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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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암송을 그만둔 따분한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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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5월호>

사도신경은 로마카톨릭이 만든 신조로, 전에 “로마신경”(Roman Creed)이라 불리던 것이었다. 그 분량은 현재 사용하는 것보다 길었으며, 지금과 같은 길이의 신경은 니케아공회(A.D. 325), 콘스탄티노플공회(A.D. 381), 에베소공회(A.D. 431), 칼케돈공회(A.D. 451)를 거치면서 수정 보완하여 완성한 것이다. 사도신경은 소위 “성경의 가르침”이 그 안에 잘 요약되어 있다는 이유로 예배 때마다 반드시 암송해야 한다고 여겨 왔는데, 요즘에는 암송하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고 한다. 이에 교회들 안에 종교적 형식주의를 배척하는 기류가 감돌고 있어 사도신경이 그 표적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한국 교회에 과연 종교적 형식주의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럽혀진 빵”과 “눈먼 것들과 저는 것들과 병든 것들”로 희생제를 드렸던 이스라엘처럼(말 1:7,8), 그들도 더럽혀진 빵과 같은 “한글개역성경”과 하나님께서 결코 받으실 수 없는 쓸데없는 종교 행위들로 그분을 역겹게 해 드렸기 때문이다. 지식 없는 열성과 형식주의의 결합이 낳은 비정상적인 교회들에서, 이제는 그 쓸데없는 일들 가운데 하나인 사도신경의 헛된 반복을 기피하여 암송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니 실로 기이할 따름이다. 종교적 형식주의의 종국이 어떤 것인가를 그들 스스로 입증하고 만 것인데, 결국 그 모든 행위들을 “따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또 말하기를 “보라, 이 얼마나 따분한 일인가!” 하며, 그 일에 코웃음 쳤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그리하여 너희는 찢기고 절며 병든 것들을 가져왔으니, 이렇게 너희가 제물을 가져왔도다. 내가 너희 손에서 이것을 받아들여야겠느냐? 주가 말하노라』(말 1:13).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로마카톨릭에서 사용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둘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카톨릭 신경의 밑줄 친 부분들은 개신교의 신경과 차이가 나므로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 개신교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 로마카톨릭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한국 교회에 사도신경을 들여올 당시에는 카톨릭 신경의 “저승에 가시어”를 연옥을 연상시킨다 하여 빼고서 번역했다 하는데, 실은 지옥에 관한 무지로 인해 제거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왜냐하면 영어 원문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카톨릭, 곧 천주교는 “hell”(지옥)을 “저승”이라는 토속 신앙 용어로 바꿔 버렸고(저승은 죽은 자의 혼이 가서 심판을 받고 윤회하는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므로 성경의 지옥과 다르다), 한국 교회는 그 “hell”을 아예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시어 그곳에 그 죄들을 내려놓고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진리에 관한 무지를 대명천지에 자인하고 만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려가셨던 그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니 그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려 함이니라.)』(엡 4:9,10).

한국 교회에서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한 카톨릭 신경의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는 영어로 “The Holy Catholic Church”로 표기되며, 이는 흔히 알고 있는 “카톨릭 교회”를 의미한다. “catholic”이란 단어에 “보편적인”의 뜻이 있기에 “보편된 교회”라고 한 것인데, 한국 교회는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해 왔으므로 실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달리 말해 사도신경은 그 초기 이름인 로마신경에 걸맞게 로마카톨릭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인데, 이는 로마카톨릭이 가르치는 교리를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마카톨릭은 요한계시록 2장의 퍼가모 교회 기간(A.D. 325-500)에 시작되었는데, 주님께서는 “숱한 음행(결혼)”이란 뜻의 그 퍼가모를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13절)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 교회 안에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하게 하는 “발라암의 교리”(형상 숭배, 성체성사, 사제들과 수녀들, 여신도 간의 음행, 사제들의 동성애와 소아성애, 14절)를 가르치는 자들과 “니콜라파의 교리”(사제들의 평신도 지배, 15절)를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정죄하셨다. 이 교회 다음에는 두아티라(“고통의 향기,” A.D. 500-1000)와 사데(“붉은 자들,” A.D. 1000-1500) 교회의 기간이 이어지는데, 그 이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카톨릭 세력의 박해가 극에 달한 중세 암흑시대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간인 것이다.

두아티라 교회에서는 시돈의 바알 숭배자인 아합의 아내 이세벨과 하늘의 여왕 세미라미스를 연상케 하는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이 용납되어 이전 퍼가모 교회 기간의 발라암의 교리가 교회 내에서 가르쳐지는 참사가 이어졌다(계 2:20). 뒤이은 사데 교회 기간은 “붉은 자들”이란 그 이름에 걸맞게 그야말로 피의 박해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카톨릭 교황들과 신부들의 장려 속에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었고, 스페인에서는 그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가 등장해 십자가를 앞세운 고문과 살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악령의 역사였다. 악령 들린 교황의 명령으로 비무장 프로테스탄트들을 참혹히 살해했던 위그노 대학살과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 또한 사데 교회 기간에 즈음해서 일어난 것이었으니, 이 두 기간의 피눈물 나는 박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폭스의 순교사>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가 그동안 믿는다고 공언해 온 “거룩한 공회”이자 “거룩한 보편된 교회”인 “거룩한 카톨릭 교회”인 것이다. 그 거룩한 보편된 교회는 이교도들의 하늘의 여왕인 마리아 숭배와 유아 세례, 미사 등의 거짓 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그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사악한 짓을 했겠는가? 로마카톨릭 안에만 구원이 있다면서 살인을 저질러 온 그 “거룩한 공회를 믿사옵니다.”가 지난 130여 년 동안 한국 교회의 예배당에서 매 주일, 같은 시간에 일제히 메아리쳤던 것이다. 참으로 역겹지 아니한가!

한국 교회가 또한 믿는다고 공언해 온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카톨릭 신경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해서 “The Communion of Saints”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성도들 간에 나누는 영적인 교제로 오해하고 있지만, 원래는 로마카톨릭에서 소위 “성자”(성인)라 부르는 이들과 기도로 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로마카톨릭은 “시성화 제도”로 성자(saint)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미 “죽은 자들”에게 지상의 살아 있는 신자들이 기도하여 도움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왕국에 들어간 증인들, 특히 그리스도께서 성자로 인정한 사람들은... 그들의 중보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가장 고귀한 섬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와 전 세상을 위해 중보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으며, 또한 간청해야 한다?(<카톨릭 교회 교리문답, 1994> 제2683항).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딤전 2:5). 로마카톨릭이 그들의 성자들을 위해 잘못 사용하고 있는 “saint”는 현 교회 시대로 보면 거듭난 성도, 곧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saints]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하노니』(롬 1:7). 이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즉 로마카톨릭의 죽은 성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신도들에게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한 것은 죽은 자들과의 교제를 가르치는 강신술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로마카톨릭이 옛 바빌론 종교가 기독교의 옷을 입고 활보하는 이방 종교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죽은 자들과의 교통”은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이나 무당들, 강신술사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교회로 자처하는 자들이 그런 일을 버젓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당이나 마술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마법사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할지니라. 이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 주께 가증함이 됨이니』(신 18:10-12).

로마카톨릭이 사도신경에서 언급하는 “동정녀 마리아”라는 것도 사실은 평생 동정녀였다는 마리아의 “종신 처녀설”을 내포하는 표현이다. 마리아를 신격화한 그들은 마리아가 처녀의 상태로 승천하여 종신 처녀의 여신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주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은 이후 최소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막 6:3). 인간이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자기 멋대로 주물러서 모양을 빚어낸 것이 카톨릭의 교리들인 것인데, 그 거짓 교회의 로마신경을 의미 없이 반복하다가 이제는 하지 않는다고 하니, 과연 한국 교회가 진리를 깨우쳐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깨우쳐서 요한계시록의 그 창녀의 오류와 실체를 파악했다면, 이제는 십자가의 복음(고전 15:3,4)과 교회의 휴거(살전 4:16-18, 고전 15:51-53), 그리스도의 심판석(롬 14:10, 고후 5:10), 이스라엘의 회복(롬 11:25-2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 년 통치(계 19:11-21; 20:2-6), 새 예루살렘과 영원 세계(계 21,22장) 등과 같은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쳐야 할 것인데, 그런 소식이 일절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사도신경 외우기를 그만둔 것은 그동안의 형식적인 종교 행위가 “따분해져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예배 시청이 가능하고, 헌금은 교회 계좌번호로 간편하게 입금하는 편의주의적인 시대상이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따분함과 편의주의의 절묘한 결합이 교회라는 곳을 식상한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결국 올 것이 온 것이고, 그 믿음 없는 자들의 더 큰 와해의 소리가 저 시내 산 아래에서의 소란처럼 가까이, 더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모세가 말하기를 “그것은 이기라고 소리치는 음성도 아니요, 패배해서 부르짖는 음성도 아니고, 내가 듣기에는 그들이 노래하는 소리니라.” 하고 그가 진영에 가까이 오자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본지라, 모세가 격노하여 자기 손에서 돌판을 던져 산 아래서 깨뜨리니라』(출 32:18,19). 한국 교회는 깨어져 버린 두 돌판처럼 말씀이 필요 없는 교회다.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과 음행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 위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이다(요 3:3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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