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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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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1월호>
몇 년 전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 자본론>이 세간의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지난 300여 년 동안 불평등이 심화되어 왔으므로, 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부유세를 80%까지 매기자는 주장을 했다. 사실 이 책은 여러 경제학자들로부터 통계를 작위적으로 잘못 인용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한 그는 "생산된 결과물"을 공유하자는 주장을 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에 의하면 "생산 수단의 공유화"를 주장한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끝자락에서 대환란을 가까이 내다보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공산주의와 상생 관계에 있는 "사회주의 이념"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해 나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될 것이라고 적시했던 럭크만 박사의 통찰력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불평등에 대해 최초로 불만을 가진 존재는 루시퍼였다. 그는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격차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과 "평등한 관계"가 되려 했던 것이다.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사 14:14). 이것이 바로 최초의 "반역"이자 "죄"였다. 만일 그러한 차이를 "불평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공정한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불평등은 가치중립적인 용어로서 그 자체로는 선과 악을 규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공정한 불평등은 선한 것이고, 불공정한 불평등은 악한 것이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입에 달고 산다. 로마카톨릭이 공산주의 창설에 관여했고 마귀가 육화한 존재인 적그리스도를 잉태하는 자궁임을 감안하면(<알베르토 시리즈>,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계시록> 참조), 공산주의자들은 일종의 "마귀의 전위 부대"이다. 사탄의 영으로 충만한 그들이 입술이 부르트도록 외치는 구호가 사회적인 불평등 해소이다. 물론 인간 사회에는 "불공정한 불평등"이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죄성의 결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문제다.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 후천년주의적인 발상인데, 이들 어리석은 자들은 정상적인 불평등과 비정상적인 불평등을 구분하지 못한다.
성경에도 불평등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대로 "절대적인 소유의 차이"나 "빈부의 격차" 그 자체가 불평등이라면 그런 불평등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에서 동일한 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린 정직한 대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한 대가로 먹고산다. 성령으로부터 거두게 될 소산 역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썩을 것을 위해 일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원한 것을 위해 얼마나 올바르게 심었는가에 따라 그 소산의 양이 달라진다(고후 9:6, 갈 6:8). 그렇기 때문에 신실하게 주님을 섬긴 성도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갈 6:9).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게 된다(시 126:5).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추수 때 많은 것을 거두게 된다(잠 6:8). 이에 반해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게 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에서 빈털터리 신세가 된다.
『게으른 자는 춥다고 밭을 갈지 아니하리니, 그리하여 추수 때에 그가 구걸하겠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혼들을 이겨오는 일에 게으르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게으른 성도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자 방침이다.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요일 2:17)가 주님으로부터 받게 될 상급의 "차이"는 영원하다. 말하자면 "영원한 빈부의 격차"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산주의자가 될 리 만무하지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 경우 그런 공산주의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상급의 차이에 대해 이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주님! 불평등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것을 다스리는 것은 불평등한 일입니다. 저에게 조금이라도 나누어 주는 것이 사회적 배려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받을 상급이 적은 이유는 그자가 이미 많이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닌데, 이는 각자가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불의하게 본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집은 말하기를 "주의 길은 공평치 아니하다." 하는도다. 오 이스라엘 집아, 나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겔 18:29)
이런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불평등이다. 만약에 이러한 불평등이 불의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모든 경우에서 이러한 정상적인 불평등은 "성장을 위한 동력"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이 악한 현 세상』(갈 1:4)에서는 수고와 능력의 대가가 반드시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외"는 법칙의 온전함을 증명해 줄 뿐이다. 이 세상에서조차 자기의 노력대로 거두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성경적인 원칙인 것이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성도가 받을 영원한 상급에 있어서는 불공정한 불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은 보상으로 갚아 주시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일하지 않았던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마 25:28)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빼앗긴 그 종은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것인가? 아마도 사회주의자들은 열 성읍을 다스리게 된 종과 다섯 성읍을 다스리게 된 종에 대해서도 불평등하다고 볼멘소리로 투덜댈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다고 불평할 것이다. 다섯 성읍을 초과하는 여섯 성읍부터는 40%의 부유세를, 여덟 성읍부터는 80%의 부유세를 매겨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천년왕국마저도 사회적 불평등이 만연한 개혁의 대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관점에서는 전혀 불평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성경적인 평등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원칙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공평한 것이요, 온전한 평등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짜 불공평한 것은 무엇인가? 죄인들이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고,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며, 입이 있어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않고,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불공평한 일이다. 이는 그들에게 눈과 입과 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 역시 불공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셨기 때문이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에만 쓰는 것도 불공평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몸을 값 주고 사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죄성에서 기인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은 천년왕국 끝에 가서도 폭발하게 된다. 모든 환경이 죄가 들어오기 이전 상태의 에덴처럼 회복되어 인간이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추위와 배고픔, 가난, 질병 등이 완전히 해소되었고, 더 이상 재판이 왜곡되는 억울한 일도 없으며, 자신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받을 수 있고(사 65:22), "의의 왕이요, 화평의 왕"(히 7:2)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 년 동안 통치하시는 그런 완벽한 세상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수가 마귀의 미혹에 걸려들어 주님을 대적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계 20:8)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먹고살기 위해서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다툴 필요가 없는데도 왜 그들은 마귀에게 동조해 버리는 것일까? 적그리스도의 왕국의 특징인 "사회주의"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자신의 눈에" 불공정하게 보이는 불평등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자기가 받을 합당한 것을 온전히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이 나보다 더 가진 것을 참지 못하는 죄, 곧 루시퍼가 지녔던바 다투게 하고 타락하게 만든 교만의 죄 때문인 것이다. 『다툼은 교만으로만 오나』(잠 13:10).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 세계에서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계 21:2). 그때가 되면 엄청나게 큰 저택들이 각 성도에게 주어질 것인데(요 14:2) 그 방들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방들은 지식으로 인하여 모든 진귀하고 즐거운 재물로 가득 차게 되느니라』(잠 24:4). "지식"은 우리의 영원한 삶을 풍성하게 마련해 주는 토대가 된다. 즉 지식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여(히 5:14)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 실행하게 되면(롬 12:2), 우리가 거하게 될 방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살게 될 저택은 어떨 것 같은가? 텅 빈 방들만 덩그러니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고 당신이 심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숙고해 보지도 않은 채 그것은 불평등한 일이라고 불평만 토로할 것인가? 인간이 그런 문제로 하나님과 다투려 하는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사악한 죄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무궁토록』(단 12:3) 빛날 것인데, 그 별들의 영광은 서로 같지 않다(고전 15:41). 이것은 불평등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적인 평등"이다.
불완전한 인간 사회라도 이러한 성경적인 원칙에 가깝게 운영되는 나라들은 경제 성장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마귀의 불평등 개념을 적용한 나라들은 북한, 쿠바, 베네수엘라 등처럼 가난과 멸망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세상은 사회주의 평등사상에 물든 채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고 있는 것이다. 『공의가 뒤로 돌아서고 정의가 멀리 섰나니 이는 진리가 길에 쓰러졌고 공평이 들어가지 못함이라』(사 59:1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