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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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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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8월호>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다. 예언된 왕국이 수립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필수적이므로, 재림과 왕국은 성경 해석에서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왕국은 구약에서 약속되고(삼하 7:12-16),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렘 23:5, 단 7:13,14). 초림 때 이 왕국의 왕께서 나타나시어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셨으나(마 4:17,23-25) 끝내 거부당하시고 말았다(마 11,12장). 그리하여 왕국은 연기되고, 교회 시대 2천 년 동안 신비적인 형태로 감춰지게 되었다(마 13장). 왕국은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준비되었지만(마 25:34) 왕국의 백성에게 그 왕과 더불어 거부되었던 것인데(요 1:11),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로 연기되자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엡 1:4) 교회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왕국이 거부당할 것을 미리 아시고 교회 시대를 계획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그분 자신의 피로(행 20:28) 낳으실 교회가 왕국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속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심판을 어찌 헤아리며 그분의 지나간 길을 어찌 찾아내리요?』(롬 11:33)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분께 영광이 모든 시대들, 곧 끝없는 세상에 걸쳐 있을지어다. 아멘』(엡 3:21).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성경의 주제는 교회가 아니라 "왕국"이다. 왕국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의 큰 물줄기이다. 그 줄기를 "성전"이라 불리는 배 한 척이 경륜에 따라 위용을 바꿔 가며 항해할 따름이다. 성경에서 성전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왕국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성전이 곧 왕국은 아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본질이나 본말이 전도되어 엉성한 신학이 나오게 되는데, 헛된 자부심에 들떠 있는 소위 "성전 신학"이 바로 그 장본인이다. 성전 신학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성전 관점"으로 해석한다. 성전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모두 다룰 수 없으므로 주요한 몇 가지만을 간추려 살펴보도록 하자.

성전 신학의 허술함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신학의 신봉자들은 에덴 동산의 역사적 "시원성"(始原性)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최초의 동산을 최초의 성전으로 본 것이다. 즉 그것이 "원형(原型) 성전"이라는 것이며, 나중에 만들어진 모든 성전들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담의 경작과 동산 관리는 제사장의 책무였고,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동산의 질서를 유지하며 그곳을 부정함으로부터 지켜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 1:28). "정복"과 "다스림"은 왕의 일이지 성전 제사장의 책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왕국의 왕으로 세우신 것인데, 그들은 이 명령을 최초의 제사장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그들의 선교 행위를 교회의 영적 통치를 위한 "정복 행위"로 여기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요한계시록"이다. 배교한 신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을 들먹거릴 때면 반드시 헛소리를 하게 된다. 성전 신학은 요한계시록 11장의 환란 성전을 교회라고 주장한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그 천사가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그러나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남겨 두고 측량하지 말라. 이는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었으며 그들이 마흔두 달 동안 그 거룩한 도성을 발 아래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라』(계 11:1,2). 이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대환란 때 세워질 "문자적인" 환란 성전이다. 이방인들이 마흔두 달간 짓밟을 거룩한 도성은 예루살렘이다. 이 마흔두 달(일천이백육십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굵은 베옷을 입고 예루살렘 도성에서 예언할 기간이며, 그들은 각종 이적으로 짐승의 세력과 싸울 것이다(계 11:5,6). 성전 신학은 대환란 때의 환란 성전을 교회라고 함으로써 교회가 환란을 통과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교회도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머물며 궁극적인 승리를 보증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성경은 주님께서 "다가올 진노," 곧 민족들이 마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이 부어지는 대환란의 진노로부터 교회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 즉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내신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이니라』(살전 1:10). 『주의 손에 한 잔이 있으니 그 포도주는 붉고 완전히 혼합되어 있도다. 그가 그것을 쏟으시니 지상의 모든 악인들이 그것의 찌끼를 짜 마시리로다』(시 75:8). 교회는 이 다가올 진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우리를 구해 내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시셨던 잔은(마 26:39,42) 온 세상의 죄인들이 마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으며(시 75:8), 주님께서 그 잔을 완전히 들이키셨기에(막 10:38) 그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은 없는 것이다!

성전 신학의 오류는 대환란에 머물지 않고 "지상 재림"에도 뻗쳐 있다. 그들은 다니엘 2장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을 "성전"이라고 해석한다. 문맥을 잘 살피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임에도 "돌"에 대한 선입견으로 성경 해석을 망쳐 버린 것이다. 『왕께서 보셨는데,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 이 철과 진흙으로 된 그 형상의 발을 쳐서 산산이 부수니, 그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함께 산산이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쭉정이같이 되어 바람에 날려 사라져 간 곳이 없어졌으며, 그 형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상을 가득 채웠나이다 』(단 2:34,35). 형상을 친 돌이 성전이라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성전이기에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단 말인가? 느부캇넷살의 꿈속의 "형상을 친 돌"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은 성전 신학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꾸짖는다. 『그 꿈이 이러하오며, 우리가 그 해석을 왕 앞에서 설명하리이다... 이들 왕들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한 왕국 을 세우시리니,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넘겨지지 않을 것이요, 도리어 그 왕국이 이 모든 왕국들을 쳐부수고 멸하여 영원히 설 것이니이다 . 왕께서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산에서 떨어져 나간 돌과, 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산산조각을 내는 것을 보신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후에 있을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니 , 그 꿈은 분명하고 그 해석은 확실하나이다』(단 2:36,44,45). 다시 말해 형상을 친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는 것은,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 곧 『반석』(고전 10:4)이시며 『귀중한 산 돌』(벧전 2:4)이시요 『귀중한 모퉁잇돌』(벧전 2:6)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 왕국들을 쳐부수고 멸하여 그분의 왕국을 영원히 서게 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다니엘은 그 돌을 분명 "왕국"이라고 해석했다. 그 왕국은 인간의 유한한 왕국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질 영원한 왕국이다. 이 선명하고 쉬운 진리를 눈을 뜨고도 읽지 못했단 말인가?

눈 뜬 소경들의 더듬거리는 해석은 "에스겔서의 천년왕국 성전"에서도 가관이다. 에스겔 40-48장에는 천년왕국 성전에서의 희생제사가 나오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히브리서 10:1-12(구약 희생제가 예표로서 성취된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에스겔의 기대"라고 얼버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희생제사가(겔 40:38,41-43; 43:18-27) 갈보리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 40-48장이 배교한 학자들에 의해 영적으로 해석되어 비유로 치부되고 있는 것은, 이 장들이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희생(히 10:10-14) 이후에 구약의 레위인 제사장 직분이 다시 제정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에 천년왕국에서 일어날 희생제사에 관한 예언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갈보리 십자가에 적용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천년왕국 성전에 관해 문자 그대로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내 보좌의 자리와 내 발바닥을 둘 자리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라.』(겔 43:7)라고 하셨다. 이후에는 "성전의 제단을 만드는 날"로부터 7일 동안 피를 뿌리는 제단의 율례와(18-26절), 그 뒤 8일째부터 이스라엘이 계속 드려야 할 정규적인 희생제사의 율례를 정해 주셨는데(27절), 이 율례가 주님께서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을 받으시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날들이 지나고 제팔일째와 그 다음에 제사장들은 제단 위에 너희 번제물과 화목제물들을 드릴지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겠노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 43:27). 에스겔서가 말씀하는 성전 제사는, 주님께서 천년왕국 때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시는 방법을 예언한 것이지 결코 갈보리 십자가를 기대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성전 신학의 오류는 "영원 시대"에 가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그들은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과 동일시하며 새 예루살렘이 우주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상한다고 가르친다. 이로써 성전을 우주 전체로 확대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성전이 피조 세계 전체를 가득 채울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영원 시대에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예루살렘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성전도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도성』이며(계 21:2) 그 도성 안에는 성전이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곳의 성전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니, 성 안에는 성전이 없더라. 이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곳의 성전임이라』(계 21:22). 여기에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성전 신학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신학적 잡설일 뿐이다.

에덴 동산은 성전이 아니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거처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서 시작하여(창 28:19-22) 그 뒤 시내 산의 성막을 거쳐(출 40장) 솔로몬의 성전에 이르게 되는데(왕상 6-8장), 이 성전은 느부캇넷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대하 36:19), 포로기 이후 에스라 때 스룹바벨 성전이 건축된다(스 3-6장, 슼 4:9).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증축했지만(막 13:1),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의 성전은 주님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9-21). 주께서 승천하신 후로는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 각자의 몸이 성전이 되었고(고전 3:16; 6:19), 교회가 휴거된 뒤로는 대환란 때 예루살렘에 환란 성전이 세워진다(계 11:1,2).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황폐케 하면(단 9:26,27)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천년왕국 성전을 세우실 것이다(겔 40-48장). 천년왕국 뒤에 오는 영원에서는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 도성에서(계 21:9,10)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실 것이다(계 21:22). 성전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한 구심점이었으며 결국 주님 자신이 영원한 구심점이 되실 것이다. 성전은 중요하지만 성경 해석이 그것으로만 이뤄지면 매우 혼란스럽게 된다. 깨닫고 보면 쉬운 진리를 성전 신학이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참된 계시가 아닌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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