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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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 욥기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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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성경은 “보편적인 책”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의 모든 형태의 삶에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 66권은 2천 년이 넘도록 계속 이어져 내려왔으며,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왔다. 성경은 “진리의 대양에 있는 한 방울의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진리의 대양이 한 방울로 응집된 것이다. 다섯 개의 대륙에서 성경 독자 500명을 무작위로 뽑아 그들에게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가장 위대한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로마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을 들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샘 존스(Sam Jones, 1847-1906)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잠언과 야고보서를 사랑했다. 예언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편중한다. 소수만이 누가복음과 베드로전서를 꼽을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마태복음을 선택하고, 오순절파와 성결교는 십중팔구 사도행전을 선택할 것이다. 갓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책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린도후서가 사역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사도행전을 선호한다. 몇몇 배짱 좋은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좋아하고, 이사야서나 시편 같은 구약을 손꼽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한편 문학인들에게 있어서 책 중의 책은 “욥기”이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욥기가 책 중의 책인 것이다. “시편”은 혼의 마음속 외침을 생생하게 묘사할 뿐이며, “잠언”은 지혜의 샘을 다룰 뿐이다. 그런데 이런 지혜가 욥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욥기에 관해서,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욥기야말로 인간 지성의 가장 위대한 걸작일 것이다.”라고 말했고,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는 “이 책에 필적하거나 이 책의 선배라고 할 만한 책은 없다.”라고 그의 책에 썼다.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욥기와 같은 문학적 업적을 남긴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라고 말했으며, 브래들리(Bradley)는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독보적인 책이며, 세상 문학 작품들 중에서 영감받은 히브리어 시의 꽃으로 우뚝 솟아 있다.”라고 말했다. 왓슨(Watson)은 사무엘 데이비슨(Samuel Davidson, 1806-1898)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1급 광도를 가진 별처럼 욥기 저자의 눈부신 천재성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라고 말했고,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은 “욥기는 고대와 현대의 모든 시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라고 했으며, 마틴 루터는 “욥기는 성경의 어떤 다른 책들보다 웅장하고 숭고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학적 평판 외에도 “욥기”는 두드러진 두 가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 욥기는 세상의 모든 책들 가운데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책”이다. 욥기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책들이 몇 개 있지만, 욥기는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책들이라도 욥기에는 비교가 안 된다.


두 번째로 욥기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92) 시대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던 지구 과학에 관한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향후 30년 이내에 성취될 예언들이 언급되어 있고, 불교 신자나 도교 신자, 브라만교 신자, 유교 신자 등이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영의 세계”에 관한 계시들이 들어 있으며, <사자의 서, The Book of the Dead>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삶”을 계시하고 있다. 또한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심과 헌신에 관한 영적인 사례가 들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 사역에 관한 모형이 있으며, 플라토(Plato)나 소크라테스(Socrates), 마르크스(Marx), 프로이트(Freud), 다윈(Darwin) 등의 저서에서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해답이 있다. 성경에 포함된 책이든지 그렇지 못한 책이든지 간에, 지금까지 기록된 책들 가운데 최초의 책인 욥기가 그 뒤를 이어 출간된 모든 책들을 압도한다. 최소한 고통, 고난, 죽음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러하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세상에 보여 주시기 위해 세 사람을 선정하셨는데, 그중 한 명이 “욥”이었다(겔 14:20). 특히 욥기 31장에는 십계명의 요구를 훨씬 뛰어넘는 “한 개인의 의”가 제시되어 있다.

성경은 지금까지 오류가 증명된 적이 없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다. 이 “최종권위”로 다른 모든 권위들을 판단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 음악가, 변호사, 의사, 과학자, 인류학자, 헬라어학자, 히브리어학자, 성경 개정자, 성경 주석가, 사제, 주교, 교황, 설교자, 교육자 등의 저서들이 성경과 불일치할 때는 그 저서들을 내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서가에는 귀한 책이 몇 권이나 있는가? 1년에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책은 자녀들에게 물려줄 만한 책이 못 된다는 점을 아는가? 거추장스러운가? 그렇다면 버리라!


우리는 성경 66권을 접할 때 취하는 것과 동일한 태도로 이 위대한 책인 “욥기”에 접근해야 한다. 즉 본문을 사실 그대로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하며(살전 2:13), 결코 자신이 성경을 고칠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소위 “경건한” 학자들의 말은 신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경건한”이라는 수식어를 집어넣은 이유는 이 말이 현대의 파괴적인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로서, “경건하다”는 평판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공부한 독자라면, 그런 자들은 바르게 보존된 킹제임스성경 본문이 그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단 한 가지도 답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지금까지 그 대적들이 반박해 온 내용들은 욕과 비방과 잡담과 오만한 비웃음에 지나지 않았다. 성경대로 믿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소위 “자격 있는 권위자들”과 “인정받는 학자들”이 우리를 전혀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


사실 그들은 성경적인 어떤 것을 토론하는 데 있어서 성경이나 성경의 저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자, 우리에게는 절대적 진리인 “무오한 책”이 있다. 이 성경을 통해 그동안 강단에서 지식을 가르쳐 온 사람들을 쉽게 바로잡을 수 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카일(Keil), 랑게(Lange), 델리취(Delitzsch), 엑셀(Excell), 드라이버(Driver), 데이비슨(Davidson), 움브라이트(Umbreit), 에발트(Ewald), 피크(Peake), 버드(Budde), 굿(Good), 메이어(Meyer), 둠(Duhm), 마르크스(Marx), 시에그필드(Siegfield), 슐롯만(Schlottman) 등과 같은 학자들을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아주 훌륭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물리학 분야의 아인슈타인, 로렌즈, 밀러, 퍼미 등이 했던 주장보다 건전하며, 지난 500년간 국제 정책 분야에서 유엔이나 로마카톨릭이 해 왔던 주장보다 훨씬 더 건전하다.


①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분이시다.
②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질계의 피조물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
③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서로 의사소통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인간들과 직접 의사소통하시는데, 즉 “언어”로 소통하시는 것이다.
④ 완벽한 계시에 축자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으실 만큼 능력 있으신 하나님께는 그 계시를 오류 없이 보존하실 만큼 능력이 있으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⑤ 진리를 찾는 죄인들이 이 계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욥기에 접근할 때 어떤 가정이 아닌 사실을 다루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진리를 찾고 있을지라도(고후 4:4) 우리는 그렇지 않다. 성육신하신 진리를 찾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아직도 기록된 진리(요 17:17)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기록된 진리”와 “성육신하신 진리”가 있다. 우리의 독단적 성향과 확신이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학자들을 완전히 분노케 하고 흥분시켜서 그들이 누군가를 거의 살해할 지경에 이른다 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및 보수주의 학자들은 절대적 진리를 자신들의 “관대한 무지”로 대체시키기 위해 “관용적인 불가지론” 뒤로 숨어 버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변개시키지 말아야 하고, 또한 그들에게 순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는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30년간 헬라어 문법을 공부해 온 근본주의 신학교의 박사들과 성경 개정 위원회의 구원받지 못한 신학 박사들에게 적용된다. 무슨 말로 변명해도 무지는 무지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고,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시고 완성자이시며,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며, 모든 지식과 지혜의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인도자가 계시기 때문에 “과학적 해석,” “비평 서적,”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학자적인 지위,” “기념비적인 연구,” “광대한 기술 자료” 등의 명목으로 자신들이 진리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는 미혹당한 죄인들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 200와트 휴대용 등불이 있는 사람에게 손전등이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맥 속에서 말씀하신 그 내용 그대로 믿을 것이다. 4천 명의 소위 “헌신된 천재들”이나 “경건한 학자들”이 진리를 바꾸고자 하는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가볍게 받아넘길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의 저자께서 계시고, 또한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상고하라.』(요 5:39)라고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을 우리 가까이에 두셨다(롬 10: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카일(Keil), 델리취(Delitsch), 게제니우스(Gesenius), 하카비(Harkavy), 움브라이트(Umbreit), 포셋(Fausset), 마우러(Maurer), 모펫(Moffat) 등과 같은 파괴적인 학자들의 주장 따위는 필요가 없다. “학자 연합”(Scholars Union) 소속의 다른 많은 학자들을 포함해서 위에 열거한 학자들은 성경적 문제를 다룰 때 참으로 불필요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절대권위가 없으며 단지 그들의 두뇌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책을 고치려고 할 때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죄인들이 만들어 낸 오류투성이의 자료들만 있을 뿐이다.

필자는 가끔씩 “어디론가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받은 책이 단 한 권일 경우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곤 한다. 물론 <한글킹제임스성경>이다. 만일 성경 66권 중에서 한 권의 책만 고르라고 한다면, 욥기 또는 시편일 텐데, 필자는 단연 욥기를 선택할 것이다.
“욥”이란 이름은 “박해받다”라는 뜻이다(환란 때 이스라엘처럼). 욥은 이스라엘이 환란 기간에 있을(사 63:1) “에돔” 땅에 있다(애 4:21). 욥을 박해한 자가(욥 1:6-12) 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을 박해할 것이다(계 12:13). 하지만 종국에는 욥이 “사로잡힘”에서 회복되는데(욥 42:10),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사로잡힘”이 환란 기간 끝에 돌이켜지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부활도 포함되기 때문에(겔 37:12-14, 행 26:6-8), 욥의 죽은 자녀들은 욥기가 끝날 무렵에 부활하게 된다(욥 42:13). 그러나 400명의 주석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욥기는 이제 곧 시작될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이 겪을 고통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서,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욥기의 예언을 다룰 때 보여 주는 자료들은 너무나 미미하다.


욥기에는 적그리스도, 마귀, 환란 때 군대의 이동, 재림의 경로, 환란 때 이스라엘의 상황, 휴거에 수반되는 현상들, 아마겟돈 전쟁 등에 관한 묘사 외에도 환란 때 죽음을 구하는 사람들, 환란 후반기의 재앙들, 이 기간 중에 있을 마귀 숭배 등이 나온다. 보수주의 학자들이 이 모든 참조 구절들을 지나쳐 버리는 이유는, 그들이 고의적으로 킹제임스성경을 깎아내리고 성경에 나온 진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 본문에 없는 말을 한다.”라고 비난한다. 편견으로 가득 차 있고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며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자만심이 강한 자들이 우리를 박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에 자기들 코앞에 있는 것 외에는 보지 못한다. 욥기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합친 것보다 재림에 관한 참조 구절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욥기 본문을 보건대, “욥기의 저자”가 욥을 위로하러 왔던 세 명의 “위로자들”과 동시대의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상당히 많다.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겼으므로, 이 세 사람이 욥에게 대답하기를 그쳤더라. 그때 람의 친족 부스인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어 욥에 대하여 그가 분을 발하였으니 이는 욥이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의롭게 여김이더라. 그가 욥의 세 친구에 대하여도 분을 발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답을 발견치 못하고서도 욥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때 엘리후가 욥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음이더라. 엘리후가 이 세 사람의 입에 답변이 없는 것을 보자 그가 분을 발하였으니 부스인 바라켈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젊고 당신들은 아주 늙었으므로 내가 주저하여 당신들께 감히 내 의견을 보여 주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수가 많은 자가 말을 해야 할 것이요, 연수가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쳐야 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하신 분의 영감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시는도다.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항상 현명한 것이 아니요, 나이 든 자들이라고 심판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게 경청하라. 나도 내 의견을 보여 주겠노라. 보라,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으며 당신들이 말할 것을 찾는 동안 나는 당신들의 논리에 귀를 기울였노라. 정녕, 내가 경청하였으나, 보라, 당신들 중에는 아무도 욥을 설득하거나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니 당신들은 ‘우리가 지혜를 발견하였으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욥을 밀어내셨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이제 그가 그의 말을 내게 직접 표현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더라. 그들이 놀라서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그만두었도다. 내가 기다렸다가 (이는 그들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더 이상 대답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욥 32:1-16).

“엘리후”는 자기 자신이 욥기의 저자라고 말한다(욥 32:16). 그러고는 자기 자신을 빼는데(욥 42:1-10), 욥기 후반부에서는 “세 명의 친구”만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욥 42:7). 욥기의 기록 연대는 즉각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권위자들”에게는 쓸 만한 것이나 논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1800년 이후의 모든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욥기 32:16을 슬며시 지나친다. 그들에게는 학자들 간의 “논쟁”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의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젊어도 가장 훌륭한 인물이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욥기 서문에서 발췌> BB [다음 호에 계속]

특집 목회자 칼럼 46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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