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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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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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9월호>

우리나라 “최고 부자”는 삼성그룹 총수 일가다. 그 집안의 종교는 “원불교”인데, 이 종교의 주요 가르침은 “지상 생애”에 초점을 두고 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요 교리로 삼아 사회에 공헌하고 선을 베풀면서 살라는 소위 “좋은 말씀”을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원불교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무난하고 마찰 없는 종교,” “들어가기도 편하고 나오기도 편한 종교”이다.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관해 단 한마디도 남긴 적이 없었고, 그것에 관한 탐구와 논쟁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원불교 역사상 가장 많은 “헌금”을 했을 재벌가 총수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가족들이 흘린 눈물과 슬픔은 “종교”라는 액세서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상과 별다른 마찰 없이 잘 지내고 듣기 좋은 말이나 전하는 것은,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해 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바, 그야말로 겉치레와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번은 군대 동기에게 “복음 전도지”를 건네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읽어 본 그는 “내용이 너무 강하다”면서 “이런 내용을 전하기보다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으는 것이 더 우선이지 않을까? 죄와 죽음, 심판과 지옥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불타는 장면이 그려진 지옥 그림은 사람들에게 거부감만 줄 거야. 이런 거친 방법으로 전도하면 어떻게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려고 하겠어!”라고 말했다. 복음을 전하러 거리로 나가 설교하거나 전도지를 전해 줄 때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선은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나오게 한 뒤에 진리를 전파해야 먹혀들지 않겠느냐는 심산이다. 보통은 “성경의 진리”가 원불교 같은 세상 종교의 “좋은 말씀”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이들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그저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를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행위” 정도로 여긴다. 세상과 타협을 한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져서 고통을 맛보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또한 그곳에서 영원히 저주받고 고통당하는 혼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끔찍한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복음 전파는 사람들의 비위나 건드리는 행위라고 계속 비난하겠는가? 그저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할 목적”으로 거리에서 설교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는 것이라면 그들의 말이 옳다. 굳이 그렇게 “거친 방법”으로 복음 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커피나 화장지를 나눠 주면서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라든지 “우리 교회는 말씀이 좋아요.” 또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등의 말들로 사람들의 가려운 귀나 즐겁게 해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언제 죽어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죄인에게 죽음과 심판을 경고하는 문제를 두고서 그렇게 한가롭게 여유 부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만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죽으면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가 그런 여유를 부리고 있다면, 그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나태한 성도”다. 불이 났으면 “불이야!”라고 소리 질러야 한다. 도둑이나 강도를 봤다면 “도둑이야! 강도야!”라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야 한다. 사람이 물에 빠졌으면 “사람 살려!”라고 소리소리 질러야 한다.


언제 죽어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죄인에게 죽음과 심판을 경고하는 문제를 두고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거리에서 설교하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불편을 줘 가면서 전하지 말고,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더 잘 전해지지 않겠어요? 예를 들어, 영상을 만들어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만 보게 하면 좋잖아요.” 그러나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은, 침례인 요한처럼(마 3:1), 예수 그리스도처럼(마 4:23, 요 7:37), 사도 베드로처럼(행 2:14), 사도 바울처럼(행 17:22) 세상 사람들에게 직접 “외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라는 종교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은 『세상을 소란케 한 자들이 여기에도 왔도다.』(행 17:6)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성경에서 제시한 “효과적인 복음 전파 방법” 역시 바뀌지 않았다. 세상이 제안하는 지혜로 복음 전파의 방법을 권면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에 따르는 것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복음 전파”는 성경적 방법을 따라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하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과연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방법을 따르는 그들보다 어리석으셨기에, “성전에서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요 7:37,38)라고 외치신 것인가? 사도 바울이 그런 자들보다 복음 전파에 대한 안목이 부족했기에, “마르스 언덕에 서서”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가 보니 너희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이니라.』(행 17:22)라고 책망한 것인가?

세상은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공개적으로 전파되는 것을 싫어한다. 성경과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파하는 성도를 세상이 환대해 줄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금의 관용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지니신(마 28:18)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들이다. 우리를 대사로 임명한 위임장은 성경에 있다(고후 5:18,19). 이 위임장을 통해 사탄의 왕국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항복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웃으면서 반겨 줄 것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림판을 설치하고 스피커의 스위치를 켜고 음량을 조절하는 순간, 누군가가 다가와 “소음 공해, 공공질서 파괴”를 운운하며 저지하려 할 것이다. 과연 그들이 한 사람의 혼을 지옥에서 구출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기나 하겠는가? 우리가 그런 자들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면서 하나씩 양보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 복음 전파의 특권을 잃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이것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문제다.

진리는 “진리답게” 전파해야 한다. “알프레드 깁스”는 그의 책 <설교자와 그의 설교>에서 “믿는 사람답게 설교하라.”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전파해야 한다는 점이다. 광화문 광장에는 몇몇 이상한 교회들에서 나온 이상한 전파자들이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앵앵거린다. 실로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복음의 말씀”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전파할 때 사용하는 말씀과 어휘들 하나하나가 제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배우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방언”(외국어)으로 설교하는 것을 금한(고전 14:23-28) 이유는 그들이 그런 말을 알아듣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쉽게,”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와 표현으로 전파해야 한다. 복음과 구원받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복음은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해서, 정확하게 전파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는 성경 말씀이 아예 생소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기쁜 일이다. 거리 설교와 복음 전파 현장에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당장 바로 눈앞에 회심자가 없다 하더라도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서 싹을 내어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사 55:8-11).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말씀을 확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다. 전파되고 있는 그 말씀 한 톨 한 톨이 마치 큰 망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부수어 조각내고 있기 때문이다(렘 23:29). 그것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산산이 부수는 과정이다. 물론 어떤 죄인들은 그런 과정에서 더욱 완고해져 지옥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백보좌 심판에서 누군가가 감히 하나님을 판단하려 들 때 주님께서는 한때 그렇게 전파된 복음을 통해 이기실 것이다(롬 3:4).
무엇보다도 “복음 전파”는 주님의 명령임을 기억해야 한다(마 28:19,20). 기본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부과하신 전파의 의무는 완료된 것이고, 그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선택은 복음을 듣는 그 당사자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 감사하게도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혼이 있다면 그 혼을 위해 함께 무릎을 꿇어 주라.


전파되고 있는 그 말씀 한 톨 한 톨이 마치 큰 망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부수어 조각내고 있다!

복음 전파가 죄인들에게만 유익한 것은 아니다. 복음 전파는 복음을 전파하는 당사자와 그와 함께하는 동료 일꾼들에게도 유익하다. 복음을 전하면 자신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다. 이것은 복음을 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한다. 또한 수고하는 동역자들과 더 깊은 교제 관계가 형성되고, 그들을 향한 더 큰 신뢰가 쌓이는데,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매우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는 가운데 무더운 땡볕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수고하는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여! 더욱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다. 믿음의 전우들이 함께 싸우고 있음을 잊지 말고 세상을 더욱 소란케 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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