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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려는 목사들의 열린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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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8월호>
이 마지막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배교한 교회들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가장 "거룩하고" "최우선적인" 임무로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소외된 이웃을 잘 돌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그들을 교회로 데려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 그들의 관심과 책무는 오직 "세상과의 소통"에만 집중되어 있다.그래서 그들은 "성경적 성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이는 "성별"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말씀하면, 그들은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둘러댄다. 성경이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롬 12:2)라고 말씀하면, 세상과의 소통을 그런 편협한 시각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성경이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 6:15)라고 말씀하면, 그들은 급기야 현대의 목회방식은 변해야 한다면서 그들의 "배교한 인본주의적인 철학"으로 "구시대적인" 말씀들에 난도질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교회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모습을 잘 반영해 주기라도 하듯, 최근 기독교 TV CTS는 여름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하면서 세상을 향한 진솔한 토크를 하겠다는 취지로 <통하는 목사들의 열린 토크>란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세상과 소통하겠다고 나선 목사들은, 최일도 목사(다일 공동체 대표), 지승룡 목사(민들레 영토 대표), 박성민 목사(한국 CCC 대표), 송길원 목사(하이패밀리 대표)이다.
CTS는 본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 신명을 불어넣고자 ‘춤추는 목사들’로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 네 명의 목사들이 ‘통하는 목사들’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진솔한 모습을 보여 준다. 지성과 영성이 조화된 통하는 목사들의 유머와 아줌마를 능가하는 수다를 만날 수 있다... 네 명의 목사들이 풀어 놓는 농담과 웃음 속에서 보석 같은 기독교적인 진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빈 껍데기 같고 경박하며 성도들에게는 전혀 합당치 않은 어리석은 말이나 농담(엡 5:4)을 주고받는 그들의 천박한 수다 속에서 무슨 성경적 진리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고(딤전 5:17), 항상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하며(딤후 4:2),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해야 할(행 6:4) 목사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세상 토크 쇼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을 스스럼없이 그들의 입으로 쏟아내고 있단 말인가? 실로 지난 2천 년 동안의 교회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오늘날 배교한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을 일삼는 목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박목사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통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변해 가면서 상대방(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최목사는 "하나님과 통한다고 하니까 세상과도 통해야 하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는 통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만 통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통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통할 수 있다는 논리는,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을 간과한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그는 약 6천 년 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었는가 보다. 성경은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말씀한다(고후 4:4). 또한 이 세상에 대해 규정하기를 "악하다"고 말씀한다(갈 1:4). 이처럼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세상과 들어온 "이후의" 세상이 어찌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과의 소통"의 문제는 깨닫기 어려운 "질긴 고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매우 기초적인 성경적인 실행에 관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일치되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임이라... 그러므로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들에게서 나와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8).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과 "소통"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통 자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이고(요 8:47),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다(요 17:14).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기도조차 하지 않으셨다(요 17:9).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해야 하고, 그들의 관점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들의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을 버리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소통"은커녕 박해가 따르기 때문이다(딤후 3:12).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면 불경건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불경건함은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버리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딤후 2:16). 누가 이런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을 통해 불경건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인가? 성경은 동일한 문맥에서 그 답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바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 자들이다(딤후 2:15).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꾼으로 드러나고 만다. 세상과 소통하겠다고 나선 이 "네 명의 출연자들"이야말로 그들인 셈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한 적이 없기에, 항상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는 이를 수 없고(딤후 3:7), 결국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다가 불경건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단 한 번도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소란"하게 했을 뿐이다(행 17:6). 그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다름아닌, 성경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전함으로써 그렇게 했던 것이다(행 17:3). 그것도 "습관대로" 항상 그렇게 했던 것이다(행 17:2).
사도 바울은 세상과 통하기 위하여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동원했다든지, 세상의 호감을 사기 위한 그럴듯하고 정중한 말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권면했던 방식이나 복음을 증거하고 설교하는 방식을 보면 오늘날 세상과 소통하려는 설교자들의 모습과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설교"(?)에 유머가 있어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 코미디언이 되지 않으면 인기가 없어진다. 농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설교"(?)가 되는 것이다.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이 결여된 담론이나 설교로는 결코 세상과 소통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의 권면이나 설교에서는 결코 그런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적이고 강렬했다. 성경적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강력하게 경고했고(갈 1:9,10),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에서는, 견책하고 책망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딤후 4:2). 심지어 바울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가 복음을 들어야 할 죄인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전파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펠릭스 앞에 섰을 때, 그 총독에게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해서 담대하게 선포했다(행 24:25). 만일 사도 바울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면 이런 권면이나 설교들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에 반해 세상과 소통하는 목사들은 "아첨의 말"(살전 2:5)이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말"(딤후 4:3)들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그들의 권면이나 설교에서는 분명한 죄에 대한 찔림도, 회심을 위한 강한 메시지도 찾아볼 수 없다. 타락한 설교자는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나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타락한 청중이나 구원받지 못한 청중을 향하여 "여러분은 지금 죄와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한 가지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결론
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하여 마땅히 전파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관점과 시각에서 세상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자 하는 설교자들은 "짖지 못하는 개"와 같다(사 56:10). 그들 모두는 눈멀고, 무지하며, 말 못하는 개들에 불과하다. 짖지도 못한 채, 잠자고 눕고 졸기만을 좋아할 뿐이다. 비속하고 허황된 말들이나 농담, 수다 등으로 시간을 소일하면서 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