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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대한 무지 2 - 카톨릭의 포교와 그리스도인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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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0월호>
포교(布敎)란 종교를 전파하는 행위를 말한다. 참된 믿음이든 거짓 믿음이든 종교라 이름하는 것을 전파하는 행위이다. 포교는 단순하게 그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종교를 통한 사회 문화적 전파를 이루거나, 혹은 세력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선교(宣敎)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포교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기독교 신앙에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선교라는 말이다. 선교는 기본적으로 복음 전파와 같은 개념으로서, 지옥에 갈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으로 이끄는 행위이다. 단지 타지역에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위임명령을 수행한다는 개념이 더해져 선교(mission)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정립되었다.그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교라 부르지 않는다. 반면 소위 선교라 이름붙이고 있지만 사실상 세력 확장만 하는 기독교 단체들의 행위는 포교라 불러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포교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선교라 거짓말하고 있다. 교회사 2천 년의 역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와 더불어 불경건한 자들의 포교로 얼룩져 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카톨릭이라는 거짓 교회가 선교가 아닌 포교를 행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된다.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했는지 알게 되면, 도저히 선교라는 단어를 그들에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1. 카톨릭의 포교 방법 : 전쟁
카톨릭에서 행한 포교의 대표적인 방법은 전쟁이다. 그들은 힘의 논리로 세력 확장을 꾀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캔터베리의 어거스틴(?-605)의 영국 개종 : 이 사람은 베네딕트 수도원 출신으로, 교황 그레고리의 명으로 브리튼 섬(영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들어갔다. [히포의 감독인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354-430)과는 다른 인물이다.] 그는 당시 영국 왕 에델버트를 회유하여, 야만족이던 앵글로색슨족들을 로마식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왕의 후원이 있었기에 야만족을 개종시키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이미 영국 땅에 있던 기독교였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보기에 너무도 이상한 기독교였다. 사제들이 결혼도 하고, 유아세례도 주지 않으며, 로마식 부활절 의식도 없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였다. 어거스틴은 그곳 목사들을 모아놓고 로마카톨릭에 굴복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러 차례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어거스틴은 색슨족 군대를 풀어 쓸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 위협대로 영국 기독교는 군대에 의해 섬멸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로마카톨릭의 영국 지부가 생기게 되었으며, 어거스틴은 영국 카톨릭의 중심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2) 샤를마뉴(764-814)의 독일 개종 : 샤를마뉴 대왕은 게르만족의 가장 강력한 왕국인 프랑크 왕국의 왕이다. 그는 고대 서로마제국의 영토를 거의 차지할 만큼 정복왕이었는데, 그 정복지마다 교회를 세움으로써 카톨릭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사제들은 십자가를 들고 전장터를 누볐으며, 그때마다 교황의 세계는 확대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정복지는 독일의 작센(색슨) 지역인데, 이 지역에는 교부들의 시대(2세기)부터 성경적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었으며, 두 세기 전부터는 아일랜드 섬에서 온 성경적 설교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선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마뉴에게 그런 것은 기독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직 로마카톨릭만이 기독교였던 것이다. 샤를마뉴와 그의 사제들은 동일하게 외쳤다. “세례를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은 이슬람교도들이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슬로건으로 포교한 것과 똑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코란 대신 “물”(세례)이 들어갈 뿐이다. “한 손에는 물(세례), 한 손에는 칼!” 카톨릭식 포교에 따르면 세례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복음 전파는 필요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죄사함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성경도 필요없다. 오직 자기 종교를 버리고 세례받음으로써 카톨릭교도로 재탄생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3) 십자군 전쟁(1906-1270) : 교황들이 유럽 여러 왕들을 모아 이슬람 세계와 벌인 십자군 전쟁은 교황권 확대를 꾀하다 실패한 전쟁이다. 겉으로는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탈환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예루살렘으로 교황의 보좌를 옮기려는 것과, 이슬람 교도들을 교황의 발밑으로 굴복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철저히 실패했으며, 양자 간에 말할 수 없는 희생을 야기시켰다. 이 전쟁은 서로간의 “성전”(聖戰)이었다. 만약 이 전쟁에서 유럽이 이겼다면 교황의 세력은 중동까지 미쳤을 것이며, 이 사건은 카톨릭 선교의 한 장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4) 스페인의 남미 정벌(16세기) : 종교개혁 이후 교황은 유럽의 절반 가량을 잃게 되었다. 개신교 세력은 강력했으며, 더 이상 칼로는 되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교황은 대서양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마침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여러 나라들이 남북 아메리카로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는 스페인의 몫이었다. 정복자들은 자기들을 평화로이 맞이하는 원주민들을 무참히 죽였다. 고대 문명들을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파괴하였으며, 그 자리에 대신 십자가를 꽂았다. 그들의 방식은 동일했다. “한 손에는 물, 한 손에는 칼!” 남미의 국가들은 아마도 카톨릭 포교에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카톨릭 포교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행한 카톨릭 포교는 모두 동일하다. 서양 열강들이 중국을 삼키려고 했을 때도 카톨릭은 프랑스를 앞세워 포교하려고 했다(1858). 우리 나라의 병인양요 역시 프랑스 군대를 앞세워 카톨릭 포교를 행하려 했던 사건이다(1866). 이처럼 카톨릭 포교는 주로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카톨릭과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예들을 들어가며, 오늘날 기독교가 전쟁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오직 카톨릭에만 적용되는 말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비록 제도적인 개신교라 해도 전쟁을 앞세우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승리로 식민지에서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군대를 동원하여 선교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내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순교하면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2. 카톨릭의 포교 방법 : 이교도 문화의 수용
카톨릭은 카톨릭 의식을 반대하는 성경대로 믿는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히 박해했지만, 이교도적 풍습과 의식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제국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가 종교로 삼았을 때, 수많은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교도적인 풍습과 전통을 그대로 교회에 가져왔으며, 교회들은 그것을 수용했다.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면 그들 풍습 속에 남아 있는 요소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교도 여신이 마리아 형상으로 유입되었고, 크리스마스, 부활절, 제사장 제도 등 많은 이교도적 풍습들이 유입되었다. 아직은 로마카톨릭이 확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반대하는 교회들과 찬성하는 교회들이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찬성하는 교회들이 자연스럽게 로마카톨릭으로 흡수되어 성장하게 되었고, 반대하는 교회들이 이단으로 박해받게 되었다.
캔터베리의 어거스틴도 그곳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히 박해했지만, 그곳 야만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북유럽 신화 등 이교도들의 문화를 인정해 주었다. 그는 단지 세례만 주어, 교황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하면 그만이었다.
중국에 포교할 때는 도교나 유교 의식을 인정해 주었다. 명나라 때 예수회는 조상 숭배나 공자 묘에 대한 참배 등을 인정하였다. 후에 도미니크나 프란체스코회에서는 조상 숭배를 금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 조상 숭배를 반대하는 카톨릭 교도는 없다. 인도에서는 힌두교 구루들과 협력했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은 브라만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남미에서는 세례를 주어 개종시킬 때까지는 철저하게 탄압했지만, 그 이교도 문화들은 그대로 수용했다. 오늘날 카니발 축제를 보면 카톨릭으로 가득 찬 남미에 남아 있는 이교도들의 풍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나아간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에큐메니칼 운동은 명목상으로는 기독교 세계의 일치를 말하지만, 오늘날 그 운동은 실제적으로 이교도들과의 연합까지 꾀한다. 교황의 발밑에서 개신교도들과 이교도 승려들이 함께하는 모습은 이미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카톨릭의 관점에서 이교도들은 어떠한 의식을 행해도 관계없다. 카톨릭은 이미 타종교에서의 구원을 인정해 놓은 상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 모든 종교들 위에 교황이 군림하는 것이다. 교황의 세력 확대, 그것이 그들 포교의 목적이다. 과거 로마 제국을 접수했고, 게르만족이 유럽에 확대했으며, 이슬람에 확대하려다 실패했지만 신대륙에 확대했고, 이제는 전 세계로 확대하려 한다.
3.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1) 그리스도인들의 선교와 카톨릭의 포교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선교는 오직 복음 전파로 일관되었다. 그들은 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칼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오직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다(엡 6:17). 종교개혁 시대에 많은 개신교 국가들이 정치와 종교를 연계시키기도 하고 카톨릭을 대항해 종교 전쟁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선교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는 순교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당연히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서 로마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선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다. 카타콤에서 숨어 살던 그리스도인들, 콜롯세움에서 찢겨져 나간 그리스도인들은 카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로써 복음을 전했으며, 그렇게 해서 로마에 효과적인 선교를 이루었을 때, 사탄은 콘스탄틴 황제를 일으켜 그 그리스도인들을 국가적 기독교로 흡수해 버렸고, 또 로마카톨릭으로 흡수해 버린 것이다.
중세 암흑 시대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 즉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폴리시안, 불가리안, 카타리, 보고마일, 알비겐스, 보도파, 페트로부르시안, 롤라드, 왈덴스 등은 말 그대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카톨릭 교도들에게 복음 전파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혹은 숨어서라도 복음을 전했으며, 그 전파의 결과로 순교당했다. 특히 왈덴스는 박해를 피해 알프스 산지에 숨어 살다가도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도시와 마을로 들어가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그 결과로 왈덴스 마을들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래도 선교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재침례교도들은 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이 창검을 겨누고 싸우는 동안에도 복음 전파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이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당도했을 때, 그들의 행동은 남미를 접수한 스페인 카톨릭 교도들과는 사뭇 달랐다. 카톨릭이 전쟁으로 포교하는 동안,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했다. 심지어 그들은 어떠한 형태의 국가 종교도 거부했다. 유럽에서 카톨릭에게 당했다면, 신대륙에서는 개신교 국가 종교를 굳게 세울 만도 한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불신은 창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신교 국가라고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정치적으로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그 나라를 세웠고, 끊임없는 설교로 백성들이 자랐기 때문에 개신교 국가가 된 것이다. 물론 오늘날은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말이다.
(2) 그리스도인의 선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건전한 교리다. 성경의 기록 목적 중 첫째가 “교리”이듯이(딤후 3:16),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교리를 전파했다. 전하는 자들에 따라 약간의 교리적 차이가 존재하긴 했지만, 적어도 구원에 대한 교리만큼은 정확했다. 그것은 전혀 행위에 의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엡 2:8). 카톨릭은 금과 은으로 만든 십자가 형상을 전파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파했다(골 1:14). 간혹 무천년주의 선교사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전천년주의자들이었다. 엄밀히 말해 무천년주의는 선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 문화가 확장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텐데, 그러면 저들은 기회가 없을 텐데 어찌 지금 전파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천년주의자들이다. 앞에서 열거했던 암흑 시대의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윌리암 캐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허드슨 테일러 등 위대한 선교사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었다.
(3) 그리스도인 선교의 또 다른 특징은 높은 도덕성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교육이나 법률을 통한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에 의한 것이다(엡 5:18).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충만함으로 그 열매를 맺는다.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신실한 설교자들은 단순히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정도만 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처럼 죄를 책망했고, 의를 선포했다. 그들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술을 끊고, 도박장을 떠났으며, 죄악들을 멈췄다. 술집과 도박장과 극장과 사창가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카톨릭에 포교된 나라들은 어떠한가? 유럽이나 남미나 아시아 일부 카톨릭 국가들은 도덕성이 심히 망가져 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교황의 세력만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는 미국도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황폐케 되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누볐던 유럽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 나라들이 성경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성경대로 믿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더 많은 “포교자”들이 있다. 카톨릭은 여전히 세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고, 개신교는 기독교 문화 전파에 힘쓴다. 방언을 전파하고, 세례를 전파하고, 교세를 확장한다. 이 모든 것들은 선교가 아니라 포교다. 우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막 16:15). 여건상 멀리 나가지는 못해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먼 곳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지원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부르심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행 1:8).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