 수가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여자 목사 안수에 대한 문제는 “비본질적 교리”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집착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동성연애자들에게 안수를 주는 문제는 어떤가?” 이것은 본질적 교리의 문제인가? 아니면 비본질적 교리의 문제인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어떤가?” 본질적인가? 아니면 비본질적인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찬성하는 문제는 어떤가?” 1959년 그들은 이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신학적인 노선을 달리했었다. 이것은 본질적인 문제인가? 비본질적인 문제인가?
그는 자기 자신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런 구분을 낳았는가? 그렇게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것은 멸망으로 향해 가는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 하는 교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연합해 보기 위해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고안해 낸 구분일 뿐이다.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으며,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다. 그런 구분은 올바른 접근 방식이 아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가? 비성경적인가?” “성경이 그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느냐?”(롬 4:3) 사실 이목사가 제시한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문제”는 이런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본질적, 비본질적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 비성경적 교리의 문제다. 그저 연합을 위해 “비성경적 교리”의 문제를 단순히 “비본질적 교리”의 문제로 취급함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양보하라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집착의 결과”라고 말했지만, 성경은 그 “집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한다. 『만일 누군가가 다르게 가르치며 건전한 말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일치하지 아니하면... 그런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3,5). 여자 목사 안수는 본질적, 비본질적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적, 비성경적 교리의 문제다. 누군가 이에 대해 다르게 가르친다면, 즉 비성경적 교리를 가르친다면 그들로부터 분리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은 칼빈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적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거짓 교리에 관한 한 단호하게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이 “칼빈의 후예들”은 그들의 행보를 매우 조심스럽게 한다. 이승구 박사(합동신대)는 그의 발제순서가 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런 연합과 일치의 노력에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 교단이 연합하다 결국 세 교단이 되는 전철을 되밟을 것이다.” 그는 그저 분리하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나 성경적 성별은 올바른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왜 이 문제에 대해 그렇게 조심스럽고 두려워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이 단 한 번도 성경적 성별을 해 본 적도 없고, 성경적인 연합을 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항상 성경적 기준이 아니라, 교단의 입장에서 육신적으로 분리하거나 연합을 시도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양보하자”라든지, “교회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일치를 이루자”와 같은 주장만 남발하는 것이다.
결코 연합과 일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이다. 성경적 성별을 전제하지 않은 연합은 결코 옳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BB
주석)-------------
1)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문제점』(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통권125호, pp.9-16)과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단』(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122호, pp.6-19)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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