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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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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주위를 돌아보면, 십자가 달린 건물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십자가를 걸어 놓은 교회 건물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옥에 가기에 가장 합당한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어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고자 십자가를 세웠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내면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십자가를 단 교회들이 단 한 명도 구령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헐버트 로키어 경은 그런 교회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는 존귀하게 여기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으로부터 활력을 얻지 못한 교회는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한가!”십자가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임을 알아야 한다(갈 3:13). 많은 교인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한 채 십자가를 마치 부적처럼 여기고 있다. 액운을 내쫓고 복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집안 곳곳에 부적을 붙이는 것처럼, 여러 가지 장식품으로 만들어진 십자가들을 집안 곳곳에 놓아 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는 거친 나무 십자가였건만,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십자가는 매끄러운 플라스틱 십자가요, 여러 가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십자가이다. 장사치들이 더러운 이익을 위해서 그런 상품들을 만들어 치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기억하되 마구간에 누워 있는 어린 아기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분으로 기억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죽으셨으나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분으로, 곧 다시 오실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로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알고 믿으며, 그분과 매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눠야 한다.
스스로를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한(행 1:22) 사도들은 주로 “부활”에 관한 설교를 했다.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을 뜻하는 그리스도의 피가 단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는다(행 20:28).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도 한 번 언급되며(행 3:15),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도 두 번밖에 언급되지 않는다(행 2:36; 4:10). 그가 나무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도 단 세 번만 언급될 뿐이다(행 5:30; 10:39; 13:29).
반면에 부활은 10번이나 언급되며(1:22; 2:31; 4:2,33; 17:8,18,32; 23:6,8; 24:21), 부활을 언급하는 “살리셨다, 일으키셨다”는 표현도 여러 번 등장한다(2:24,30; 3:15,26; 4:10; 5:30; 10:40; 13:30,33,34,37; 17:3,31; 25:19; 26:8,23).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부활은 중심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일반적인 사형 방법 중 하나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런 일들 중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던진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죽었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복음 전파자로서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거리설교와 개인구령 사역이 죄를 지적하고 지옥을 강조하는, 정죄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죄인임을 지적하고 지옥을 강조하는 것만큼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도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구원받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속적인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며,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부활은 핵심적인 내용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전 15:17).
우리가 걸어가는 이 믿음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세상 종교들과 같이 죽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성경에서 31번 나온다 - 신 5:26, 수 3:10, 고후 6:16 등).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뼈 조각이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우리의 믿음은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부처의 뼈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종교 창시자들은 모두 죽었고, 부활하지 못했다. 참된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셨기 때문에(요일 5:20)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날마다 신선한 교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응답받는 기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예수님의 자상한 손길을 매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죽은 신을 섬기는 세상 종교와 다를 바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걸맞은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교제 가운데서 그 생명력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죽은 신을 섬기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십자가”를 우상처럼 받들며 죽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는 어떠한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력 있고, 열매 맺는 교회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걸어놓고 십자가는 존귀히 여기면서도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활력을 얻지 못하는 죽어 버린 교회인가?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엡 5:14).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영적 노숙자의 생활을 벗어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