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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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조명 없는 하용조 목사의 요한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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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12월호>

얼마전 말씀보존학회에 우편물이 배달되었는데,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의 요한복음 강해 시리즈였다. 누군가가 하목사가 지은 쓸 만한 책이니 읽어 보라고 보냈을 것이다. 이런 일을 했을 때에는 하목사의 그 책들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그의 책들을 읽고 난 뒤 필자에게 남겨진 여운은 차라리 그것들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었다(마 26:24). 이유인즉 그것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핵심 장들 가운데 하나인 3장의 “거듭남”에 관한 하목사의 해석을 분석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나라”인가, “저 세상”인가?
하용조 목사는 그의 책 <예수님은 생명입니다>(두란노, 2007)에서, 주님이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시며 언급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열쇠는 ‘거듭남’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세상살이에 익숙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땅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익숙하게 삽니다. 그래서 저 세상에 대해서는 공연히 불안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 세상 말고 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야 저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p.166-169).
로마서 14:17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을 누리는 영적인 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인데, 그러면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속해서 마귀의 나라에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온 것이다. 아직 육신적으로는 이 세상에 살고, 아직 저 하늘 나라에는 가지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영적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영적 통치를 받는 하늘의 시민권을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이며, 아직 죄악된 세상에 살지만 구원받은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성도는 물리적인 상태에 제한되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통제 속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된다. 이처럼 요한복음 3장은 거듭난 성도가 누리는 영적인 나라를 묘사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점진적인 과정인가?
하목사는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정의를 내린다.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났을 때를 가리켜 진정한 탄생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제1의 탄생은 알고 있지만,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제2의 탄생에 대해서 무지합니다』(p.169). 이 부분만 보면 성경을 아는 독자는 하목사가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으나, 그의 해석을 읽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듭남이란,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탄생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탄생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다시 출발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 곧 중생이라는 뜻입니다』(p.173).
“거듭남”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던 죄인의 “영”이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엡 2:1). 그래서 이것을 중생 또는 새로운 출생, 두 번째 출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목사는 이 “영”의 거듭남에 관해 무지하여 새로운 차원에서의 인생 재출발 정도로 보고 있다. 다음의 글들은 그가 가르치는 거듭남이 성령의 영향력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개과천선(改過遷善)임을 보여 준다.
『성령님이 임하실 때 사람은 진정한 거듭남, 제2의 탄생을 맞게 됩니다. 제1의 탄생에서 부모님의 유전인자를 받듯이, 제2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받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의 인자가 없어지고 영생의 인자가 그 안에서 시작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죄성으로 부패했던 옛 사람은 사라지고 새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다가 어느 날 자신이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만만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 왔는데 한순간에 자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한번 가 볼까 생각하고 예배에 참석해 보니, 그동안 잘 들리지 않던 설교가 귓가에 속속들이 박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내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증,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즉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거듭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적 갈급함과 목마름을 통해 제2의 탄생인 거듭남을 주십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밤새도록 지속되며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납니다. 가슴이 설레고 성경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기적이요, 거듭남입니다』(p.176-177).
우리는 하목사가 “옛 사람”과 “새 사람”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목사는 이 두 개념을 죄의 성품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받는 식으로 가르치려 하나, 그것은 틀린 해석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셔서 그의 죽은 영을 살려 주시는데, 이때 “새 사람”이 형성된다. 『그[새 사람]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었으니 거기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골 3:10,11). 이 새 사람은 “새 사람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새 사람의 형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또 새 사람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인즉, 새 사람은 믿는 자 안에 형성되신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갈 2:20; 4:19, 골 1:27). 옛 사람은 옛 사람 아담이며(고전 15:22,47) 아담의 죄의 성품을 지닌 우리의 육신의 죄들의 몸을 가리킨다. 이 옛 사람은 골로새서 2:11에서 하나님에 의한 초자연적인 수술,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통해서 현재 그리스도인의 혼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이다. 죽은 영이 거듭남과 동시에 옛 사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과 분리될 뿐이며,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받을 때까지(롬 8:23) 그것을 입고 살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영이 거듭나는 순간 그 옛 사람 안에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엡 4:24),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되는 것이다. 성도의 거듭난 영은 그리스도와 한 영으로 연합하게 되며(고전 6:17), 이로써 거듭난 영 역시 새 사람으로 간주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목사는 위 글에서 “거듭남”을 점진적인 일로 그릇되게 가르친다. 설교 말씀을 듣고 거듭남이 시작되었다가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적 갈급함과 목마름을 통해 제2의 탄생인 거듭남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회심(conversion)과 거듭남(regeneration)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회심은 죄인이 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행위를 말하는 반면, 거듭남은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한순간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인 됨을 확신하고 회심하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될 수 있지만, 성령에 의한 거듭남은 마치 여인이 아이를 출산하듯 죄인의 죽었던 영을 성령께서 한순간에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점진적인 과정이 될 수 없다.

“물과 성령”을 혼돈스럽게 해석
하목사는 요한복음 3:5과 3:6의 두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매우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3:6). 하목사는 두 구절의 상호관계성을 무시하고 연속적인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행위, 선행, 노력, 종교적 습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에 의한 것입니다... ‘물과 성령’이라는 표현에서 조사 ‘과’는 ‘그리고’라는 뜻과 동시에 ‘즉’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물, 즉 성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물은 ‘말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과 성령으로 진정한 거듭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물은 씻는다는 의미에서 ‘회개’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람의 첫 번째 탄생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육적인 것이지만, 두 번째 탄생은 회개와 말씀으로 인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p.175).
우리는 하목사가 “물과 성령”의 의미를 갖은 노력을 기울여 해석해 내려고 하지만, 해석의 명확한 기준이 없고 이말 저말 중언부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또 “육”을 종교적인 노력으로 해석하면서 “영”과 구분시켜 거듭남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가 인용한 구절들은 그런 해석과는 전혀 무관한 구절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5절과 6절의 연속적인 문맥을 통해서 “육신의 물”에 의한 “육”의 출생과 “성령”에 의한 “영”의 출생을 설명하신 것이다. 물로 태어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머니의 양수(羊水)를 통해 육신으로 나는 출생을 말씀하신 것이고,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죄인의 죽은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문맥에 따른 정확한 해석이다. 5,6절에서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이처럼 간단명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목사는 어떻게 해서든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이말 저말 첨가하며 안간힘을 쓴 것이다. 제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의 의도에서 벗어난다면 육신적인 사색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적인 출생 외에 영적인 출생이 있다는 것까지는 상식적으로 알아냈는데, 그것이 인간의 몸, 혼, 영 가운데 “영”이 실질적으로 성령에 의해 재탄생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규명해 내지 못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펼쳐진 신약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와 “거듭남”은 신약 교리에 있어서 단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는 자들이 수많은 거짓 교리들을 양산하여 기독교계를 황폐화시켜 버렸다. 기본적인 두 교리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다면, 하목사의 나머지 책들은 읽어 보나 마나이다.
주님의 부르심도 없고 성령의 조명도 얻지 못하면서 성경을 가르치려 했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헛되이 다루게 된다. 성경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주님을 자의적으로 섬기려는 이들이 반드시 알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은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을 대적하신다는 준엄한 사실이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꿈들을 예언하고 그들에게 말하여 그들의 거짓말들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그릇되게 하는 자들을 내가 대적하노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도,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으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전혀 유익이 없으리라. 주가 말하노라』(렘 23:3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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