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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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마디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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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1월호>

사람이 죽기 직전 남긴 말은, 생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인생의 요약"이다. 성경에는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여섯 시간 동안(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막 15:25,33)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을 때 외치셨던 일곱 마디의 말씀이 담겨 있다. 일곱은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이며, 주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전혀 어긋남이 없이 온전히 선포되었다. 이 말씀들을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결하신 인격을 배우게 되어,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같이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처럼 말한 사람은 아직껏 아무도 없었나이다』(요 7:46).

①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마디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중보 기도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인들에 의해 죽임당하고 계시면서도 죄인들을 먼저 생각하신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을 볼 수 있다. 이후 그 위대한 사랑을 받아들인 성도들 역시 그와 동일한 간증을 남겼는데, 죽기 직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부르짖었던 스테판을 시작으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고문하고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윌리엄 틴데일은 밧줄에 목이 조이고 불이 온몸을 삼키는 와중에도 자신의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영국 최초의 순교자였던 알반은 화형대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던 사형 집행관을 회심시켰다. 이처럼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중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믿음의 순교자들이 앞서 자기들을 용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②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이것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한 명에게 하신 말씀이다.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었다(마 27:44).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한 강도에게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사형을 당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조롱할 만큼 완악한 죄인을 변화시키는 힘은 다름 아닌 말씀이다(시 19:7). 주님의 십자가에는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인 명패가 있었는데(마 27:37, 요 19:19), 그 강도는 바로 이 말씀을 믿은 것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너무 많이 얻어맞으셔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하셨지만(사 52:14), 그는 기록된 그대로 주님을 『유대인의 왕』(막 15:26)으로 믿었고,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주님께 의탁했다. 벌어지는 상황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씀이 그렇다고 했을 때 그대로 믿는 것이 곧 믿음이다. 예수님은 회개한 강도의 요청을 곧바로 받아주셨고, 그를 지옥에서 낙원으로 옮겨 주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신(계 1:18) 구주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③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네 어머니를 보라!』 (요 19:26,27) 이것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기시는 장면이다. 당시 마리아는 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과부가 된 어머니를 돌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딤전 5:1-16).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의무까지 온전히 수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로 제시하신 것은 단순한 의무를 뛰어넘는 사랑의 말씀이었다. 사실 마리아는 태에서부터 그분이 뛰노는 걸 느꼈으며, 그분을 품에 안아 젖을 먹여 키웠기에, 그녀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잃어야 했고, "구주로서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한 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녀의 자녀들까지 하나가 되어 기도에 전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이상 아들로서가 아니라 구주로 믿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행 1:13,14).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숨을 거두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 외침은 "버림받은 자"의 외침이었다. 평소처럼 "나의 아버지"라고 외치지 않으시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이유는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요 11:41,42, 눅 23:46) 한 "인간"으로서 버림받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외침은 버림받은 인간들이 지옥에서(마 25:41, 살후 1:9) 외치는 소리였다.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으셨는데, 해가 어두워진(마 27:45) 어둠 속에서 부르짖으신 그 외침은 지옥의 흑암 가운데서 부르짖는 죄인들의 절규인 것이다(눅 16:19-31). 광야의 놋뱀처럼 들려올려지신(요 3:14) 주님께서는, 마귀의 형상을 따라 벌레들로 변해 버린(막 9:44,46,48) 마귀의 자식들처럼 『벌레』가 되신 것이다(시 22:6).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⑤ 『목마르다』 (요 19:28). 『물의 원천들을 지으신』(계 14:7) 주님은 역설적이게도 한 잔의 물조차 얻지 못하셨다. 대신 식초를 받으셨는데, 한 번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으로 그 내용물은 『쓸개즙을 탄 식초』(마 27:34), 즉 『몰약을 탄 포도주』였다(막 15:23). 알코올성 포도 식초와 몰약이 섞인 이 음료는 이제 곧 죽게 될 사형수의 통증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일종의 마취제였다. 잠언 31:6에서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맛을 보시고 즉시 거절하셨다(마 27:34, 막 15:23). 『술을 마시는 것은 왕이 해야 할 것이 아니』었기에(잠 31:4) 유대인의 왕이신 주님은 거절하신 것이다. 또 한 번은 주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후였는데(요 19:29), 이때는 그냥 보통의 식초를 받으셨다. 그것은 병사들이 조롱의 의미로 준 것이다(눅 23:36). 물을 타지 않은 순도 높은 식초는 너무 신맛이 강해서 역하게 하고 큰 고통을 준다(잠 10:26). 예수님의 고난 중에 식초가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약 천 년 전에 이미 예언된 것인데(시 69:21), 이것은 주께서 비방으로 마음이 상하시고 아무런 위로자도 찾지 못하셨을 때 주님의 대적들이 고통을 가하고 조롱하며 식초를 준다는 내용이다. 그들은 "마음이 우울한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며 옷을 빼앗고 식초를 붓는 자들"이었다(잠 25:20). 결국 주님은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마취제"는 거절하셨고 그 "조롱"의 식초는 받아들이셨다(요 19:30). 죄인을 위한 형벌을 온전히 받으시기 위해 고통 앞에서 물러나지 않으시고 마지막 한 방울의 고통까지 받으신 것이다.

⑥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눅 23:46). 숨을 거두시기 전 큰 음성으로 외치신 이 말씀은 『주의 손에 나의 영을 의탁하나이다.』(시 31:5)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은 시편 22:1을 인용한 것이고, 『목마르다.』는 말씀은 시편 69:21의 성취임을 볼 때,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이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은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하는 아들의 신실함을 보여 준다. 자신이 그토록 원치 않았던 일이 닥쳤을 때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의 본을 우리들에게 남기신 것이다.

⑦ 『다 이루었다』 (요 19:30).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마디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일을 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였다(눅 2:49). 주님은 어린 시절부터 숨을 거두시는 순간까지 줄곧 아버지의 일을 염두에 두셨다. 결국 주님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고, 이제 우리는 로마카톨릭 미사에서 하듯이 속죄제를 "반복"하고 "지속"할 필요가 없다(히 10:18). 구원받기 위해서 다른 "행위"를 더할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일곱 마디의 말씀』

① 용서의 말씀

② 구원의 말씀

③ 위로의 말씀

④ 고뇌의 말씀

⑤ 고통의 말씀

⑥ 의탁의 말씀

⑦ 승리의 말씀

기나긴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부장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참으로 이 사람은 의인이었도다』(눅 23:47). 극심한 고통과 조롱과 유혹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흠도 없고 점도 없다"는(벧전 1:19) 간증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 같은 본을 남겨 놓으시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다(벧전 2:21). 우리 역시 이 악한 세대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점 없고 흠 없이 평강 가운데서 그분께 발견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벧후 3:1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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