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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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 욥기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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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9월호>

욥기의 저자가 “엘리후”라는 사실에 대해 근본주의자들, 무신론자들, 불가지론자들, 보수주의자들, 로마카톨릭, 복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한다.
1. B.C. 1900-1600년에 기록된 언어치고는 “너무 많이 발전되었다.” NCCC의 <해석자 성경>이나 자유주의자 브릭스(Briggs)가 쓴 저서 중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살펴보라.


2. 출애굽기, 파라오, 모세의 율법에 대한 참조 구절이 너무 많다(욥 4:9; 6:4; 8:8,10,17-19; 12:17,24; 13:24; 16:13; 18:15; 20:17; 29:6 등). 여기에 열거된 구절 중 80%는 미래에 성취될 “전천년주의적인 예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중 90%가 진리를 변개시키는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3. 내용이 전혀 “원시적”이지 않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솔로몬이 욥기를 기록했거나 최소한 욥기를 번역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적 자유주의자인 라이트풋(Lightfoot, 1880)만이 엘리후가 저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라이트풋은 즉각적으로 엘리후가 “모세 이후의 시대”까지 살았다고 덧붙인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근거로 이런 식의 주장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가 B.C. 170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이 책을 썼다는 “네 가지” 타당한 객관적인 증거들이 있다.


첫째, 출애굽기에 나오는 연대를 비교해 보면, 아브라함은 벌링거(Bullinger)가 제시한 연대(B.C. 1996)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라킨(Larkin)은 그 연대를 B.C. 2111년으로 못박고 있는데, 이는 벌링거보다 115년 앞서는 것이다. 이 “115년”이 창세기 36장에 열거된 에서와 그의 아들들의 연대에 더해지면, 욥기 2:11의 “테만인”은 B.C. 1780년에 욥을 “위로”하러 오게 된다. 왜냐하면 테만은 에서의 손자였고(창 36:15), 에서의 형제 야곱은 B.C. 1700년 이전에 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셔(Ussher) 주교가 창세기 35-37장 주석에서 제시한 연대는 B.C. 1800-1780년인데, 이집트에서의 “430년”을 고려해 볼 때 그보다 더 정확한 연대를 잡기는 불가능하다.


둘째, 욥기에 나오는 인물들(욥 2:11; 32:2)의 배경은 “족장 시대”이다. “수하인 빌닷”은 수아와 연관되며(창 25:2) 예레미야 49:7의 에돔과 명백하게 연결된다. “테만인 엘리파스”는 창세기 36:10,11에서 그 이름을 얻었고, 분명 예레미야 49:7과 아모스 1:11,12에 나오는 에돔과도 연계가 된다. “후스”의 형제인 “부스”(창 22:21)는 같은 문맥에서(렘 25:23) 찾아볼 수 있으며, 참조 구절을 예레미야에서 계속 얻을 수도 있다. 예레미야는 52장으로 구성되어 있고(4×13) “예레미야”란 이름은 “쫓겨나다, 버려지다”(cast out)라는 의미인데, 이 표현은 그 책에서 13번 나온다. 예레미야가 요한계시록 11:1-4의 모습을 미리 보면서 예언한 것이 분명하다. 이 기간에 아이를 가진 여자들을 향해 경고하신(마 24:19) 구세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코 아이를 갖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렘 16:2). “나아맛인 소팔”은 엘리파스와 빌닷처럼 신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스 땅”에 소팔이 살았다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우스 땅”을 에돔과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애 4:21, 렘 25:20,21). 창세기 36:28은 “우스”(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그 땅 이름이 붙여짐)가 에돔 땅에 살았던 “호리인”(창 36:20,21)임을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욥기의 배경은 시내 반도가 아니라 “에돔”이며, 등장인물들 역시 모세가 아닌 “에서의 손자들”과 동시대 사람들이다.


셋째,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아담이 살았던 시대, 곧 “홍수가 나기 이전 시대”에 관한 참조 구절들을 완전히 간과한다(욥 8:8; 15:19; 20:7-15; 21:13; 22:15,16; 31:33 등). 이 구절들이 언급되면 주석가들은 연대기적인 중요성에 대해 전혀 주석을 달지 못한다. 그들은 욥기의 등장인물들이 범죄자들과 범죄들에 관해 말할 때 그들 마음속에서 아담과 홍수 때의 육체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단 말인가? 욥기가 “모세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왜 파라오가 언급되지 않는가? 파라오는 출애굽 이후로 “죄수 중의 우두머리”가 아니던가? 더군다나 욥기에는 창조에 관한 주제가 왜 계속해서 나오는가?(욥 15:15; 25:5; 26:7-14; 38:4-11 등) 또한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왜 언급되는가?(욥 1:6; 2:1; 38:7) 여호수아, 재판관기, 사무엘상 등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넷째, 연대 문제를 단번에 확고히 매듭짓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해 보자. 왜 욥기 그 어느 곳에서도 “모세의 율법”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인가? 여호수아나 느헤미야를 읽어 본 사람들은, 출애굽 이후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한 다음에는 히브리어 성경에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책”이라는 표현이 아홉 번 언급되고 있으며, 포로기 이후 기간에는 열다섯 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토라”(히브리어로 “율법”)란 단어가 출애굽기 12:49과 말라키 4:4 사이에서 100번 이상 나온다. 한편 그 단어가 욥기에서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은(욥 22:22)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언가를 직접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부분”(욥 41,42장)에 가서 욥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벌링거가 말한 것처럼 욥이 잇사칼의 아들이었다면(창 46:13) 어떻게 그가 자신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야곱의 아들들이 아브라함의 복(창 12:1-4)에 대해 몰랐다고 말하려는가? 욥이 야곱의 자손이었다면 욥에게는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받은 후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욥이 야곱의 자손이었다면 엘리후가 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엘리후는, 나홀의 둘째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조카인 “부스”(창 22:21)의 후손임이 명백한데도 말이다(욥 32:2).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면(욥 32:16) “엘리후”라는 증인이 이 책을 기록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욥기는 우리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욥이 겪었던 일”(욥 2:8), 곧 철학, 정치학, 과학, 교육, 미술, 음악, 문학 등이 “고난”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도, 완화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뿌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기록된 책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가장 오래된 책이 이런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수 있다. 고통과 고난은 인생에서 실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궁핍이나 고뇌도 욥이 경험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질병, 고난, 궁핍, 사별, 눈물, 오해, 질책, 근심, 고뇌, 고통, 죽음 등이 인생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몫이다(욥 14:1,2). 이 세상은 여전히 “눈물의 골짜기”이며, 과학과 교육은 그것을 바꾸는 데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의약의 진보”와 “과학 기술”을 언급하는 무지한 인간들은 진통제, 병원 치료, 전문 치료가 전 세계 인구의 2% 이하의 사람들만 누리는 사치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은 미국 중산층의 문제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욥기는 과학이나 교육이 인간의 운명을 전혀 진보시키지 못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 : “욥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77번 읽고 주석가들의 중요한 주석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피터 럭크만 목사는 기념비적인 “히브리어 학자” 리차드 움브란트(Richard Wurmbrand)와 <스탈린그라드, Stalingrad>의 저자 테오도르 플리에버(Theodore Pliever)와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둥소리, The Crack of Doom>의 저자 윌리 하인리히(Willie Heinrich)의 주석이 인생을 낭비한 소위 “히브리어 권위자들”이 내놓은 억측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랄란 포포프(Haralan Popov)와 <트레블링카, Treblinka>의 저자 스테인(Stein)의 기여가 없었다면 욥기 주석은 실로 “학자적인 태도”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 책들을 모두 섭렵했다.]

욥기를 공부할 때 성경 학도는 다음 일곱 가지 사항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학자들이 본문에 가하는 끊임없는 공격들을 제쳐 두고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면, 사도 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과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욥 26,38장).


2. 학자들은 과거에 구령 메시지나 장례식 메시지에서 하나님께서 높이셨던 본문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욥 1:21; 19:26 등).


3. 학자들은 욥기 40:15과 41:1에 나오는 “비히못”과 “리비야단”에 관한 구절들을 믿지 않는다.


4. 학자들은 욥이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는 사실(욥 42:13-16)을 거부한다. 이 일은 욥기 42:1의 정확한 문맥을 고려할 때, “다니엘의 칠십째 주 마지막”(단 12:1-6)에 일어날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로잡힘”은 실제로 돌이켜질 것이다(욥 42:10).


5. 고난을 다루는 구절 중에서 많은 부분이 “사중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우선은 “욥”에게, 그다음은 속죄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그다음은 “지옥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다음은 “대환란 기간의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욥 16,18,30장 등).


6. 주요 주석가들은 욥기에 있는 예언적 암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다. 무지한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번역가들은 하나같이 본문을 변개시킨다. 고의적인 무지로 눈이 멀어서 그 구절들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 대표적인 주석가들은 두 가지 사항에 관해서만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욥기 주석서들 가운데 어떤 것이든 무작위로 30개를 골라서 살펴보라. 그 주석서들을 쓴 30명의 학자들이 “드라마”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욥을 위로하러 온 세 명의 위로자들은 “비평가들의 유형,” 곧 전통주의자, 독단주의자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된다. 에발트(Ewald)는 이 세 명의 위로자들을 가리켜 “대표적인 인간 유형을 시적으로 의인화한 것”(<성경적 예증>, p.13)이라고 말했는데, 자신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또한 포셋(Fausset)은 엘리파스를 “자신의 신조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신학자”라고 말하면서 종교적인 독단주의자로 보았다.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엘리파스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


욥기 15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엘리파스는 빌닷이나 소팔만큼 “전통주의자”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욥기 25장에서 빌닷이 하는 말을 보면 그는 전혀 “전통주의자”가 아니다. 욥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때때로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 “위로자들”을 다룰 때 그들 간에 큰 차이점을 찾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욥은 종종 친구들의 철학을 사용하기도 한다. 위로자들이 했던 말들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사실이다. 그것이 전통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상관없다. 그들의 말이 모두 끝난 뒤에 말했던 엘리후조차 앞에서 나온 토론에 더 많은 진리를 첨가하고 있다. 아침처럼 나타나서 어둠에 빛을 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욥 38장, 고후 4:1-6). 엘리후가 “자기 의”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와 상관없이 그는 욥의 동료로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사탄이 엄청난 고통과 무서운 환경으로 공격하는 데는 어떤 정형화된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욥과 같은 상황에 직면한 사람의 생각을 일정한 원리에 따라 체계화할 수는 없다. 욥기 4장 이후로 그와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단계적인 프로그램”에서 나온 체계화된 계획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에 관하여 “감정적인 발전”에 따라 진행된 토론으로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이었다. 따라서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오랫동안 어떤 도식화된 틀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과학, 교육, 종교를 세 개의 『쓸모없는 의사들』(욥 13:4)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것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토,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스토아 철학에 봉사하는 바보들에게나 걸맞은 것들이다. 욥기에서 서로 간에 주고받는 설전은 뜨겁고, 과격하며, 개인적이고, 모욕적이며, 여러 차례 신성 모독에 접근하기도 한다. 그것은 욥이 처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을 법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재난은 결코 차분하게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결코 아담의 아들들의 타락한 본성을 미화하지 않는다. 욥이 처한 상황에서는 “체계화된 사고”나 “지적인 반박”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반격을 가했고, 그의 친구들 역시 욥기 32장에 이르기 전까지 손에 잡히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집어 들어 욥을 강타했다. 욥기에서 “순례의 과정”을 찾고자 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고통과 고난은 그 특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재난과 사별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좀처럼 어떤 “공식”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혼란과 혼동은 보병 전투나 내전 또는 거의 죽을 뻔한 고문을 겪은 사람의 미친 마음이 나타내는 주된 특징이다.


욥기는 얼마나 경이로운 책인가! 한 저주받은 인간의 고뇌 속에서, 친구들과 가족, 재산, 건강 그리고 살아야 하는 동기조차도 파괴된 그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 “학생”을 향해 엄한 태도를 풀지 않으신다!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질병과 잠 못 이루는 밤, 육신을 뒤덮는 벌레들, 열병, 악몽, “번영의 때의 친구들”의 조롱 속에서도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진짜 문제, 곧 “자아”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자기 의”는 마땅히 경고를 받아야 한다. “경건하고 헌신되고 성별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는 길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존중하지 않으신다. 스테판은 성령으로 충만했다. 그래서 살해되었다.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했으며, 그로 인해 195번의 채찍을 맞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존 후스(John Hus, 1369-1415)는 참으로 “경건”했지만,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그를 화형에 처했다.


리차드 움브란트는 루마니아 경찰서의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1948-1956) 하나님 앞에서 춤을 췄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설교했다. 그의 혼의 가련한 절규 가운데 정신 착란증이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에서 또다시 우리는 풀리지 않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잿더미 위에서 외치는 욥의 절규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분을 보게 하지 않으시며, 왜 나와 나의 친구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시는 것인가? 주님께서는 선한 하나님이신가?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 중 그 누구도 “욥기”를 피해 갈 수 없다. 잿더미(욥 2:8)는 도시의 쓰레기장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므로(마 5:22), 욥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고난의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 대신 “자신의 의”를 신뢰하다가(롬 10:1-5) 지옥에 버려진 혼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욥 30:17-20). 간단히 말해 욥기는 신구약의 모든 주요 교리들을 다루는 광범위한 책인데, 이러한 교리들은 고통, 자아, 고난, 죽음, 심판 등을 다루고 있다. 수 세기에 걸쳐서 구원을 받았든지 받지 않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은 다음의 무시무시한 절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오 내 친구들아,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이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음이라』(욥 19:21).


이제 “에돔” 지역의 “우스 땅”으로 가서 고난에 대해 처참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시는 우리의 하나님을 좀 더 알아보자. 그곳에서는 비행기, 자동차, 울타리, TV, 보트, 카세트, 휴가를 위한 숙박 시설, 가구, 냉방 장치, 라디오, 은행, 가게, 청구서, 소송, 축구 경기장, 고속도로, 모터사이클, 쇼핑센터 같은 것들이 인생의 진짜 문제점들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쏟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못한다. 허례허식과 불필요한 장식들은 모두 던져 버리라! 현대의 온갖 장식들과 장신구들은 저 멀리 던져 버리라! 『너는 잠시 가만히 서 있으라. 내가 네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리라』(삼상 9:27).


조만간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잿더미”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우스 땅”을 먼저 방문해 보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고난에 대해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바울도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고후 11:21-33)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다 경험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아내나 아이들을 잃어 본 적이 없다. 또한 절름발이가 되거나 지긋지긋한 병에 걸려 본 적도 없다.


“욥”은 바울보다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었고 그런 모든 것들을 경험했다. 하나님께서 욥을 노아와 다니엘과 나란히 두셨을 때(겔 14:14), 그분께서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그에게 하신 것이다(눅 7:28).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공부할 때 성경에서 욥기보다 더 유익한 책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가난하게 사는 나라들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물질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 혼아, 일어나라! 엘리후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말하려 하고 있다!(욥 32:8) 엘리후가 책 중의 책이고, 시 중의 시이며, 한 죄인의 명성과 박해와 손실과 인내와 보상에 관한 서사시를 읊을 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도록 하자. 피터 럭크만 목사보다 더 훌륭한 인간은 없다!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욥기 서문에서 발췌> BB [이번 호를 끝으로 “욥기” 연재가 종료됩니다.]

특집 목회자 칼럼 46 / 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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